화씨 9/11, 오바마, 미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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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을 봤다. 한참 늦었다.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재기발랄하고 신랄하다. 카메라는 조지 W. 부시의 취임식을 비춘다. 흑인들의 선거권을 유린해 선거 결과를 뒤집은 공화당 후보에겐 출발부터 삐걱거림은 예상된 일이었다. 영화는 ‘지구촌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오지랖을 비웃고, 그 수장인 미국 대통령에게 드리운 근엄한 장막을 보기좋게 걷어버린다. 부시는 희화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마이클 무어는 참으로 재간둥이다. 그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거나 미처 보지 못했던 자투리 영상들을 모은 다음 훌륭한 요리사처럼 맛깔나게 버무렸다. 이미 공개된 자료들을 분석하고 재구성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여줬다. 그가 한 것이라곤 남다른 자료수집 노력과 집중력 그리고 발품이었다.

뉴스 카메라 앞에서 테러 종식을 일갈하던 부시와, 천연덕스럽게 이들과 끈끈한 교분을 과시하는 카메라 뒤 부시의 모습. 아랍인들 피의 대가로 주머니를 채우는 석유 재벌. 제 배를 채우기 위해 가난한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전쟁 장사꾼. 누가 믿겠는가. 권력과 자본에 대한 한 개인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고 무참함을.

우리가 보고도 보지 못한 진실을 카메라는 발품과 집요함으로 들춰낸다. 그러면서 말한다. 당신이 보는 풍경은 코메디도 풍자도 아니요, 보이는 그대로 진실이라고. 이처럼 코믹한 상황이 곧 현실이라는 갑작스럽고도 비극적인 인식. 위대한 아메리카 대통령의 허상을 한꺼풀 벗겨내기까지 세계가 치른 대가는 너무도 크지 않은가.

묘하다. 영화가 끝나고 채널을 돌리니 미국이 바뀌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세계인이 주목하는 대통령이 새로운 미국 탄생을 선언하고 있었다. ‘평화’와 ‘희망’, ‘상식’이 귓전을 때렸다. 이 새 역사의 현장에서 저물어가는 부시는 딱 한 마디로 자신이 비튼 역사를 너무나도 가볍게 눙쳤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 때와 다른 선택을 할 지도 모르겠다”고. 저 보이는 장면은 진실일까, 또다른 가면일까.

무어의 얼굴 위로 미네르바가 겹쳐진다. 1년 전 똑같이 ‘소통’을 내세우던 우리는 지금 어떤가. 소통 대신 밀어붙이기식 통제가, 평화 대신 진압의 군홧발이 점령하는 곳. 무어와 미네르바는 똑같이 공개된 진실을 재구성해 대중들에게 알렸지만, 결과는 어떤가.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알리는 감시자과, 나라 전체를 농락한 죄인으로 낙인찍힌 고졸 무직자. 보이는 그대로가 곧 남루한 현실인 것을.

무어가 한국에서 이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대체 몇 가지 죄목을 끌어다붙일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