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도서출판 인사이트 “DRM 없이 전자책 팝니다”

2012.05.01

도서출판 인사이트는 신간 ‘파이썬 완벽 가이드’ PDF 버전을 디지털저작권관리(DRM)를 씌우지 않고 4월18일부터 웹사이트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종이책 출간일이 2012년 4월6일, 그야말로 따끈한 책인데 안전장치 없이 내놨다. 가격은 종이책 3만8천원, PDF 파일 2만7천원이다. 이 책과 함께 2009년 4월 출간되고 절판된 ‘쉽고 빠른 웹 개발 장고’는 1만1천원에 PDF 파일로 같은 날 판매되기 시작했다. 종이책으로 2만2천원에 팔리던 책이다.

DRM은 파일 관리 권한을 저작권자나 판매처가 주무를 수 있는 도구이다. 불법 복제와 유포를 막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도서출판 인사이트사는 DRM 없이 전자책을 팔겠다는 결심을 어떻게 했을까.

도서출판 인사이트는 IT 서적을 전문으로 출간하는 곳이다. 주로 프로그램 개발자를 위한 개발 언어에 관한 개론이나 사용법 같은 책을 출간한다. 지금까지 총 110종을 출간했는데 스테디셀러로는 ‘실용주의 프로그래머’과 ‘생각하는 프로그래밍’, ‘자바스크립트 완벽 가이드’, ‘Xcode4’ 등이 있다.

전자책을 DRM 없이 PDF로 팔아보자는 아이디어는 한기성 대표가 먼저 냈다. 직원이 신간을 전자책으로 동시 출간하면서 DRM 없이 팔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는 어려운 일이리라. 전자책 판매 사이트를 만들고, PDF 판매 과정을 테스트하는 업무는 김승호 편집자와 송우일 편집자가 전담했다.

인사이트 출판사 송우일 김승호 편집자

▲송우일 편집자와 김승호 편집자(왼쪽부터)

김승호 편집자는 “재정적인 부분에 관한 고민은 대표가 결정했는데 다들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라고 운을 뗐다. 물론, 전자책을 팔면 종이책 매출을 갉아먹고 전체 매출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란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게다가 DRM을 적용하지 않고 파일을 파니 불법 복제돼 돌아다닐 것이란 걱정도 있었다.

“DRM에 관해 공통적으로 독자가 책을 읽기 어렵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특정 단말기나 특정 뷰어에서만 전자책을 보는 건 별로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우리 독자의 특성상 마음만 먹으면 DRM은 얼마든지 풀 수 있다고 느꼈고요. 그래서 그럴 바엔 DRM 없이 제공하는 게 편의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DRM이 완벽한 안전장치가 아닌데 굳이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독자들이 DRM 때문에 전자책을 살 때, ‘이 책이 나에게 필요하고 유용한가’보다 단말기 환경과 뷰어부터 고민해야 하는 게 마뜩찮은 건 사실이다. 도서출판 인사이트는 독자 입장에서 DRM을 없애자고 결정한 셈이다.

독자들이 전자책을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사해 배포하지 않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작은 ‘완충장치’도 마련했다. 책을 살 때 이름과 e메일 주소를 입력하게 해, PDF 파일에 “정보라님이 구입한 전자책입니다”라는 식으로 문구를 넣었다. 이 문구도 얼마든지 지울 수 있겠지만, 독자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장치라고 김승호 편집자는 설명했다.

인사이트 출판사 PDF 판매 사이트

독자 입장에서 DRM을 없애기로 했으니 이번엔 출판사로서 전자책 파일 형식을 고민했다. 개발서적 위주로 출간하는 특성상 도서출판 인사이트는 최근 널리 쓰이는 EPUB 대신 PDF를 골랐다. 우리나라 출판 환경에서 EPUB 파일을 만드는 게 생각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대체로 30년 전에 나온 저작도구인 ‘쿽’을 사용하거나 EPUB으로 변환하는데 그나마 수월하다는 인디자인으로 편집·디자인해도 글꼴을 이미지로 사용하는 곳이 있다. EPUB으로 자동 변환하는 게 아니라 종이책 제작할 때처럼 일일이 검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도서출판 인사이트가 내는 책은 소설처럼 편집·디자인이 단순하지 않고, 예시 코드나 수식 같은 게 있으니 EPUB 대신 PDF가 더 낫다고 결정했다. ‘파이썬 완벽 가이드’는 인쇄소에 넘기는 PDF 파일을 그대로 사용했다.

김승호 편집자는 PDF로 제작해 파는 것도 간단하지 않고 비용이 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출판한 책을 쿽 파일로 가지고 있는데 이 때 사용한 저작도구가 쿽3.3입니다. 자동으로 PDF로 변환하는 기능이 없는 소프트웨이인지라, 따로 PDF로 변환해야 하는데요. PDF로 만드는 프로그램 또한 수백만원을 호가해, 외부 업체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편집·디자인을 외부 업체에 의뢰할 때 ‘인디자인’으로 작업해달라고 주문하고 PDF 파일도 같이 받고 있다. PDF는 독자가 글꼴이나 줄간격을 바꾸는 걸 지원하지 않지만, 출판사가 EPUB를 만들 때처럼 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종이책의 깔끔한 레이아웃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리하다는 이야기다.

PDF로 판매할 책을 찾고 PDF 파일을 확보해 웹사이트에 올리는 과정은 송우일과 김승호 편집자뿐 아니라 도서출판 인사이트의 모든 편집자가 맡을 예정이다. 한 사람이 모든 걸 전담하는 게 아니라, 전자책으로 출간할 책은 해당 편집자가 PDF 파일 확보와 작가와 협의 과정을 맡는다. 해당 책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전자책 제작과 판매도 챙기는 모습이다.

인사이트 출판사 PDF 판매 사이트

▲도서출판 인사이트의 PDF 판매 사이트는 저자 중 한 사람인 개발자가 제작했다.

도서출판 인사이트가 PDF 전자책을 직접 판매한 지 이제 2주가 되어 간다. 성급할 수도 있지만, 기대만큼 매출을 거두었는지 궁금했다. 송우일 편집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매일 꾸준하게 팔리는 것 같다”라면서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흔치 않은 시도를 해서인지 지금 성과에 허수가 섞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DRM 없는 전자책이 나올 분위기를 위해 ‘이건 사줘야 해. 그래야 다음 책도 낼 거야’란 마음과 호기심에 사는 사람들이 섞였다고 내부에서 평가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평가마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쉽고 빠른 웹 개발 장고’는 3년이 넘은 책인데도 팔리고 있다. “종이책 재고도 소진했고 사실상 책으로서 운명을 끝낸 책인데, 전자책으로 나오고 조금씩 팔리고 있다”라고 김승호 편집자는 말했다.

도서출판 인사이트는 4월에 판매하기 시작한 2권을 포함해 총 6권을 PDF로 판매할 계획이다. 보다 구체적인 로드맵을 물어보니 치밀한 전략을 가지고 시도하는 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표를 포함해 총 7명이 일하는 조직이니 상황에 따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을 살리려는 생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 시도를 한두달이나 1~2년 잠깐 해보고 평가할 생각은 아니라고 했다. 적어도 3년은 진행하고 나서 회사 매출과 재정에 끼치는 영향을 평가할 계획이다. 물론, 그 전에 PDF 파일 안에서 목차에서 해당 챕터 바로 가기나 아웃링크 보내기 등 기능을 추가하고, 계좌이체 이외의 결제 방법을 도입해야 하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두 편집자는 매출은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전자책이 종이책 매출의 1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는데요. 두 분야의 매출이 모두 늘어나면 좋겠지요.”

도서출판 인사이트는 5월에는 ‘프로그래밍 루비’와 ‘레일스와 함께하는 애자일 웹개발’ 개정판을 PDF로 판매할 예정이다.

borashow@bloter.net

인터넷, SNS, 전자책, 디지털 문화, 소셜게임, 개인용 SW를 담당합니다. e메일: borashow@bloter.net. 트위터: @bora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