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꾼끼리 빌리고 갚고…세계는 ‘집단금융’ 실험중

가 +
가 -

인터넷이 금융업계에 일으킨 변화 가운데 하나는 온라인을 통한 ‘개인간 직거래 방식 금융서비스'(P2P Finance) 등장이 아닐까 싶다.

지금껏 돈을 빌리려면 십중팔구 ‘제도’를 이용해야 했다. 은행이나 제2금융기관을 찾아가 담보를 걸거나 신용 평가를 받고 돈을 빌리는 식이다. 그나마 담보가 없고 신용이 불량한 사람은 제도권 대출을 아예 포기하거나 사금융, 이른바 ‘고리대금업자’를 찾아 그늘진 곳을 뒤져야 했다. 그 대가는 제도권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살인금리와 그에 잇따른 파국의 길이었다.

이런 폐단을 막고자 등장한 것이 ‘마이크로크레디트’다. 담보도, 신용도 없어 제도권 대출 서비스를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무담보 소액대출 서비스다. 단순한 자금 지원에서 그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창업에 힘을 보태주는 식으로, 금리도 시중은행과 비슷하거나 낮다. 마이크로크레디트는 취지는 좋으나, 아직까지 제공할 수 있는 혜택의 범위가 좁다는 벽에 부딪혀 있다. 한 줌 도움에 목마른 저소득층에 비해 마이크로크레디트 저수량은 아직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촘촘히 얽고 있는 인터넷 네트워크가 이같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을까. ‘P2P 금융’은 이런 고민이 만들어낸 새로운 실험이다.

P2P 금융이란 은행같은 중매기관을 거치지 않고 멀리 떨어진 사람들끼리 온라인으로 직접 금융거래를 하는 방식을 말한다. 거래 당사자들은 대부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도움을 주는 사람도 모두 인터넷이란 끈으로 만나고 엮였다. 제도권 금융 서비스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터넷이 중매 플랫폼을 맡는 셈이다. 그래서 이를 ‘사회적 금융'(Social Finance)이라고도 부른다.

돈을 꾸고 갚는 활동만 있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축구클럽을 사들이기 위해 온라인에 모여 주머니를 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수가 팬클럽이 모아준 돈으로 음반을 낸 뒤 판매 수익을 팬클럽에 돌려주는 일도 있다. 의도와 방식이 다를 뿐, 낯선 누리꾼들이 인터넷으로 돈을 모으고 쓰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은 ‘집단금융'(Collective Finance) 실험인 셈이다.

사회적 금융 서비스가 늘어나는 만큼, 이를 제대로 연구하려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이를테면 얼마전 영국에서 출범한 P2P 금융 연구 프로젝트 ‘위뱅크‘가 그렇다.

webank500

프로젝트가 던지는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제도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요컨대 ‘금융시스템’이란 제도를 거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직접 돈을 꾸거나 빌려주고, 투자를 하고, 환전을 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실험해보자는 얘기다. 지금껏 당연히 거쳐야 했던 금융기관이란 중개인 없이 개인끼리 웹을 통해 직접 금융거래를 해보자는 발상이다.

‘위뱅크’는 영국 네스타오픈비즈니스가 함께 띄운 인터넷금융 연구 프로젝트다. 네스타는 웹 커뮤니티나 협업 등이 어떻게 영국 사회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지 실험하는 ‘웹 커넥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위뱅크’에 참여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지난 1월14일 첫선을 보인 ‘위뱅크’는 그동안 전세계 사회적 금융 모델들을 진득하게 추적했다. 지난 3월5일에는 그 동안 연구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도 내놓았다.

보고서는 “이 혁신적인 온라인 금융 솔루션은 특히 최근 몇 달 새 주류 미디어들로부터 큰 관심을 얻고 있다”며 “4년전 처음 등장한 P2P 대출 서비스가 이제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일본 등 전세계 30개 이상 업체로 늘어났다”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8개 주요 사례에 대한 분석 결과도 공개했다.

조파(Zopa)

미국 ‘프로스퍼’와 더불어 원조 P2P 금융서비스로 꼽히는 온라인 소액대출 서비스. 개인당 10파운드 단위로 최소 1천파운드에서 최대 1만5천파운드(약 200만~3100만원)까지 빌릴 수 있다. 대출희망자의 신용도와 현황 등을 종합해 등급을 매기고, 이에 따라 이율이 달라진다. 투자자는 한 사람 당 최대 2만5천파운드까지 돈을 빌려줄 수 있으며, 대출 기간과 이자율 등을 직접 정해 올리면 입찰에 따라 투자자를 결정하게 된다. 현재 3200만파운드(약 660억원) 규모를 운용하고 있다. 조파는 중개수수료와 불량채권을 뺀 투자자들의 연간 평균 수익률을 9.1%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01_zopa

프로스퍼(Prosper)

액셀 파트너스, 벤치마크 캐피털, DAG벤처스 등이 투자한 미국지역 P2P 대출 중개 서비스. 대출희망자는 최대 2만5천달러 한도 안에서 대출 요청을 올릴 수 있으며, 투자자 입찰 과정을 거쳐 3년 고정금리 방식으로 돈을 빌려쓴다. 중도상환수수료는 따로 없다. 조파와 달리 대출희망자가 직접 투자자를 선정할 수 있다. 회원수도 83만명이 넘으며, 지금까지 1억7800만달러(약 2647억원) 규모의 대출을 집행했다.

02_prosper

쿠버라 머니(Kubera Money)

믿음직한 지인들끼리 모여 정기적으로 돈을 넣고 목돈을 돌아가며 받는 ‘계'(ROSCAs) 방식을 적용한 온라인 모델. 소규모 계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플랫폼인 셈이다. 아직 공식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았다.

03_kubera

키바(Kiva)

소규모 창업을 꿈꾸는 개발도상국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마이크로크레디트 서비스. 실리콘밸리 엔젤 투자자들이 모여 만든 비영리 사회적 벤처다. 투자금을 창업희망자에게 곧바로 전달하지 않고 지역별 파트너를 거쳐 집행하는 점이 독특하다. 지역 파트너들은 창업희망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식으로 자립 자금을 마련한다. 이율은 지역 파트너가 자율 결정하지만, 터무니없이 높은 이율을 책정하는 곳은 파트너로 받지 않는다. 투자자들은 만기시 이자 수익 없이 원금만 돌려받는 대신, 이자 수익이 없으므로 세금도 내지 않는다. 이것이 최소한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키바를 통해 저개발국가 주민들에게 투자하도록 돕는 동력이다. 키바는 또한 페이팔이 송금 수수료를 전액 면제해준 첫 서비스이기도 하다.

04_kiva

셀어밴드(Sellaband)

가수들이 자기 음악을 직접 올리고, 이를 팬들에게 직접 배포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마이스페이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투자’ 기능이 덧붙었다는 점이 차이다. 가수는 이 곳에서 팬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음반을 내고, 팬들은 CD를 무료로 받고 음반 판매에 따른 수익도 나눠갖는다.

05_sellaband

마이풋볼클럽(MyFootballClub)

축구 팬클럽끼리 모여 2007년 만든 웹사이트. 회원들이 기금을 모으고 투표를 거쳐 2008년 엡스플리트 유나이티드 FC(Ebbsfleet United FC)란 축구클럽을 실제로 사들였다. 회원들은 클럽 내 결정이나 선수 영입 등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티켓 판매나 축구용품 공급 등 비즈니스 활동에도 관여하며, 심지어 경기 전술도 투표로 결정하기도 한다. 현재 유럽지역을 중심으로 3만명이 넘는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회원당 연간 35파운드(약 7만2천원)씩 회비를 낸다. <EA스포츠>같은 비디오 게임에도 투자하고 있다.

06_myfootballclub

어 스웜 오브 에인절스(A Swarm of Angels)

영화제작자와 작가들이 모여 만든 오픈소스 영화제작 프로젝트. 100만파운드(약 20억원) 기금을 모아 영화를 제작한 뒤 CCL을 붙여 전세계 100만명에게 온라인으로 무료로 내려받도록 제공하는 것이 프로젝트가 내건 목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참가자들을 뽑은 다음 각본 선정 및 제작, 트레일러 촬영, 본영화 제작과 후처리작업, 영화 배포까지 공동 작업한다. 이 ‘한 무리 엔젤들’은 ‘더 나인 오더스‘란 온라인 포럼과 위키를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작업을 진척시킨다. 심지어 각본 2편도 각각 위키를 만들어 참가자들이 함께 다듬고 고친다. 작업에 참가하는 정회원은 25파운드(약 5만2천원)씩 내고, 글 작성권과 투표권이 없는 준회원은 5파운드(약 1만300원)를 낸다. 회원간 동의가 없을 경우 초기 각본 작업부터 일정이 늘어질 위험도 있다.

07_aswormofangels

미드포인트 & 트랜스퍼(Midpoint & Transfer)

온라인 국제송금·환전 서비스. 이용자 한 명당 최대 25만파운드(약 5억2천만원)까지 환전을 요청할 수 있다. 일단 환전 요청이 들어오면 그에 맞는 환전 요청자들을 자동으로 매칭해 연결해준다. 환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겐 똑같은 환전수수료가 적용된다. 거래가 끝나면 환전 금액이 각 이용자가 속한 지역 은행 계좌에 입금된다. 대개 은행은 매매기준율을 중심으로 1.5~2% 범위에서 환전수수료를 챙기는 반면, 미드포인트는 환전 금액이 얼마이든 한번 거래할 때마다 30파운드(약 6만2천원)의 수수료를 일괄 부과하는 게 차이점이다. 환전 당사자끼리 금액이나 대상 화폐 등이 일치하지 않으면 환전이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환전 거래가 기대만큼 발생하지 않으면 서비스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위험이 있다.

08_midpoint

P2P 대출 서비스의 경우 이율이 시중은행보다 낮은 건 아니다. 대개 20% 안팎에서 높게는 30%를 웃돌기도 한다. 30%라고 하면 이른바 ‘사채’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저개발국가나 개발도상국 저소득층 가운데는 아예 금융기관 문턱조차 들어설 수 없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단돈 50달러만 있으면 경제적 자립을 꿈꿀 수 있음에도 이를 빌리지 못해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거나 고리대금의 살인금리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P2P 금융은 이같은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온라인 금융 ‘제도’다. 자발적으로 나선 전세계 투자자들이 이들에게 살인금리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에 소액을 빌려주고, 나름 이윤도 챙기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금융 서비스는 공익을 추구하는 온라인 금융활동이란 측면 외에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조명받고 있다. 이들 서비스는 개인간 직접 거래를 중매해주기도 하고, 어떤 곳은 경매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예컨대 돈이 필요한 사람이 희망 금액을 올리면고→관심 있는 투자자가 대출 이율을 제시하고→대출희망자는 이 가운데 가장 낮은 이율을 제시한 투자자에게 돈을 빌리는 식이다. 연평균 투자수익률은 대략 5~10% 정도다.

투자자끼리 경쟁을 유도하면 이율을 자연스레 낮추는 효과가 있지만, 평균 이율이 제도권 금융기관보다는 높기 때문에 투자자로선 꺼릴 이유가 없다. ‘쿠버라 머니’처럼 우리나라 ‘계’와 비슷한 모델을 온라인에 적용하거나 개인끼리 환율을 직접 협의해 환전하는 서비스를 도입하는 식의 실험을 하는 곳도 등장했다.

물론 위험도 존재한다. 좋은 뜻으로 낯선 이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까진 좋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면 고스란히 투자자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P2P 대출중개 사이트들은 원칙적으로 추심에 대한 보증을 서지 않는다. 그 대신 이들이 받는 중개수수료는 평균 0.2% 미만이다. 독일지역 서비스인 ‘스마바‘는 최근 추심 보증제도를 도입한 대신 중개수수료를 높였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내건 온라인 P2P 대출 서비스가 2년여 전부터 등장했다. 머니옥션, 원클릭 등이 그렇다. 이들은 금융기관 대출 서비스를 받지 못한 신용불량자나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과,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려는 개인 투자자들을 중매해준다. 예컨대 일주일동안 300만원을 급히 써야 하는데 신용불량자라 은행은 이용할 수 없고, 사금융을 이용하자니 38%가 넘는 고금리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치자. P2P 대출 서비스는 이같은 사람들이 사금융보다 싼 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제도권 은행을 거치지 않은 직거래 방식이라고는 하나, 이들 P2P 금융 서비스는 십중팔구 시중은행보다 금리가 훨씬 높다. 자격요건이 된다면 제도권 은행 서비스를 빌리는 게 백번 낫다는 얘기다. 요컨대, 애당초 은행 문턱조차 들어설 수 없고 사채를 쓰자니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P2P 금융은 사채보다 싼 값에 직접 돈을 빌릴 수 있는 틈새 서비스로서 가치를 지닌다.

글로벌 네트워크란 특성상 지역별 금융관계법과 충돌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 나라마다 금융법이 다른데다, 이같은 온라인 직거래 방식에 대한 규정조차 없는 곳도 적잖다. 서비스가 활성화될 수록 이같은 제도적 장치 마련 요구도 커질 전망이다.

P2P 금융 서비스는 지구촌 필요한 곳에 여윳돈을 배치함으로써 국경을 허문 사회적 금융 지원망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아직 결과는 어찌될 지 모른다. e세계는 지금 집단금융 실험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