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위헌과 디지털 산업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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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2일 오후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너무 떨려요. 내일 실명제 합헌 결정나면 어쩌나… 걱정걱정… 설마설마하고 있어요”. 그 순간 지난 2010년 5월 15일에 있었던 인터넷 주인찾기 첫 번째 컨퍼런스의 기억이 스쳐갔다. 그날 펄님으로부터 받은 온라인 실존에 따뜻한 질문들은 지난 2년간 내 삶을 이끌어온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되었다.

진보넷, 미디어오늘, 블로터닷넷, 인터넷 주인찾기, 그리고 수 많은 활동가와 인터넷 사용자들이 실명제 폐지를 위한 기나긴 여정을 함께하며 연대의 애뜻한 끈을 이어 왔다. 23일 보수적인 헌법재판관의 닫힌 마음과 눈을 열게한 것은 연대의 손을 잡은 이들 모두가 노력한 결과물이다. 앞으로 남은 ‘선거법상 실명제’, ‘게임 실명제’ 등 실명제 관련 법의 폐기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 결과를 낙관해본다.

사회혁신 없는 산업혁신은 불가능

이번 실명제 폐지운동에서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특징 중 하나는 네이버, 다음 등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가 사회운동 세력과 함께 했다는 점이다. 실명제가 국내기업에게 오히려 역차별이 되었던 점,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보호에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들 인터넷 기업이 실명제에 반대 입장을 펴온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이 다양한 형태로 블로거, 시민단체, 변호사와 함께 직간접적으로 실명제 반대운동, 저작권법 개정 운동, 망 중립성 옹호 운동 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환경이 크게볼 때 IT 기업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파리, 아비뇽 등 어두운 도시 골목길에서 시작돼 교양과 질서를 앞세운 앙시앵레짐의 억압을 무너뜨린 인류사의 위대한 성과에도 당시 신흥 유산계급이 함께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Citoyen)이라 부르며 출신과 지위와 무관하게 정신세계를 공개적으로 떠들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한다. 이 표현의 자유는 19세기와 20세기 유럽과 북미대륙의 사회 혁신과 산업 혁신을 이끌어온 동력이요, 심장이었다. 표현의 자유와 혁신의 깊은 상관 관계는 디지털 사회로 전환하는 시점에 놓인 우리 사회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교훈이다.

낡은 아날로그 저작권법의 디지털화 절실

디지털 표현의 자유와 디지털 혁신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아날로그 법은 실명제 외에 또 있다. 지적재산권 관련 법이다. 삼성과 애플의 지리하고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이 들고 있는 특허권 침해 관련 법적 공방은 혁신을 멍들게 하고 있다. 지난 1996년 스티브 잡스 스스로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우리는 위대한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We have always been shameless about stealing great ideas)(출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번 특허 논쟁은 애플과 삼성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두 기업이 거대한 재정적 여유에서 대형 공장처럼 생산해 내는 각종 특허가 신생 기업과 학자들의 실험 정신과 연구 열정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지상파 등 방송의 도움없이 전 세계에서 이렇게 빠르게 확산된 배경에는 공정이용(fair use)에 기초한 다양한 패러디 창작물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에서는 멜론이나 벅스 등에서 30초 미리듣기에 만족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유튜브를 통해 새로운 곡을 접하고 다양한 리믹스로 디지털 삶을 만끽하고 있다. 창의적 사고를 제도적으로 막고 있는 사회에서 창의성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쌍둥이: 나르시시즘과 로비이즘

일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위해 디지털 사용자 전체를 감시하고, 일부 정치집단을 위해 게시판과 트위터 및 페이스북을 통제하려는 시도들은 다른 이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결코 존중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시대를 풍비했던 경제인과 정치인들은 ‘어제’에 집착하는 것이 정치와 경제의 덕목인 양 주장하고, ‘해봐서 아는데’라며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각종 로비스트와 일부 언론의 도움을 받아 말뿐인 국민을 위한 숭고한 희생을 하고 있다. 원래 나르시시즘과 로비이즘은 쌍둥이요,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디지털 사회로의 성공적인 전환은 새로운 시민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시민은 인터넷에서도 자유, 민주주의, 권리의 가치를 자신의 심장 속에 담아둔 사람이다. 결코 과거에 대한 자아도취에 빠진 자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