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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 대기업이 40억 떠넘겼는데…”

| 2012.09.19

대기업이 시장에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협력업체나 판매대행업체에 불합리한 판매를 강요하는 일, 업계에선 이를 이른바 ‘밀어내기’라고 부른다. 이 행태가 IT 업계에서는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는 모양이다. 현 정권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을 강조하면서 소프트웨어 분야는 제외했던 것일까.

최근 한 중소기업이 10년간 이어진 밀어내기 횡포를 참다못해 해당 회사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신고를 당한 업체는 IBM이다. 30억원에 이르는 빚과 금융권의 자금 압박이 신고를 결심하게 한 계기가 됐다. 어렵게 신고를 결정한 이승도 KSTEC 대표는 “나를 믿고 따라준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문제 기업을 신고하는 게 바르다고 생각했다”라며 “하루빨리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이 40억 넘는 빚 떠안기까지

IBM을 신고한 KSTEC은 2005년 중소기업청으로부터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으로 선정될 만큼 탄탄히 성장해 온 회사다. 포스코에서 분리된 1998년부터 아이로그 소프트웨어 국내 공급과 판매 서비스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국내 유일한 아이로그 총판업체인 셈이다.

아이로그 소프트웨어는 기업용 소프트웨어로 생산공정관리를 최적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솔루션이다. 공장 내 생산과 기획의 핵심이 되는 소프트웨어로 보면 된다. 제철소를 비롯한 공장 자동화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필요로 하는 서비스이기에 KSTEC은 안심하고 사업을 진행했다. 수요가 탄탄한 만큼 걱정할 게 없었다. 장밋빛 미래만 가득할 것 같은 KSTEC 사업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건 2005년부터다.

“사업 시작 후, 아이로그 아태지역 담당자인 후정통(Mr.Foo)이 분기마다 우리 회사를 찾아 KSTEC 전체 영업상황을 검토하고 실적을 관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정 목표수량의 구매를 강요하더군요. 자신이 아시아 지역 전체 영업실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만큼, 우리보고 계약이 완료되지 않은, 진행 중인 계약에 대해서도 먼저 제품을 사라고 독려했습니다.”

KSTEC의 아이로그 소프트웨어 주문 계약은 크게 4단계로 이뤄진다. KSTEC이 고객과 계약을 맺으며, KSTEC은 아이로그 아시아 지역본부에 주문서를 보낸다. 아이로그는 주문서를 바탕으로 아이로그 소프트웨어를 KSTEC으로 보낸다. KSTEC은 고객에게 제품을 전달하고, 고객은 KSTEC에게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키 발급을 요청한다. 아이로그 아시아 지역본부는 제품 대금 결제가 이뤄졌는지 확인한 뒤, 고객에게 라이선스키를 발급한다. KSTEC은 90일 이내에 아이로그에 제품 대금 납부를 마쳐야 한다.

겉보기엔 전혀 문제없는 절차다. 정상적으로 고객과 계약을 완료한 뒤 제품을 주문하고, 받은 제품에 대해 고객이 대금을 치른 다음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키를 발급받았다면 말이다.

“진행 중이던 계약이 완료되면 제품을 미리 주문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행 중이던 계약이 완료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땐, 제품 재고를 저희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합니다. 재고 물품을 쉽게 팔 수도 없었습니다. 빚을 내 대금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로그가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키를 발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해, 두 해……. 밀어내기 식으로 떠안은 제품은 가랑비에 옷 젖듯 회사 창고에 쌓여갔다. 동시에 빚도 늘어만 갔다. 2008년 KSTEC이 밀어내기로 인해 떠안은 채무는 2848만820달러 49센트, 원화로 환산하면 30여억원에 이른다. 답답해진 이승도 대표는 후정통을 찾았다. 아태지역 담당자가 밀어내기를 권유한 만큼 이에 대한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후정통의 반응은 차가웠다.

“자신의 인센티브만 생각한 거죠. 보통 판매담당자들이 분기 할당량을 지키면 이에 따른 보상금이 나옵니다. 후정통은 자신의 보상금을 위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한 뒤 모른척 했습니다. 오히려 어떨 때는 호주 지역 판매가 신통치 않다고 한국 KSTEC의 추가 주문을 요청한 적도 있습니다. 호주와 싱가포르는 직영판매점이라 밀어내기를 할 수 없지만, 우리는 판매대행이니 부담을 떠안으라면서 말이죠.”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승도 대표도 밀어내기를 감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KSTEC은 자사 비즈니스의 95%를 아이로그에 의존하고 있다. 밀어내기를 받아들이지 않아 아이로그 본사가 제품 공급을 중단할 경우, 회사는 더 큰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회사 사정을 얘기하며 후정통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더는 버틸 수 없다면서 말이지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후정통은 조금만 참으라며 밀어내기 계약을 계속 권유했습니다.”

2008년 아이로그가 IBM에 인수된다는 발표가 나왔다. 통상 인수합병이 발생하면, 인수당하는 업체와 총판 계약을 맺었던 업체 간 계약이 무효가 된다. 그 후 인수한 기업과 다시 계약이 이뤄진다.  KSTEC으로선 자칫 잘못하면 아이로그와 맺은 계약이 무용지물되면서 재고 물품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이승도 대표는 즉시 후정통을 찾아 KSTEC이 안고 있는 밀어내기 제품, 재고 물품에 대해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도 후정통은 아이로그가 IBM에 인수된 뒤, IBM 소속 직원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근무를 하더군요. 그동안 KSTEC이 떠안았던 아이로그 제품에 대해 환급 또는 재판매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묵묵부답이더군요. 그 결과 2009년 1월부터 6월까지 또다시 약 84만 2442달러 71센트, 원화 8억5천만원에 이르는 추가 재고 금액이 발생했습니다. 2009년 7월 한국IBM이 가격 구조를 원화로 바꾼 뒤인 2009년 12월 말까지는 5억3541만4134원을 추가로 떠넘기더군요.”

더욱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로그에 이어 한국IBM도 KSTEC에 밀어내기를 요청한 것이다. 지금까지 KSTEC이 순수하게 떠안은 밀어내기 비용만 해도 43억8541만4134원에 이른다.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 빌린 대출 대금과 그 이자까지 합치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연 매출 3~4억원을 기록하며 견실한 매출을 쌓아왔던 중소기업이 밀어내기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셈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 2010년, 한국IBM이 재고 물량에 대한 미지급 잔액 분에 대한 ‘지급합의서’를 쓰게 하면서, 불이행 시 IBM과의 거래를 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아이로그 소프트웨어만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IBM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KSTEC 같은 업체, 국내 너무 많다

이는 한국IBM과 KSTEC 간에만 벌어진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국내 시장에선 대형 소프트웨어업체와 국내 판매대행점 간 밀어내기 관행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에서의 입지 차이 때문에 다수 판매대행업체가 울며 겨자 먹기로 밀어내기를 감내하고 있다. 또 다른 국내 총판업체는 KSTEC 대표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용감하다’고 평가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후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섣불리 신고하지 못하겠습니다.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해도 좋습니다. 직원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상황은 국내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출장길에 만났던 한 소프트웨어 판매대행업체 대표는 “밀어내기는 국내에 있는 외국계 업체들에서만 일어나는 전형적인 횡포”라고 말했다. 외국계 기업들의 윤리 강령은 생각외로 철저하므로, 국외에서 국내와 같은 ‘밀어내기’ 영업을 하다가는 해고 또는 거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 휘말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름만 존재하는 윤리강령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제가 지금은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지사를 옮겼습니다. 영업은 한국에서도 하지만, 모든 거래는 싱가포르에서 이뤄지는 식이지요.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대기업의 횡포도 밀어내기도 없습니다. 접대가 없다면 완전 거짓말이겠지만, 한국처럼 심하지는 않습니다.”

이승도 대표도 후정통이 싱가포르와 호주에선 밀어내기를 못하니 국내 판매대행업체에 밀어내기를 떠넘겼다고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왜 국내 시장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판매할 순 없을까.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외국계 소프트웨어 판매대행 관계자의 말이 떠오른다.

“다단계와 같은 거지요.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빠져들면 잘못된 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하는 식입니다. 이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면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이 나서서 칼을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계 기업의 문제는 아닙니다. 국내 모든 기업이 이렇게 일을 합니다.”

현재 KSTEC은 지난 5월 IBM을 공정거래위원회에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한 건”으로 신고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사건을 접수해 조사하고 있다.

 

▲사진 : http://www.flickr.com/photos/29367605@N02/4716539083.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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