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강국, 대한민국의 비극

무엇이 IT 강국인가. 다른 국가에 조금만 나가봐도 한국의 IT 인프라가 세계적 수준인 것을 알 수 있다. 브로드밴드 강국이었고, 모바일도 한 발 늦었지만, 이제 한 발 앞서 나가고 있다. 2010년, 한국은 전세계에서 85번째로 아이폰을 들여왔다. 아이폰 쇼크 이후 온나라에 모바일, 소셜 열풍이 불었다. 삼성은 대표적인 안드로이드폰을 생산하는 기업이 됐다. 카카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 기업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이제 IT 강국인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고 앞으로도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민의 온라인 표현의 자유 보장, 프라이버시 보호와 같은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으면 결코 IT 강국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인프라가 있어도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근하고 자유롭게 인터넷을 활용할 수 없는 한 IT 강국이 아니다. IT 산업 육성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술적 인프라만 삽질해서 열심히 깔아놓는다고 전세계가 진심으로 우러러 볼 IT 강국이 되나. 시민의, 이용자의 권리가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이 무관한 것도 아니다. 표현의 자유와 혁신의 자유는 한 몸이다. 상식적으로도 그렇다. 새로운 것을 말하기도 힘든데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학술적 증거도 있다. MIT 경제학과의 대런 에이스모글루 교수와 하버드 정치학과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그들의 역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에서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는 상호 의존적이라고 주장했다. 더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국가는 더 유연하게 기술 혁신에 대처할 수 있다. 기술 혁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국가는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도 포용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로, 영국은 대항해시대는 뒤처졌다. 중앙집권화를 일찍이 이루어 군대를 조직해 남아메리카 등지에 파병했던 남유럽 국가와 영국은 정치적 환경이 달랐다.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의 영향으로 귀족은 왕권을 제한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다원적 정치적 환경이 영국을 산업 혁명의 선도 국가로 만들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 국가들의 대륙간 무역으로 쌓은 부는 기득권층에 집중 분배됐다. 하지만 영국에 들어간 무역을 통한 이득은 중산층(젠트리)을 키웠다. 이 중산층이 명예혁명을 일으켰고, 그들이 산업 혁명을 주도했다.

교훈은 분명하다. 한국 IT도 마찬가지다. 기술적 인프라뿐만 아니라 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 제도적 인프라의 구축 원칙은 첫째, 이용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용자의 권리가 실제적으로 존중될 수 있는 의사 결정 구조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인프라 하에서 이용자들이 기업가로, 시민운동가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그때 IT 강국론이 설득력이 있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IT만 강해지는 게 아니라 시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자유가 향상되는 길이다. 시민이 누리는 것이 더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고대하던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비전이 이뤄지지 못했을 때는 단순히 꿈만 저무는 것이 아니다. 절망이 온다. 권리 중심의 제도적 인프라가 취약할 때, 시민사회가 백신으로서 작용하지 못하는 한 인터넷은 점점 더 권력화, 상업화될 가능성이 더 크다. 힘 없고 돈 없는 사람에겐 더 무력한 현실이 된다. 인터넷 공유지가 사유지, 국유지가 될 경우 경제사회적 약자일 수록 소외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 주변 아시아 국가에 비해 10년은 빨리 인터넷을 도입한 만큼, 인터넷 변화 속도가 빠른 만큼, 그 위기는 더 성큼 다가온다.

징조가 벌써 보이고 있다. 지난 12월14일 두바이에서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 3차 회의가 열렸다. 1988년에 처음 제정된 국제통신규칙을 개정하기 위해 각국 대표들이 모였다. 전세계 144개국 중 89개 국가와 함께 한국은 인터넷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큰 새로운 국제통신규칙(ITR)에 찬성했다. 국제조약 하나 가입한 것 가지고 엄살떠는 게 아니냐고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당 결정문의 5조 B항(Article 5B)에는 회원국의 스팸(unsolicited bulk electronic communications)을 차단하고 국제 전기 통신 서비스에 스팸이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검열을 허용했다. 7조(Article 7)에서는 사무총장에게 신고를 해야 하긴 하지만 국가가 인터넷을 차단할 권리를 인정한 점이 문제가 된다. 즉, 해당 결정문은 인터넷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는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이 사회 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에 위해 가능성이 크다. 국제적으로 봤을 때 인권 차원에서 국내적으로 봤을 때 민주국가의 헌법 차원에서 문제다. 이것이 해당 조약 가입을 방송통신위가 발표한 것처럼 대세에 따른 것으로 취급할 수 없는 이유다.

실제로 이번 국제통신규칙에 찬성한 나라와 찬성하지 않은 나라를 구분한 위 지도를 보면 한국 정부의 인터넷 자유, 이용자 권리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느 나라와 비슷한 지도 쉽게 알 수 있다. 찬성 국가 대부분은 중국,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다. 물론 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 표가 갈렸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얼핏 보기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르다. 그 같은 시각은 왜 중국과 인도가 같은 개발도상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찬성하고 인도는 반대했는 지 설명 못 한다.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프레임에서 보면 그 차이가 설명이 가능하다.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실험하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국가라면 원칙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달리 말하면 이번 국제통신규칙 개정안 찬성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은 간접적으로 자유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인터넷 규제를 택했다.

나아가 권리 중심 제도적 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한국 정부가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우리 시민사회가 적극적 역할을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12년 9월 27일에서 10월 11일까지 국제전기통신회의의 주요 아젠다에 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견 개진에 불과했다.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국제전기통신회의 자체의 문제가 있기도 하다. 인터넷은 모두의 것임에도 해당 회의는 국가 중심의 의사 결정 체제다. 많은 내용이 불투명하게 처리됐다. 하지만 서방 국가와 달리 우리는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불만을 표기한 적도 없다. 그동안 한국은 대개 인터넷 정책, ICT 정책을 산업 중심 관점에서 접근하고 판단했다. 정부 주도로 의사 결정을 내렸다. 정보 공개가 정부 책임성, 투명성의 영역임을 제대로 고려해본 바 없다. 지난 망 중립성 관련 의사결정에서도 망중립성 이용자 포럼을 비롯한 국내 시민 사회의 주요 불만은 정부 투명성의 빈곤이었다. 그러니 국제전기통신회의의 폐쇄성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할 이유도, 개정안에 반대할 인센티브도 약했다. 언제나 해왔던 식과 크게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어제와 같아서는 안 된다. 지난 15일 열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10주년 행사에서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 일본 게이오대 교수는 “인터넷은 2040년, 50년께나 돼야 고정된 성격을 갖게 되며 지금은 발전의 초기 단계에 와 있다”라고 주장했다. 인터넷의 성격은 아직 결정돼 있지 않다. 아직 기회가 있다. 정부, 기업, 시민사회의 이해관계가 국내적, 국제적으로 어떻게 조율되는지에 따라 인터넷의 성격이 바뀐다. 사회의 인터넷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의존도가 나날이 높아지는 만큼, 인터넷의 성격은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상업화된 인터넷은 사회의 경제적 격차를 더 크게 만든다. 권력화된 인터넷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어떻게 이익, 권력뿐 아니라 권리가 기초가 된 인터넷을 만들 수 있을지, 미래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고민과 공론화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용자와 시민을 대변할 미국의 EFF(전기혁신재단), CDT(민주주의와 기술 센터)와 같은 시민단체의 등장이 요구되는 배경이다. 인터넷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한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인터넷 정책의 의사 결정에 대한 참여를 통한 지식 경제 한국의 성장의 과정이 긴요하다. 열린 인터넷 없이는 열린 사회도 없다. 반대로 열린 사회 없이는 열린 인터넷도 없다.

기술이라 쓰고 인간이라 읽는 정치학도. 네이버 서비스 자문위원을 맡은 적 있고, 스타트업에서 매니저로 일한 바 있다. 블로터닷넷과 주간경향 등에 IT 칼럼을 기고하고, 쓴 책으로는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 '소셜 웹 혁명','소셜 웹이다'가, 번역한 책으로는 '열린 정부 만들기' 등이 있다. 쓴 글에 대해 더 깊은 논의를 원하시는 분은 visiondesigner21@gmail.com 으로 저자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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