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人] 오진연 “개발자라고 다 금성 출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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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제 코딩하지 않습니다.”

‘개발人’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각 회사에 개발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오진연 지란지교 컨버전스 사업부 부장은 “이제는 개발하지 않는다”라며 “나는 인터뷰 대상이 아니다”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럴 리 없다. 오진연 부장은 지란지교 회사 창립 때부터 함께한 개발자로, 국내 최초 윈도우용 통신프로그램 ‘잠들지않는시간’ 개발에 참여했다. 학교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업무용 메신저 프로그램 ‘쿨메신저’는 그가 직접 개발한 솔루션이다. 그런 그가 인터뷰 당일 스스로 개발자임을 부정하고 나섰다.

“영화 메트릭스를 보면 주인공이 세상을 0과 1의 연속인 이진수로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허풍 조금 보태면, 제가 예전에 그랬습니다. 코딩 하다 소스를 날려도 몇만 라인을 다시 기억할 정도였고, 프로그램을 마주하면 어떻게 설계됐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죠. 지금은 아닙니다.”

개발자는 어찌보면 컴퓨터와 사람이 서로 대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번역가다. 사람이 말하는 걸 컴퓨터가 알아듣지 못하니, 이를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 아닌가. 오진연 부장은 배경이 이진수로 보이지 않는 등 자신이 완벽하게 일반 PC사용자가 됐다며 개발자로서의 자신을 부정했다. 더는 ‘번역’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상하게 들리지요? 이게 개발자들의 생각 구조입니다. 전, 이제 후배 개발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개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건 겨우 나모 웹에디터 내에서 HTML을 다루는 정도일 뿐일 걸요. 프로세싱 읽는 건 엄두도 안 납니다.”

아침도 코딩, 점심도 코딩, 저녁에도 코딩, 새벽에도 코딩…. 열혈 개발 인생을 살았던 그다. 가벼운 마음으로 ‘개발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린 없다. 아무래도 2002년, 회사가 위험해지면서 구조조정까지 간 상황을 겪었던 게 계기가 된 눈치다. 오진연 부장은 “이때 개발하지 않으면서도 개발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다음 달 월급이 없는데, 개발만 고수할 텐가”

지란지교는 1994년 국내 최초의 윈도우용 통신프로그램 ‘잠들지않는시간’으로 창업한 이래 ‘스팸스나이퍼’, ‘파일세이프’, ‘쿨메신저’, ‘인트라쿨’ 등을 잇따라 개발한 국내 순수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 중 한 곳이다. 벤처 붐이 불 당시 오치영 대표가 세계 100대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겠다며 시작한 회사이기도 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고 IT 거품이 일었다 꺼지기 전만 해도 지란지교는 매우 잘 나가는 회사 중 하나였다. 10명도 안되는 인원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3년을 넘기기도 전에 30명, 100명, 150명 등 기하급수적으로 인원을 불려 나갔다. 대전에 사옥도 짓고, 땅값 비싼 서울 강남지역에 지사를 두 군데나 세우면서 승승장구했다. 오진연 부장이 “주식만 팔았어도 지금 엄청난 갑부가 됐을 시절”이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언론에서 주목해야 할 기업으로 꼽으면서 이른바 복부인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내부에서 회사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는 쉽지 않더군요. 특히 엔지니어로서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요.”

주위의 추켜세움에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이 좋은데, 제대로 개발하면 정말 떼돈 벌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사내에 팽배했을 무렵이었다. 지란지교는 2002년 갑자기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수많은 인원이 순식간에 해고됐다. 오진연 부장은 ‘나 때문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한순간이었지요. 회사가 무너지는 건. 어느 날 대표가 주요 간부들을 모으더니 ‘다음 달 월급이 없다’라고 폭탄선언을 하더군요. 전혀 짐작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열심히 개발해서 제품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사람들도 많이 구매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사람과 함께 수많은 사업이 정리됐다. 사옥 매각도 이뤄지고, 사무실도 눈에 잘 안 띄는 서울 구석으로 이사 갔다. 회사는 어려워졌고, 개발자이면서 영업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진연 부장은 다소 외향적인 성격이라 영업을 나간다는 행동 자체에는 반발이 없었다. 다만 ‘내가 열심히 만들었는데, 왜 회사는 돈을 벌지 못했는가’하는 억울함은 감출 수 없었다. 이는 ‘영업을 열심히 해서 영업 담당자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다’라는 오기로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지요. 개발만큼 영업도 힘들어요. 제가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개발자는 예술가, 분야를 한정짓지 말라”

‘살아야겠다’라는 절박함에 나간 영업현장에서 오진연 부장은 새로운 걸 배웠다.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모든 사람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영업사원들이 괜히 서류 가방 들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개발자는 제품을 만들 때 사람들이 이를 얼마나 필요로 할 것이며, 이 제품이 있으면 사람들이 정말 편리해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지요. 영업에서는 다릅니다. 제품이 있어야 하는 고객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행운입니다.”

처음 나간 영업에서 오진연 부장은 고객들에게 개발자의 언어로 열심히 얘기해봤자 효과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객 수준에 맞는 언어로 설명해야 했으며, 기능 중심의 설명보다는 이 제품이 쓰이면 뭐가 좋은지에 초점을 둔 설명이 통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일로 개발자로서 그동안 잘못 생각한 게 뭐였는지 알게 됐습니다. 단순히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개발 끝!’이 아니더군요. 제품이 판매되고, 사용하는 고객이 불편함 없이 제품에 만족하는 일 모두가 개발자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개발자 행사를 참관하면 영업 담당자와 기획자, 개발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화성에서 온 ◯◯, 금성에서 온 개발자’라는 표현에 빗대며, 서로 생각하는 과정이 달라 같이 일하기 어렵다고 표현한다. 개발자면서 영업 현장에 뛰어든 사람으로서 오진연 부장은 ‘개발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한정짓지 말라’고 충고한다. 양쪽 다 해보니 크게 생각이 다르지 않더라는 얘기다.

“개발자들이 흔히 얘기하지요. 치킨집 사장이 되겠다고. 농담이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진지하게 접근해볼까요? 치킨만 만들면 뭐해요. 잘 팔아야지요. 개발만 하고 팔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치킨집 사장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영업을 해보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진연 부장은 세상엔 다양한 성격과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개발자 중에도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사교적인 사람도 있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등 다양한 개발자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말은 영업도 하고, 관리자도 될 수 있는 개발자들도 있단 얘기다. 그가 자신을 ‘개발자가 아니다’라고 빗댄 이유가 여기 있었다.

“개발자들이 너무 ‘개발’이라는 말에 취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역량을 낮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개발자라고 해서 무조건 ‘개발’에만 소질 있다고 생각하는 건 금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