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TV, 짧은 만남 긴 이별

마침내 결심했다. 5년 남짓한 ‘호갱’ 생활을 드디어 청산하기로.

“부가세 포함해야 월 2만2천원에 불과합니다, 고객님.” 수화기 너머 울리는 상냥한 상담원 목소리에 덜컥 계약한 게 2007년이었다. 집에서 보는 케이블TV는 방송 채널은 많았지만 정작 즐겨보는 채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인터넷. 속도가 무려 10Mbps라니. 이름마저 삐까번쩍한 ‘광랜’이 아스팔트 껌딱지마냥 흔한 국내 환경에선 느려도 이런 거북이가 또 없었다. 그래도 5년 가까이 꿈쩍 않고 버텼다니,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호갱 청산의 첫 걸음은 그 흔하다는 ‘뽐뿌질’이었다. 이참에 나도 ‘스마트’한 TV 세상으로 들어서는 거야. 꼭 맞는 상품도 금세 찾았다. 요금도 적당하고, 인터넷 속도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말로만 듣던 ‘구글TV’를 셋톱박스로 쓴다는 점도 적잖이 끌렸다. 무엇보다 ‘사은품’이란 게, 흐흐흐….

신청한 다음날 꼭두새벽부터 설치기사가 전화했을 때만 해도 내 홈 미디어 라이프는 마냥 무지갯빛이었다. ‘이제 나도 광랜 물결을 타고 구글TV의 거대한 바다로 풍덩 빠지는 거야.’ 설치를 마친 기사가 나긋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사용법을 설명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얼른 가세요. 제가 직접 만져보고 싶거든요.

오,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좀 이상한 걸. 리모컨을 들어 이것저것 만지다보니 이상 징후가 감지됐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초반부 음성이 조금씩 뚝뚝 끊어져 들리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않게 여겼다. 흔히 말하는 ‘랙’이 걸리는 것이려니. 헌데 일시적 장애가 아니었나보다. 채널을 돌릴 때면 어김없이 초반 10초 가량은 소리가 마른 냉면발처럼 뚝뚝 끊어졌다. 신경을 곤두세우다보니 더욱 귀에 거슬렸다. 처음엔 장난감 딱총소리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렸는데, 하루이틀 지나며 사정이 달라졌다. 이건 숫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노르망디 상륙작전 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오, 이건 아니잖아.

설치 일주일째, 전화기를 들었다. 마침 휴일인지라 다른 상담은 중단된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고장 신고 접수는 받고 있었다. “제가 일주일 전 블라블라를 설치했는데요. 이상하게 블라블라… 딱총… 블라블라… 레알 전쟁터… 블라블라… 얼른 구출 요망 SOS 블라블라….”

처음 돌아온 답변은 ‘신호 문제일 지 모르니, 신호를 바꿔보겠다’였다. 수화기 목소리가 시키는대로 셋톱박스 전원과 무선공유기 전원을 차례로 끄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연결해 보았다. 그래, 이걸로 해결될 리가 없지. “안 되겠네요, 고객님. 곧 기사가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나 싶어, 처음 설치를 도와준 기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기사님은 내 장황한 설명을 듣자마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되받았다. “아, 그거요. 간단해요 고객님. 일부 TV에서 발생하는 셋톱박스 호환성 문제인데요. 셋톱박스 메뉴에서 ‘설정’으로 들어가 화면 해상도를 ‘자동(1080p)’로 돼 있는 걸 ‘1080i’로 바꾸고 재부팅해보세요. 그래도 안 되면 고객센터로 전화해보시고요. 그런데요, 고객님. 100% 될 겁니다, 하하.” 설치기사님 목소리가 술자리 흑기사보다 더 반갑고 고마웠다.

흑기사는 견각(犬角)! 내 TV는 여전히 기관총 소리를 주기적으로 토해냈고 내 머릿속도 점점 초토화돼 갔다. 무차별 대공포화에 정신이 폐허가 될 무렵, 전화로 신청했던 기사님이 도착했다. 그 기사님은 이 증상에 대체로 익숙한 듯, 능숙하게 몇 가지 준비물을 꺼냈다. 가장 먼저 꺼낸 솔루션은 HDMI 케이블이었다. (L사에서 제공하는 구글TV 셋톱박스는 HDMI 케이블로만 연결된다. DVI나 일반 AV케이블 단자는 없다.)

“고객님, HDMI 케이블을 바꿔볼게요. 저희가 설치할 때 드리는 케이블은 도금이 안 돼 있는 싸구려라서 가끔 이런 문제가 생기거든요. 잠깐 저랑 TV 좀 들어주시겠어요?”

벽에 붙어 있던 TV를 낑낑대며 들어 바닥에 내렸다. 기사님이 HDMI 케이블을 교체하는 동안 나는 전쟁포로마냥 TV를 붙들고 꼼짝않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뒤 기사님이 내뱉었다. “어, 안 되는데요.”

집에서 쓰는 다른 HDMI 케이블로 교체했지만 소용 없었다. 기사님은 구글TV 설정 화면을 열어 오디오 설정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상태가 호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 ‘기사니임~, 그거 제가 일주일 동안 안 해봤겠어요?’

기사님이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형! 여기도 오디오 먹는데. 그거 설정 뭐뭐 만져줘야 해요?”(아, 이런 걸 이 사람들은 오디오 먹는다고 표현하는구나!)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몇 가지 해결책이 건너왔지만 썩 미덥진 않았다. “형! 오디오 설정도 돌비로 바꿨는데 안 돼요. 가만 있자, 초기화 메뉴가 어디 있더라…….”

팔다리가 저려왔지만 나는 잠자코 TV를 붙들고 서 있었다. 행여 섣불리 아는 체 했다가 전문가 비위라도 거슬리면 안 되지. 그래도 일주일간의 내 정신적 피해에 대한 항의를 미약하게나마 하고 싶었다. “저기… 셋톱박스를 바꿔보면 어떨까요?”

기사님은 미리 준비해 온 셋톱박스를 주섬주섬 꺼내 다시 HDMI 케이블로 연결했다. 또 다시 셋톱박스 업데이트 화면이 TV에 떴다. 한참을 기다리더니 또 재부팅되고, 또 뭔가를 주섬주섬 내려받고… 나는 팔다리가 저릴 뿐이고….

한참을 셋톱박스와 HDMI 케이블, TV와 씨름하던 기사님이 끝내 백기를 들었다. “고객님, 고객님처럼 구글TV 셋톱박스와 TV가 호환성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이런 경우, 저희가 일반 IPTV용으로 셋톱박스를 교체해드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오늘은 휴일이라 안 되고, 월요일에 상담원과 통화해보세요.”

“그럼 지금 구글TV랑 뭐가 다른가요?” “요금과 TV 채널은 똑같고요. ‘세컨드TV’나 ‘원터치 플레이’ 처럼 앱과 TV를 연동하는 기능만 못 쓰시는 거예요.”

저린 팔다리를 참아가며 한참동안 TV를 들고 서 있던 내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모처럼 품에 안은 구글TV를 이대로 떠나보내긴 싫었다. 혹시 되지 않을까. 새 HDMI 케이블을 구해다 연결해봤지만, 희망은 거기까지였다.

휴일이 지나고, 고객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제가 열흘 전께 블라블라를 설치했는데요. 이상하게 블라블라… 전쟁터… 블라블라… 흑기사 블라블라… 백기 들고 블라블라…해서요. 어떡하면 되죠?”

상담원 답변은 예상대로였다. “(중략) 셋톱박스만 교체하시면 됩니다, 고객님. 저희쪽 셋톱박스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 따로 설치비는 받지 않습니다, 고객님.”

그럼 구글TV는 이대로 내 품을 떠나는 것인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나중에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 다시 구글TV 셋톱박스로 교체할 수 있는 건가요?”

“가능하긴 한데요. 기사님이 방문하게 되므로 출장비 1만1천원은 따로 부담하셔야 해요.”

이 대목에서 궁금해졌다. “그럼, 문제가 해결됐는지는 제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따로 알려주시는 건가요?”

“아… 그건… 고객님… 저희가 세계 최초로 구글TV를 서비스하는 것이고… 또… 셋톱박스 모델도 하나뿐이다 보니… 다른 셋톱박스로 교체해드릴 수도 없고…” 미션 임파서블이란 얘기다.

“……그냥 셋톱박스 교체해 주세요.” oTL

한여름밤의 꿈 같았던 나와 구글TV와의 동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앞으로 저 스마트하지 않은 셋톱박스와 3년은 꼼짝없이 더 보내야 한다. 당분간은 이따금 밥을 주던 다음TV에 계속 순정을 바치는 수밖에.

그 순간, 내 고장 신고 접수를 받고 총알같이 달려왔다가 전리품 없이 돌아서던 기사님과 주고받은 대사가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 : 그럼, 이 문제는 누가 해결해줘야 하는 건가요. 구글이 펌웨어를 업데이트해줘야 하나요, 아님 L사가……?

기사님 : 저희 문제죠, 뭐. 아무래도 저희가 초기 테스트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무튼 고객님, 불편을 끼쳐 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아무런 도움이 못 돼 드렸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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