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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주소 관리, 유엔 손으로?

2013.04.21

세계통신정책포럼(WTPF)이 5월1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다. 주요 안건이 바로 인터넷이다. WTPF은 그동안 전화와 관련한 통신 정책을 맡았는데, 올해는 행사가 열리기 전 주요 안건으로 정보통신기술 즉 인터넷을 상정했다. 국제전화 요금 부과 기준을 만들던 기구에서 만든 포럼이 인터넷까지 챙기는 모습은 낯설다.

망 중립성 이용자 포럼과 한국인터넷정보학회 오픈 인터넷거버넌스 연구회는 ‘WTPF과 시민사회 입장’이라는 주제로 4월1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인터넷 거버넌스 오픈 세미나 제3차

통신 다루던 유엔이 인터넷까지 다뤄도 될까

이영음 한국인터넷거버넌스협의회 주소인프라분과 위원장은 “WTPF이 회의에 앞서 발표한 7개 의제 중 5개가 현재 국제 인터넷 주소자원 관리기관(ICANN)에서 관리되는 기능에 관한 것”이라며 “WTPF에서 인터넷 거버넌스 관련한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명백히 했다”라고 말했다.

WTPF은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1994년 전권회의를 통해 설립됐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은 1980년대 각국 국제전화 국가코드와 전화요금 등을 논의하던 기구이다. 최근 이 기구는 인터넷 산업으로 관심을 넓혔다. 마치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가 문자와 통화, 데이터 외에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국내 3개 이동통신사는 전자책과 음악은 물론 다양한 서비스를 만든다. 물론 인터넷 기업과 비교하면 흥행에 성공하는 편은 아니다.

이 기구는 2012년 12월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를 열고 전화에 이어 인터넷 산업도 관장하려는 시도를 했다. 국제전기통신규칙을 개정하면서 기구가 다루는 영역에 인터넷을 포함하려고 했는데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새 국제전기통신규칙에 인터넷을 다룬다는 얘기는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반 년 뒤 열리는 WTPF은 인터넷 산업을 주요 의제로 다루기로 했다. 국가간 전화 표준, 호환 등을 논의하던 자리에 인터넷을 끼우겠다는 의지이다.

인터넷 주소 자원 관리, 다양한 이해당사자 참여 계속될 수 있나

특히, 인터넷 주소 자원을 안건에 넣은 데에 눈길이 쏠린다. daum.net, naver.com, president.go.kr과 같은 주소를 만드는 것을 논의하겠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전응휘 오픈넷 이사장은 “한국은 +82, 미국은 +1이라는 국가번호를 부여했듯, 인터넷 주소도 그렇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주소 중 ‘.kr’은 한국, ‘.uk’는 영국, ‘jp’는 일본을 나타낸다. 이렇게 국가마다 고유의 주소를 주는 일은 미국의 ICANN이란 단체에서 한다. 전세계 모든 도메인 이름은 이곳을 통해 만들어진다. 가비아나 카페24와 같이 도메인을 파는 곳은 ICANN의 일을 대행하는 곳이다. 이 일을 이미 하는 곳이 있는데도 ITU가 WTPF에서 논의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윤복남 한국인터넷거버넌스협의회 주소인프라분과 위원은 “ICANN이 미국 상무성과 계약해 일을 하므로, 이라크나 중국과 미국이 전쟁이라도 벌이면 차단할 거라고 상상을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며 “미국 주도로 전세계 인터넷 주소 자원을 관리하는 ICANN을 타파하자는 목소리가 있으나 그들의 상상대로 미국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ICANN을 움직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ICANN은 미국 정부의 감독 아래에 있지만, 세계적으로 국가와 인종, 성별, 나이, 직업, 소속 기구 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구조로 운영됐다. 지구촌 모든 IP 주소 할당을 최종 관할할 만큼 막강한데도 별 탈 없이 유지해온 게 이 구조 덕분이리라.

하지만 전세계 인터넷 주소 자원을 민간재단법인 손에 맡겨도 되는 것일까. 게다가 그 법인은 미국에 있지 않는가. 인터넷 접속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한 핀란드에서 보듯 인터넷은 한 나라의 중요한 자원이다. 아니 전세계의 중요한 자원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미국 외 어떤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ICANN에 맡기는 데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 유엔 산하의 ITU가 전화나 팩스를 다루다 인터넷까지 품으려는 까닭이다.

이해당사자 참여 확대, 한국도 배워야

유엔이 과연 인터넷 사회는 물론 인터넷 주소 자원 배분, 정책까지 훌륭하게 수행해 낼까. 지금까지 의사 결정에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이는 구조로 ICANN이 전세계 인터넷 주소 자원을 관리했는데 유엔이 ITU로 그 권한을 가져와 기존 의사 결정 과정을 구현해낼지 의문부터 든다. 유엔은 의사 결정에 정부 대표단을 받아들이지, ‘전 세계 시민이면 누구나 표결에 참여, 혹은 의사를 개진’하는 구조는 아니다. 인터넷의 자유로움을 담기에 딱딱한 곳이다.

김기창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참여해야 한다는 얘기는 인터넷 말고 다른 어떤 전통적인 서비스, 산업에서 별로 들리지 않는다”라며 “인터넷이는 게 한 나라의 매커니즘, 경계를 넘어서 작동하므로 한 국가의 의사결정 체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WTPF는 ICANN이 해온 것처럼 다양한 이해당사자를 품는 이야기가 나올 전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해당사자가 누구인가’를 정하는 일이다. 정부인지, 인터넷망을 제공하는 통신회사인지,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회사인지, 표준 기술을 만드는 협회나 연구소, 개발자인지, 지금 이 글을 화면에 띄우고 글을 읽는 독자와 이용자인지 범위를 정하는 게 애매하다. 만약 각 이해 당사자를 뽑는다면 국회의원 선출하듯 투표를 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논의가 일고 있는데 우리에겐 낯선 얘기다. 국내에서는 인터넷 정책을 만들 때 정부와 일부 기업이 일방적으로 법을 만들고 ‘인증’하는 절차를 두지 않는가. WTPF가 주로 얘기할 ICANN의 일이 국내에선 ‘인터넷 주소 자원법’에 따라 방통위 산하 한국인터넷진흥원이 도맡을 뿐이다. 새 주소를 만들거나 배분하는 데에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규정이나 절차는 없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는 “인터넷 주소 자원법 개정 얘기가 오간다고 아는데, 다양한 이해당사자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을 법에 넣으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다. 지구촌에서는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인터넷 정책 만들기 얘기가 나오는 가운데에 국내도 그 시류에 발맞추자는 뜻이다.

전길남 게이오대 부총장은 “인터넷국제표준화기구에 참여할 때 자기 신분, 국가, 회사 등을 밝히지 않고 이름만 공개하는데 약 40년간 이 원칙으로 운영됐다”라며 “100번째 회의가 열릴 때까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열린 일은 한 번도 없다”라며 다양한 이해당사자를 규정하는 방법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1회와 제2회, 제3회 세미나에서 쓰인 자료와 토론 모습은 망 중립성 이용자포럼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문의: antirop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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