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는 네트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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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는 개별 기업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그들의 유기적 네트워크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기업에서 일하든 간에 그 기업을 위해 일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직·간접적으로 실리콘밸리를 위해서 일한다. 특별히 엔지니어들의 경우 평균 근속 연수가 2년 정도인 만큼 끓임없이 직장이 바뀌는 것이 보통이다. 어제의 상사가 내일의 부하직원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경쟁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실리콘밸리에서 일을 한다면 서로 경쟁하지만 동시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 통념이고 규범이다. 게임 이론을 빌려 설명하면, 전에 봤던 사람을 내일 내가 또 봐야 한다면 배신의 비용은 크고 협력의 가치는 더 높다. 바보가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만나서 일할 수도 있고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도 있는 사람에게 불신의 상처를 안기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자라났고, 어떻게 성장할 건지를 이해하려면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과 같은 일부 기업만 봐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은 아타리아카이브에 올린 글에서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 없었더라면 애플도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대중화되지 않았던 컴퓨터를 다루는 것에 관심이 많던 ‘덕후'(geek)의 모임인 이 홈브루 컴퓨터 클럽은 이후에는 전설이 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스티브 워즈니악 등이 회원이었는데, 서로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게 문화였다. 남 못지 않은 덕후인 워즈니악도 여기에 데모로 보여주고 싶은 제품을 만들고자 했고 그것이 나중에 애플이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된 개인용 컴퓨터 애플 1·2였다. 나중에는 회사를 만들었지만 커뮤니티에서 시작했고, 나중에는 돈을 벌게 됐지만 재미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이런 일들은 애플 외에도 비일비재하다. 실리콘밸리의 일상적 풍경이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상장시키거나 인수합병해 억만장자가 되고 나서도 재창업을 하거나 엔젤 투자자나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되는 실리콘밸리의 정서를 이해하려면 이 실리콘밸리의 보이지 않는 질서인 커뮤니티를,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일반적으로는 돈 벌었다고 부동산에 투자해 지대를 받는 길을 택하지 않는 까닭은 애초에 그들이 실리콘밸리에 오도록, 뿌리내리도록 자극한 동기가 이런 협력에 기초한 경쟁적 커뮤니티에서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리콘밸리가 유기적 네트워크로 자라난 건 계획하지 않은 결과이지만, 우연의 산물도 아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정보대학원 학장인 애나리 색서니안 교수가 1994년에 발표한 ‘지역적 우위’에 따르면 양차대전 이후 미국 연방정부의 후원에 따라 스탠포드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북부지역과 MIT가 위치한 보스톤 루트 128 지역이 모두 미국의 과학기술 연구단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스톤지역이 이후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는 캘리포니아북부보다 스타트업 숫자나 벤처캐피탈 규모나 무엇보다 동부의 큰 기업들과의 관계는 더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MIT의 산학협력은 스탠포드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보스톤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보스톤이 하던 대로 그대로 하면 기존에 갖고 있는 자원이 보스톤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도체 산업의 선두주자인 페어차일드를 비롯한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독립 플레이를 하는 루트 128 기업들을 이기기 위해서 자발적 연대와 치열한 경쟁의 공존을 택한다. 루트 128 기업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영업 비밀과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 애쓸 때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크로스 라이선싱을 통해서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지적재산의 일부를 공유하고 공동 발전을 도모했다. 루트 128 기업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들의 회사 내부 자원을 통해 다 처리하려 했을 때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개방적 노동 시장과 강한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창출했다. 자신이 가진 걸 보여주지 않기 위해 감추는 비용은 낮추고 함께 일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높인 덕분에, 혁신의 공유와 진화가 더 빨리 일어난 덕분에, 실리콘밸리는 루트 128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더 빨리 발전했다.

나아가 실리콘밸리의 저력의 실체가 개별 기업이 아니라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애플, 구글, 페이스북 같은 회사의 경쟁력이 지금보다 떨어진다고 해도 실리콘밸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요즘 우려하는 것처럼 지가나 임금이 상승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실리콘밸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의 원인은 개별 기업에 있지 않고, 상대적으로 더 낮은 지가나 임금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뜻이 맞고 실력이 되는 사람들의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의 지속, 발전, 확장, 그 사회적 자본에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 야후에서 구글로, 페이스북으로 계속 옮겨가고 있는 역사와 지난 수십년 동안 계속 상승해왔던 지가와 임금을 고려하면 이런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1980년대의 미국 반도체 산업 위기 때에도 보스톤의 루트 128 기업들은 추락한 한편,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이후 재기에 성공하고 인터넷 산업 영역으로 확장한다. 네트워크가 살아있는 한 창조적 파괴를 지향하고 가능하게 하는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은 지속된다.

오히려 이런 실리콘밸리의 진화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은 창조경제를 꿈꾸는 한국이다. 작년에 스타트업계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먼저 커뮤니티가 있고 그 다음에 스타트업이 있는 것인지, 창업이 됐든 취직이 됐든 먼저 자신의 업에 대한 애정이 있고 거기서 일이 시작되는 것인지 그 우선순위가 궁금하다.

또한 1970년대의 실리콘밸리와 루트 128보다도 훨씬 더 격차가 심한 서울의 스타트업계와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계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실리콘밸리의 성공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자발적 상호 협력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정부는 창조경제 관련 정책상으로 볼 때 멘토링과 정책자금 지원을 중시하지만, 사람이 좋으면 아이디어는 따라오고 성공이 있으면 투자도 붙게 마련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떠올랐다가 가라앉을 수도 있는 넥스트 애플, 구글 같은 회사를 만드는 게 아니다. 그런 회사들이 태어나고 자랄 수 있는 생태계, 커뮤니티의 조성이다.

마크 주커버그의 페이스북 소셜 네트워크가 있기 전에 이미 실리콘밸리가 네트워크였다. 거기서 역사가 시작됐다. 학연, 지연, 혈연을 떠나서 기술과 사회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정, 독립적 사고와 문제해결력으로 하나된 사람들의 수평적 네트워크, 그들간의 협력과 경쟁의 공존은 한국의 창조경제에도 필수적인 요소다. 실리콘밸리의 진화사가 주는 교훈은 21세기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경쟁우위는 역설적으로 ‘협력우위’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silicon_valley▲사진 : http://www.flickr.com/photos/revolweb/3984351827.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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