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광산에서 채굴한 화폐, ‘비트코인’

한국은행이 세종대왕의 얼굴을 퍼렇게 인쇄한 종이를 가리켜 “1만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사임당의 얼굴을 누렇게 인쇄한 종이를 “5만원”이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얼굴을 찍은 종이는 여느 종이보다 조금 비싸다. 면 소재가 들었고, 사람들이 수십, 수만번 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내도 해지지 않게 만들어졌다. 이 종이 자체가 특별한 건 그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이 종이를 ‘돈’이라고 부른다.

그래, 돈은 우리가 돈이라고 불러서 돈이 된 게 아닐까. 돈이라고 부르기 전까진 그저 특수한 잉크로 찍은 종이였을텐데 말이다.

정부가 만들지 않고, 정부가 ‘돈’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 종이는 그냥 ‘종이’였을지 모른다.

벌기 어려운 돈을 가지고 이렇게 발칙한 생각을 하다니. 책 ‘넥스트 머니 비트코인’을 읽고 나니 어쩔 수가 없다.

이 책은 ‘비트코인’이란 가상화폐를 소개한다. 비트코인은 상식밖의 돈이다. 주인이 없다.

비트코인 책 표지조폐공사도, 중앙은행도 없는 돈

1만원권과 5만원권은 한국조폐공사가 종이랑 잉크로 만들었는데 비트코인은 누구나 만든다. 한국은행이나 미국연방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이 없다.

비트코인의 발행 방식은 독특하다. 비트코인은 총 발행량이 처음 작동할 때부터 정해져 있다. 금처럼 이미 나올 양이 정해졌다. 그러니까 미국이 돈이 궁하면 달러를 찍는 것과 같은 모습이 비트코인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금 얘기를 꺼낸 건 비트코인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것과 비슷해서다. 비트코인은 암호를 입력하면 만들어진다.

암호는 혼자 힘으로 알아낼 수 없고, 컴퓨터의 힘을 빌려야 한다. 비트코인 참가자는 때때로 여러명이 무리를 지어 암호를 푼다. 컴퓨터 여러대를 가상으로 연결하거나 비트코인 암호를 풀 수 있는 기기를 쓰기도 한다.

작동방식도 특이하다. 옛 소리바다나 냅스터, 당나귀, 토렌트처럼 비트코인은 P2P 방식으로 작동한다. 중앙관리소도 없다는 얘기다. 물가를 조절하려고 돈을 더 찍거나 이자를 조정하는 중앙은행이 없다.

거래를 확인하는 중앙기구가 없지만, 참가자의 컴퓨터가 서버가 되고 중앙 기구가 된다.

작동방식을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이 돈은 어쩌다 나왔을까.

비트코인의 창시자는 베일에 싸였다. 사토시 나카모토란 사람이 작동방식을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토시 나카모토’란 게 실제 존재하는 사람의 이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름을 보면 일본인 같지만, 영어를 상당히 능숙하게 구사해 영국이나 미국인일 거라는 추측도 있다. 그런데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를 섞어가며 쓰기에, 실제로는 2명 이상일 거란 얘기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첫 거래 피자 2판, 현 시세로 15억원

창시자도 불분명한데 비트코인은 돈으로 쓰인다. 1비트코인은 미화 100달러가 넘는다. 한화로는 약 20만원이다. 이 환율은 오르락내리락하는데 200달러를 넘긴 적이 있다.

비트코인의 초기 참가자는 암호를 풀고 비트코인을 얻는 과정이 흥미로워 관심을 보였다. 재미도 잠시, 비트코인은 쌓여가는데 쓸 데가 없었다. 그러다 비트코인의 첫 거래가 이루어졌다.

미국 프롤리다에 살고 laszlo란 계정을 쓰는 비트코인 참가자는 ‘1만 비트코인 줄 테니 우리집으로 피자 2판을 보내달라’란 글을 올렸다.

4일 뒤, 거래는 이루어졌다.

이때만 해도 비트코인은 만드는 재미가 있으나 제대로 인정받는 화폐가 아니었다. 받아주는 곳 없는 돈을 누가 쓰겠는가. 돈으로서 쓸모가 없으니 비트코인은 그저 몇몇 IT 광에게 흥미를 끈 시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피자 거래가 있고 나서 비트코인의 가치가 오르기 시작했다. 저자가 책을 한창 쓰던 2013년 2월, 1비트코인은 140달러였다. 이때 시세로 따지면 피자 2판을 산 1만비트코인은 한화로 15억원이다.

laszlo가 피자를 사겠다고 올린 글은 비트코인 참가자 사이에 성지가 됐다. 3년이 지난 지금도 댓글이 달린다. 2013년 10월24일에는 “피자 2판에 1만비트코인이었는데 2년이 지나면 2비트코인에 피자 1만판이 될 거다”란 글이 올라왔다.

비트코인으로 거래된 첫 피자자

▲2010년 5월 1만비트코인 줄 테니 피자 2판을 배달해달란 이 글은 성지가 됐다. 1만비트코인은 지금 시세로 15억원에 달한다.(☞성지 방문하기)

온라인 거래 넘어, ATM도 등장

지금 얘기한 이 일이 정말 있었던 건지 의심스러운가. 비트코인은 모든 거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 laszlo가 글을 올리며 쓴 비트코인 지갑을 찾으면 그가 2010년 5월 22일 1만비트코인을 누군가에게 이체한 걸 확인할 수 있다.

비트코인에 주민번호에 기반한 실명제는 없지만, 위와 같이 모든 거래가 공개돼 있다. 계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나, 거래 내용은 누구나 볼 수 있다. 이것도 비트코인이 여느 돈과 다르게 가진 특징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화폐는 점차 실생활로 들어오고 있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데 지금 실제로 작동한다.

비트코인을 쓸 수 있는 매장도 있다. 미국에 있는 온라인 음식 배달 서비스 ‘푸들러’는 비트코인으로도 주문을 받는다. ‘기프트’란 선불 카드 회사도 있다. 이 회사는 미국에 있는데 갭, 나이키, 버거킹, 매리어트 호텔 등에서 쓸 수 있는 선불카드를 비트코인을 받고 판다. 각국의 돈으로 비트코인을 사고파는 거래소는 30곳 가까이 있다. 한국에도 있는데 ‘코빗’이란 곳이다. 코빗의 이사가 바로 ‘넥스트 머니 비트코인’의 저자다.

비트코인 생태계

▲비트코인 생태계. 다양한 회사와 서비스가 있다. (☞이미지 크게 보기)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 캐나다에 비트코인 ATM이  등장한다. 이 ATM은 사용자가 현금을 넣으면 비트코인을 주고, 비트코인을 이체하면 현금을 인출하게 한다. 그동안 비트코인 ATM이 발표된 적인 몇 번 있는데 실제로 쓰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 앞으로 10년 뒤를 상상했다.

제목: ‘비트코인’ 너머 선언
발신: 사토시 나카모토(비트코인의 창시자다)
수신: 모든 비트코인 이용자와 지구상의 사람들
참조: 유엔

…(중략)…

  • 유엔을 구심으로 하는 글로벌 대안 경제 네트워크 결성을 제안합니다. 제가 보유한 비트코인은 바로 이 네트워크의 기금이 될 것입니다.
  • 비트코인의 룰 개정을 통해 연간 1퍼센트에 해당하는 보유세가 이용자의 지갑을 바져나가 이 기금으로 귀속되는 방안을 비트코인 네트워크에 제안합니다. 이는 비트코인의 공공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공격의 빌미가 되고 있는 화폐 유통의 둔화 현상을 해소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 이 기금의 법률적 관리자가 될 유엔이 비트코인을 세계 시민 사회의 공식 화폐로 지정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생략)…

저자는 비트코인이 세계 공식 화폐가 되기 직전의 순간을 비트코인의 창시자 편지로 대신 그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허무맹랑한 얘기다. 그런데 모를 일이다. 10년 전 우리는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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