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많은 스타트업의 또 다른 고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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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K-스타트업 프로그램의 세 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런던 임페리얼대학에서 열리는 ‘한∙영 창조경제 포럼’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영국 투자자들에게 투자 상담을 받고 서비스를 소개하는 ‘실전’ 자리입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유럽 순방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하기로 했습니다. 글로벌 K-스타트업 참가 기업은 사업을 직접 소개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습니다. 스타트업들은 아침 일찍 임페리얼대학을 찾아 부스를 설치하고 또 다시 피칭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투자자들 앞에서 상세하게 발표하는 일정도 있고 부스를 찾는 대통령에게 짤막한 피칭도 해야 합니다. 어제 연습했던 5분 피칭, 그리고 30초 내에 제품을 소개하는 ‘엘리베이터 피칭’이 실제로 이뤄지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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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서둘러 먹고 버스에 올라 임페리얼대학을 찾았습니다. 오자마자 짬이 나는대로 곧장 피칭 연습을 시작합니다. 다섯 팀 모두 어제 멘토들이 주었던 피드백들을 반영해 밤 늦게까지 슬라이드를 손보고 발표 내용을 매만졌기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제가 눈여겨 본 스타트업은 ‘크로키’입니다.

크로키는 ‘비스킷’이라는 서비스로 글로벌 K-스타트업에 참여했습니다. 런던에는 김대윤 COO(최고운영책임자)와 여추동 엔지니어가 왔습니다. 먼저 김대윤 COO의 피칭부터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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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키 팀 피칭 동영상 보기

비스킷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웹브라우저용 사전’과 ‘클라우드 단어장’이 결합된 서비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멘토들의 반응입니다. 보시다시피 김대윤 COO는 누가 보더라도 부러울 만큼 영어를 잘 할 뿐 아니라 말도 조리있게 잘 합니다. 슬라이드의 디자인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지적됐습니다. 고영하 엔젤투자협회장을 비롯한 국내 멘토들 뿐 아니라 해외 멘토들 역시 이 두 가지 서비스가 결합된 부분에 흥미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 “비스킷이 한마디로 사전이냐, 교육 도구냐”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멘토들의 판단은 어느 한쪽에 특화된 서비스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너희는 어떤 회사니?”라고 물었을 때 “사전 회사입니다” 혹은 “영어 단어 학습 서비스입니다”라고 한마디로 설명할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셋째 날 아침의 피칭 연습에서도 멘토들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또 다시 꺼냈습니다. 김대윤 COO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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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부적으로도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이기도 하고 계속해서 멘토들이 언급하면서 저희 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멤버들도 이전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만 슬라이드나 피칭 자세처럼 하루 아침에 고치거나 확정할 수는 없는 부분이기에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 확실하게 하게 됐습니다.”

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선택과 집중으로 연결되면서 다른 팀들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화분을 원격으로 키우는 엔씽의 ‘플랜티’가 좋은 예입니다. 기술을 갖고 있고 기능적으로 다 집어넣고 싶은 욕심도 있다보니 스마트폰으로 물을 직접 주는 것 외에 미리 프로그램된 환경에 맞춰 모든 것을 자동으로 해 주는 기능을 넣었는데, 멘토들은 이를 두고 사업적으로 볼 때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고 합니다. 비스킷도 사전이냐 단어장이냐에 따라 완전히 비즈니스가 달라질 겁니다. 하지만 고민중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정체성을 꺼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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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키의 김대윤 COO(오른쪽)와 여추동 엔지니어. 비스킷은 한 달만에 45만 다운로드를 기록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이 이야기를 다시 구체적으로 해보자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두 가지 서비스가 엮였을 때 비스킷이고, 이를 떼어 놓고 보면 사전으로서도 단어장으로서도 각각의 서비스는 ‘최고’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웹에서 단어를 찾고 이걸 다시 목록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비스킷이 성공한 요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처음 비스킷을 만들었을 때는 사전으로 기획했습니다. 여러 사전 서비스를 묶어 하나의 사전 데이터를 만든 것이지요. 다만 검색이 쉽고, 이를 목록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좋은 반응을 얻어 한 달만에 45만 다운로드를 이뤄냈습니다. 왜 이렇게 인기를 얻었는지 생각해보니 이용자들이 사전 기능보다는 단어장으로 더 열심히 쓴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단어장 기능으로 초점이 옮겨지는 중입니다.”

‘어떤 서비스냐’란 질문에 이 이야기가 답이 된 것 같습니다. 애초 기획했던 방향이 아니더라도 이용자들이 받아들이고 사람이 모여드는 방향이 있다면 이를 빠르게 받아들인 것이 비스킷의 인기 비결이자 경쟁력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지만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사전 앱이라는 메시지가 잘 와닿는다는 것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윤곽은 다음주 실리콘밸리에서 다시 한번 구체화해보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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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3일째, 이들의 피칭을 길게는 세 번, 짧은 것까지 치면 다섯 번은 봤습니다. 듣는 입장에서 이제 슬슬 지겨워지기도 합니다. 말하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싶습니다.

“연습을 하는 것도 중요한데,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큰 경험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설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발표중에 계속 느낄 수 있습니다. 3일 밖에 안 됐지만 분명 다듬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5분도 짧은데 오늘 대통령 앞에서처럼 30초 이내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에 대한 훈련이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크로키는 원래 오늘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품을 시연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행사가 지연되면서 부스 뒤쪽에 서 있던 크로키 부스에 왔을 때는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가만히 있었다면 대통령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김대윤 COO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비스킷을 설명했습니다. 영어 외에 프랑스어나 중국어도 할 수 있다고 하자 대통령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마침 프랑스를 방문했던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겠는데, 자연스레 상대방의 관심사를 이끌어내는 것도 지난 멘토링에서 온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치려던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언어들을 쓸 수 있나”, “해외 이용자가 얼마나 되느냐”라고 물으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넉넉하게 시간을 마련해주는 상황보다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았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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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다섯 팀 모두가 길든 짧든 대통령에게 서비스를 소개할 시간을 가졌는데, 분명 어제 아침에 제가 서비스를 한마디로 소개해달라고 했을 때보다 더 구체적이고 쉽게, 확실히 내용을 전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글로벌 K-스타트업의 해외 프로그램 이후에 있을, 수천만원에서 1억원에 이르는 상금보다 이 하루하루가 이들에게 더 큰 자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안타까웠던 것은, 애초 오후 느즈막히 예정돼 있었던 영국 투자자들의 방문이었습니다. 임페리얼대학에서 직접 투자자들을 앉혀놓고 피칭을 하기로 계획돼 있었는데, 이들이 대통령 행사 시작 전에 입장하지 못했습니다. 입장 시간을 놓쳐 행사가 끝날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려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 구글, 영국대사관이 이 투자자들을 섭외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끼리 다시 연습하자’라고 이야기하려는데 마침 영국인 2명이 발표장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원래 참석하기로 했던 것은 아닌데 창조경제 포럼에 참석차 왔다가 한국 스타트업이 투자 설명회를 한다고 해서 호기심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들은 영국에서 스타트업 관련 사업을 하는 중이라니 글로벌 K-스타트업의 이야기를 들어주기에 충분한 손님입니다. 다섯 팀 모두 또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발표를 했고 손님들도 관심을 보이며 질문도 하고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비즈니스 자체가 꼭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또 예상치 못한 기회들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하루였습니다. 그런 의외성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스타트업을 이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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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상황은 기자들에게도 찾아왔습니다. 글로벌 K-스타트업 취재를 함께하는 뉴스핌의 서영준 기자가 포럼이 끝나고 행사장을 나서는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마주쳤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이 행사의 주최측이기도 합니다. 최 장관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국내 스타트업들이 해외에서 투자유치 설명회를 연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라며 “앞으로도 스타트업과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적극 키우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진땀을 뺐던 하루였지만 끝나고 나니 또 각자가 뭔가 하나씩 얻은 건 분명한 얼굴들입니다. 생각해보니 이제 우리가 서울을 떠난 지 4일밖에 지나지 않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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