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 정신의 산물, 런던 테크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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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일주일간 머무르면서 스타트업과 관련된 사람들을 매일같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계 시장을 무대로 스타트업을 시작할 계획이라면 런던에 오라’고 적극 주문했습니다. 그럼 실제 한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스타트업을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함께 온 멘토들도 런던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많이 배워간다”고 이야기했을 만큼 우리와 런던 사이의 거리는 심리적으로도 가깝지 않은 듯 합니다.

우리가 가장 자주, 오래 머물렀던 구글 런던캠퍼스의 네트워크 미팅 자리에서 테크시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캠퍼스 런던을 비롯해 테크시티 곳곳에서는 네트워크 미팅이 열립니다.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인력을 찾는 사람들 뿐 아니라 즉석에서 만나 다른 스타트업과 협력을 도모하거나 투자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스타트업을 주제로 경계 없이 자유롭게 미팅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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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만난 서머 김(Summer Kim)은 영국의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한국인입니다. 한국 이름은 김정연인데 런던에서는 서머 김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하니 그 이름을 부르는 게 낫겠네요. 현재 테크시티에 자리잡은 Consolidated Independent(CI)라는 음악 유통과 관련된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이 지역에 ‘테크시티’라는 이름이 붙기 전부터 있던 15개 테크 회사들 중 하나입니다. 테크시티의 원조인 셈이지요. 화장기 없는 이 동네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한국인으로서 런던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생각도 들어보려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뒤 일주일간 테크시티를 접하면서 막연하게 느끼던 것들이 서서히 정리가 되는 듯했습니다.

“테크시티 자체가 역사적으로 일이 많았던 지역이에요. 대화재나 전쟁 등으로 여러 지역의 사람과 산업이 지나가면서 유태인, 파키스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게 됐습니다. 금융, 패션, IT 등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요. 다양한 문화가 싹트면서 문화나 산업들을 받아들이는 개념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단적인 게 체인점 개념의 음식점, 상점이 없어요.”

프랜차이즈가 아니어도 음식이나 커피를 잘 하는 곳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기업보다도 골목상권들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누가 나서서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포장보다 본질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겠지요. 같은 런던이고 중심가와 불과 10분 거리에다, 런던을 구분하는 지역 범위로도 1존인데 이곳은 완전히 문화 자체가 다릅니다. 테크시티 자체가 여러 문화 속에서 여러 가지가 나오는 결과물인 셈입니다. 또한 이런 분위기가 대기업의 기술과 동등하게 작은 스타트업들을 키워오는 토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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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이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모이니 음악, 미술 등 예술 뿐 아니라 미디어 산업, 광고, 그리고 IT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된 거죠. 게다가 산업지대로 꼽혔던 곳이기에 건물 임대료가 쌌습니다. 여기에 젊은이들이 모이자 영국 정부가 관심을 갖고 투자와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테크시티가 열리고 유럽 전체에서 스타트업이 몰려드는 지역이 됐다고 합니다. 일단 땅을 밀어 번쩍거리는 건물을 세우고 번듯한 상권부터 만드는 접근 방법과는 다르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사무실의 위치가 약간은 그 회사의 성격을 설명해준다고 합니다.

서머 김이 일하는 CI는 독립 레이블의 음원을 모아 음원 서비스 업체들에 공급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메이저 레이블인 유니버셜, 소니, 워너뮤직은 스타 기반의 매니지먼트가 잘 돼 있고 많은 자본과 인력이 투입됩니다. 상대적으로 이들과 거리를 두는 인디음악 레이블들은 인프라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음원에 대해 기술적으로 지원해주는 회사입니다. 음악과 미디어, 그리고 IT가 접목된 비즈니스인 셈입니다.

그런데 서머 김이 언급하는 뮤지션들의 이름이 의아합니다. 세계 시장에서는 아델, 테일러 스위프트, 그린데이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이 모두 독립 레이블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K팝도 인디음악으로 꼽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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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들은 음원들을 관리하는 기술 엔지니어들만 수백명씩 됩니다. 음반 판매보다 음원 판매 시장이 더 크기에 이를 빨리 유통해야 제작비를 뽑을 수 있는데, 아무래도 인디 레이블들은 수천개의 음원 사이트들에 공급하는 게 쉽지 않아요. 이런 걸 전송해주는 게 저희 회사 일이에요.

예를 들면 에미넴이 신곡을 내놓으면 이걸 에미넴이나 제작사 쪽에서 직접 음악을 보내지 않습니다. 아이튠즈를 비롯해 구글플레이가, 국내에선 멜론과 벅스뮤직 같은 서비스들이 다 있을텐데 이들에게 보내는 음원의 형식이 다릅니다. 코덱이 다르다는 얘기가 아니라 메타데이터가 다릅니다. 음원 유통업체들은 3가지를 요구하는데 음원, 커버 이미지 그리고 메타데이터입니다. 아티스트, 제작자, 저작권, 피처링 정보, 퍼블리셔 등 가사를 뺀 나머지 모든 정보는 메타데이터 안에 담깁니다. 이를 기반으로 음원 사이트를 구성하고 이용자들이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겁니다.

‘그냥 파일을 전송하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했는데, 음원 하나가 전송될 때 그 안에 ‘누가 참여했고, 누가 돈을 받을 사람이고, 고유 코드는 뭔지’ 같은 정보가 담깁니다. 한두개라면 쉽게 할 수 있겠지만 10곡짜리 음반을 1천개 유통사에만 보내도 1억 곡입니다. 모두가 다른 포맷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를 자동화해주는 게 CI의 비즈니스라고 합니다. XML로 정해진 음원 유통사에 각각 맞춰 자동화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중간에 가격이라도 바꾸려면 메타데이터를 다 고쳐야 합니다. 사람 손으로 하면 백발백중 틀린 부분이 나오기 때문에 자동화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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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이를 표준화하는 DDEX라는 기구가 생겨서 메타데이터 포맷이 표준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해 관계가 없는 음원 엔지니어들만 모여 어떤 스펙이 필요하고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규격을 잡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DDEX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CI는 국내 음원사 일부에도 보내고 있다는데요. 테크시티의 태생과 잘 어울리는 회사 아닌가요?

서머 김은 어떻게 영국에서 일을 시작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가족이 이민을 온 것도 아니고, 영국에 온 지도 몇 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래 한국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공연 아트 관련 일을 했어요. 원래 창업에 관심이 많았어서 관련해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생각했는데 이때 뉴욕과 런던을 생각했었는데 뉴욕은 본질보다 너무 상업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런던이 좋겠다고 생각해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앙트프러너십(Entrepreneurship)을 공부했어요.”

런던은 메이저가 시장을 이끄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문화였고, 학교에서도 문화를 갖고 새로운 스타트업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느껴서 런던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테크시티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 앙트프러너십을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기업가 정신’이 되겠네요. 경영학과는 전혀 다른 학문이라고 합니다. 법학대학과 로스쿨의 차이로 보면 비슷하다고 합니다. 경영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 다른 전공을 갖고 이를 창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서머 김과 같이 공부한 팀원 중에는 인도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이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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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학문이에요. 실험적이고 사업에 대한 연습을 많이 합니다. 누가 뭘 가르치고 배우는 학문이 아닙니다. 대신 문화가 산업이 되는 과정을 저절로 익히게 됐어요. 아이디어를 눈에 보이게 시각화하는 작업, 스토리와 에세이를 만드는 과정이 기업가 마인드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

런던은 새로운 일들이 제대로 조성돼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환경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합니다. 스타트업이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상업화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보니까 상대적으로 투자도 잘 이뤄진다네요.

“정부 투자를 먼저 찾을 필요가 없어요. 환경만 잡아줄 뿐 직접 정부가 나서서 투자 비용을 지원하거나 억지로 키우려고 하지 않아요. 도서관도 곳곳에 비즈니스 센터가 있고 자료들이 모여 있습니다. 정부도 여기에 공공자료를 개방하기도 합니다.”

스타트업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도 런던 자체가 기업가들에 대한 존중과 스스로의 자존감이 잘 지켜지는 것도 한몫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작거나 장사를 한다고 해도 어떤 일이든 기업가로서 존중하는 문화도 영국의 스타트업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런던의 테크시티를 비롯한 스타트업 붐이 일고 있는 것 자체가 이런 영국의 문화가 서서히 갖춰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투자도 하고 지역도 만들어주고 싶어하지만, 그보다는 문화와 기술이 섞이는 지역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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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일주일은 우리에게 “이거야”라고 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들이 장밋빛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지요. 런던을 떠나며 막연하지만 확실하게 얻어가는 건 ‘문화가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고작 일주일 경험하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기술, 문화, 투자 등 생태계가 딱 맞아 떨어지는 환경과 작은 문화도 가치를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테크시티를 키워 온 힘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 태생 자체가 자생력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스타트업이 붐이지만 문화와 관련된 다른 비즈니스가 생긴다면 아마 그 어느 곳보다 이 테크시티에서 일어날 수 있겠다는 경쟁력이 보입니다. 글로벌 K-스타트업을 꾸려나가고 있는 미래창조과학부나 인터넷진흥원도 당장의 투자 지원이나 환경 지원보다도 장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사업과 문화를 키워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귀 기울여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이제 저희는 런던을 떠나 실리콘밸리로 이동합니다. 런던이 급성장하는 스타트업의 토대라면 실리콘밸리는 성숙하고 상업화된 스타트업의 시장이죠. 다음부터는 실리콘밸리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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