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스핀잇, 결국 문제는 ‘우선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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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는 혁신가의 성지다. 애플과 구글 등 지난 수십 년 간 글로벌 ICT 산업을 풍미했던 기업들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새로운 역사가 또 다른 스타트업에 의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태동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혁명 이래 ICT가 또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인프라로 자리잡게 되고, ICT 산업의 영향력이 전산업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이제 실리콘밸리 스토리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1822년에 발표한 자서전 ‘나의 일, 나의 삶'(My Life and Work)에서 기계적 분업에 의한 생산 체계인 포드주의가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다른 산업, 사회 영역으로 확장될 것을 예고했다. 그 비전이 현실화돼 가는 과정에서 20세기 자본주의가 만들어졌다. 비슷한 맥락에서 페어차일드부터 인텔, 애플, 구글에 이르는 실리콘밸리의 예언가들은 반도체가, 컴퓨터가, 인터넷이, 소셜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이야기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도전이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포드의 꿈이 자본주의의 어제를 만들었다면, 실리콘밸리의 야심은 자본주의의 내일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이 근대화의 희망을 심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세기에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하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국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실리콘밸리란 이상 역시 아직은 높고 멀기만 하다. 왜 그렇게 많은 개인과 조직들이 이 실리콘밸리의 꿈을 좇고 있지만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스핀잇 이미지

그런 문제의식에서 볼 때 한국에서 태어나 스타트업을 경험한 후,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실리콘밸리에 정착해 오라클의 프로덕트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는 조성문의 ‘스핀잇'(알투즈, 2013)은 그 길을 찾을 수 없다면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좋은 책이다. 책 제목인 ‘스핀잇’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 책이 학술 도서는 아닌 만큼 엄밀하게 정의돼 있진 않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스핀잇은 기술, 사람, 그리고 돈이 빠르게 선순환되는 구조를 지칭한다. 새로운 기술이 혁신가를 부르고, 다시 혁신가는 새로운 기술을 사람들이 쓸만한 기술로 만들며, 이 쓸만한 기술이 돈을 부르면, 다시 이 돈은 또 다른 혁신가를 부른다. 저자는 이 스핀잇을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로 정의한다.

책 본문은 총 4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은 새로운 기술이 기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점을 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보급 이후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근대 시민의 기본 자질이자 능력이 된 것처럼, 컴퓨팅의 대중화 이후 코딩을 비롯한 소프트웨어 응용기술이 대중화돼 가는 현상에 주목한다. 2장은 이런 변화를 이끄는 기수들인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이 디지털 기술이란 도구를 사회적 문제 해결이란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는지 개별 기업들의 창업 사례를 토대로 서술한다. 1장에서 기술을 설명했다면, 2장은 사람을 말한다.

3장에서는 다시 이러한 실리콘밸리 창업가들의 ‘창업가 마인드’ 혹은 ‘기업가정신’을 분해하고 조립한다. 창업가, 투자가 등 실리콘밸리를 만들었고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과 특성을 설명하면서 서울과 실리콘밸리의 차이는 단순한 기술 격차가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역할과 특성을 조정하는 제도와 문화에 있음을 지적한다. 4장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제도와 문화의 차이가 기업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방식에서 어떠한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말로만 고객 가치와 동기 부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를 통해 어떻게 그것을 실천하고, 우선시하고, 철저히 고객의 눈높이에 맞출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3·4장의 역할은 1·2장에서 논한 기술과 사람의 이야기를 제도와 경영의 차원에서 다시 언급하고, 그 과정에서 실리콘밸리와 서울식 자본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전개를 통해서 책이 역설하는 주제는 ‘우선순위’다. 예를 들어 책에서 나오는 실리콘밸리 기업과 한국 기업간의 완연히 차이를 보여주는 예는 기업 내 의사 결정에서 엔지니어가 갖는 지위와 역할의 차이다. 실리콘밸리 기업에는 ‘기획자’가 없다. 한국 소프트웨어 개발 문화와 달리, 엔지니어는 기획자가 던져주는 설계도에 따라 공사하는 인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는 기획에 깊숙이 간여하고, 소프트웨어는 엔지니어의 창의성의 산물인 예술품으로 인식된다. 저자는 서울과 실리콘밸리의 차이는 기술의 격차, 인적 자본의 생산성, 자본의 접근성의 난이도를 떠나 이러한 제도적, 문화적 우선순위의 차이에 있음을 지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한국이 이런 실리콘밸리식 우선순위를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한 실리콘밸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시도는 수박 겉핥기에 그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우선순위를 재정비하지 않는 한, 원인을 바꾸지 않는 한, 결과 역시 바뀌지 않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 책의 미덕은 이렇게 다양한 사례를 평이한 문체로 소개하면서도 주제에 대한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굳이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으라면, 첫째는 너무 많은 사례가 한 책을 통해 빠르게 소개되다 보니 체계적으로 주장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실리콘밸리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체계적 이해’를 돕는 것 사이에서 전자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저자가 제시한 실리콘밸리의 성공 DNA가 사실인지 입증하기 위해서는 엇비슷한 조건 아래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조직이나 개인의 성패를 비교 분석해야 했다. 하지만 책에서는 이런 비교 분석이 거의 제시돼 있지 않고,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성공사례 분석에 한정돼 있다. 소위 사례 연구의 한계점은 사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주관이나 사회적 통념이 편견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분석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편견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점은 실리콘밸리의 빛 뿐만 아니라 그림자에 대한 분석의 부재다. 헨리 포드의 꿈의 실현체인 미국 현대 자본주의는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에겐 ‘위대한 신세계’였고, 미국의 비평가 닐 포스트만에게는 ‘죽도록 즐기기’였다. 포드에겐 미국과 세계를 구원할 노동 윤리와 생산 체계의 확장이 헉슬리와 포스트만에겐 사회적 인간 윤리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실리콘밸리 역시 마찬가지다. 실리콘밸리식 자본주의가 20세기 말, 21세기 초 글로벌 자본주의가 혁신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기업들의 활동이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분배 형평성을 해결하는 데에는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디지털 프라이버시 등 자신들이 이끄는 기술적, 상업적 발달이 사회적 윤리와 충돌하는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그들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도 저자의 체험에 근거한 통찰력 있는 식견을 접할 수 있었다면 책의 주장은 더 균형 잡혔을 것이고, 따라서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약점들이 책의 장점을 가리진 않는다. 이 책은 그간 저자가 쌓은 경험과 해온 사색, 그리고 본인의 블로그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의 결산인 만큼, 그 고민의 흔적들이 각종 정보의 나열을 하나의 스토리로, 그리고 그 스토리를 하나의 메시지로 만든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가 중 한 명인 폴 그레이엄은 그가 2013년 6월에 본인의 웹사이트를 통해 소개한 ‘스타트업 투자 트렌드’란 글에서 실리콘밸리의 성장을 결정하는 기준은 기술도 무엇도 아닌, 자질 있는 창업가들로 꼽았다. 이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한, 스타트업 투자 전망은, 실리콘밸리의 미래는 밝다고 주장한다.  그가 2006년 5월에 발표한 ‘실리콘밸리는 복제가 가능한가’란 글에서도 실리콘밸리의 핵심을 사람과 문화로 꼽고 있다. 애플, 구글과 같은 혁신 기업들도 이런 생태계 안에서 배양된 것이고, 다시 이런 기업들의 성장이 인적 자원을 강화하고, 그들만의 문화를 새로운 전통으로 승화시킨다.

이 책은 그러한 실리콘밸리의 정수인 사람과 문화,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는 기술과 자본에 대해서 일반인의 시각에서, 본인의 경험에 기초해 분석한 책이다. 충실히 본문을 읽고 개인의 삶의 적용에 초점을 맞춘 부록까지 읽고 나면 실리콘밸리는 ‘장소’가 아니라 ‘정신’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을 혁신의 성지답게 만드는 사람과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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