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개혁가, 로렌스 레식의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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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건국시부터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였던 흑인 노예 문제의 해결에 앞장섰던 정치적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링컨의 빼어난 점이 도덕적 고결함에 그쳤다면, 그는 정치란 전쟁터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의 근대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은 악마가 사는 세상이 아닌가. 특별히 링컨의 라이벌이자 나중에 그의 내각의 중요 인물이 됐던 윌리엄 H. 시워드(국무장관), 살몬 P. 체이스(재무장관), 에드워드 베이츠(법무장관)는 모두 링컨보다 좋은 가정 배경, 성장 과정,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링컨은 그의 도덕성 외에 무엇이 특별했던 것일까?

개혁가의 성공 조건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링컨이 1854년에 노예 반대자들이 주축이 돼 설립된 공화당이 배출한 첫 번째 대통령(1861-65)이란 점이다. 역사 속에선 어제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되는 일이 빈번하다. 이 당시만 해도 공화당은 남부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미국 사회의 인권 수준을 높이고, 기술 개발에 기초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링컨은 이 공화당의 발전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조직화해 출신 지역 텃밭, 연줄, 명망 등에 의존하던 자신의 라이벌을 꺾을 수 있었다.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퍼블릭 도메인.

또한, 링컨은 그의 정치적 멘토였던 헨리 클레이를 본받아 노예문제 해방보다는 남북통합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클레이는 비록 1824, 1832, 1844년 대통령 선거에는 낙마했지만, 켄터키주를 대표하는 연륜있는 상원으로서 언변이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미국이 자신의 모국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자유 국가’이기 때문임을 강조했고, 신생 국가인 미국이 연방 정부 하에서 통합을 유지할 것을 역설했다.

링컨은 이 클레이의 정신과 정치적 기술을 물려받았다. 그가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건, 흑인 노예의 인권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 점만 따진다면 도덕주의자이며, 원칙주의자인 오하이오주의 체이스 의원이 더 유명했고, 유력했다. 링컨의 탁월한 점은 그의 노예제도 반대에 대한 원리원칙과 함께 실용적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링컨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따라가다 보면 미국이 ‘자유국가’란 원칙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지했고, 동시에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는 한 이 자유국가 원칙 하에서 남북 통합이 유지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인정했다. 헌법상 국민의 자유를 인정하는 국가에서, 국민의 일부는 자유롭고, 일부는 부자유하다는 건 이미 그 자체로 부조리였기 때문이다.

디지털 개혁가, 로렌스 레식의 오디세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 변화가 필요한 건 링컨 시대만의 얘기가 아니다. 정치적 변화를 위해서 도덕성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조직력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필요한 것 역시 링컨의 시대만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기존 법률과 제도에 의존해 자신의 이익을 보전하려는 기득권 세력은 여전하며, 새로운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도 변함없다. 지구상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헌법상 표현의 자유가 명시돼 있고, 인터넷이 나날이 보급되고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걸리는 제한과 조건은 나날이 무거워지고 까다로워지고 있다. 이젠 누구나 다 창작자, 즉 저작권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지만 할리우드 등 ‘기존의 창작자’에게만 유리해지는 제도적 현실은 공고하다.

대표적으로, 1998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 법(DMCA)을 보자. ‘미키마우스 악법’으로도 불리는 이 법은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등 무수한 지난 세대의 공유 지식을 통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든 디즈니와 그를 비롯한 다수의 저작권 산업의 기득권 세력이 정작 자신의 저작물은 보호 기간이 끝나도 공공 영역으로 되돌아주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린 결과이지만, 의회도 법원도 이 물결을 막진 못했다. 사실 DMCA는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 사실이었다. 지난 수십 년 간 미국 저작권법 역사는 보호와 공유 사이에서 전자로 기울고, 또 기운 역사였다. 듀크대의 제임스 보일, 뉴욕대와 예일대를 거쳐 지금은 하버드대 로스쿨에 재직 중인 요하이 벤클러 같은 저작권법 학자들이 저작권 보존 시효가 끝난 저작물들을 지칭하는 ‘공공 영역'(public domain)이 사회적, 상업적 가치가 전무한 황폐한 땅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와 혁신의 기반이라는 것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견고한 제도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저작권법이 저작권자에게 일시적 배타적 재산권을 허용하는 이유가 창작자에게 인센티브를 주기 위한 것이라면, 이미 사망한 사람의 저작권 보호 기간을 연장할 아무런 경제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작권 보존 기간은 계속 연장되기만 했고, 공공 영역은 갈수록 메말라 가기만 했다. 구체적으로, 1998년의 저작권법 개정을 통해서 저작권 보존 기간은 개인 저작권자는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법인 저작권자는 기존 75년에서 120년으로 연장됐다. 디즈니를 비롯한 저작권 산업의 기득권 세력은 ‘공유 지식’이란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위키피디아의 블랙아웃을 통한 SOPA 반대 온라인 시위.

▲위키피디아의 블랙아웃을 통한 SOPA 반대 온라인 시위.

하지만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적어도 미국에서는 상황은 바뀌었다. 2012년. DMCA와 비슷하게 저작권 산업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를 압박하고, 이용자의 권익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 상원에 입안된 지적재산권 보호 법안(PIPA), 하원의 온라인 해적행위 방지 법안(SOPA)은 그들의 야심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SOPA는 저작권 침해 웹사이트로 지정되면 검색을 금지하거나 인터넷 사업자가 접속 차단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조항을 포함한 강력한 규제 법안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 가를 묻는, 그리고 향후 인터넷 산업의 발달과 인터넷 이용자의 권익의 행방을 결정하는 이 법안의 입법화는 광범위한 인터넷 이용자의 지지를 얻은 구글 등 인터넷기업과 위키피디아를 포함한 커뮤니티의 온·오프라인 저항 운동을 통해 저지됐다.

그렇다면, 약 10년 동안 무엇이 바뀐 것일까?

인터넷 이용자를 기반으로 인터넷기업과 커뮤니티가 연합해 막강한 기득권 단체들과 로비스트들의 입법 활동을 저지하고 기술 혁신, 온라인 협업, 공유 경제, 기업가정신, 제도 개혁 등을 주장할 수 있게 된 데는 여러 가지가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무엇이든, 그러한 변화의 상징으로서 로렌스 레식을 빼놓을 수 없다.

1961년생, 한국 나이로 올해 53세. 살짝 벗겨진 이마에, 흰 머리가 많이 섞인 금발, 무테 안경에 다소 무표정해 보일 수도 있는 이지적인 얼굴. 깡마른 몸에 껑충한 키를 가진 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얼핏 보면 전형적인 상아탑 학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선입견이다. 테드(TED) 등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는 레식의 저작권 개혁, 의회 개혁에 대한 강연 동영상을 보면 그의 남다른 개혁가로서의 면모, 논리적 정확성, 그리고 대중적 호소력이 보인다.

▲로렌스 레식. Joi Ito 사진. CC BY.

일례로, 로렌스 레식을 비롯한 디지털 개혁가들의 활동을 기록한 데이비드 볼리어의 ‘바이럴 스파이럴’이란 책에서 한 해커는 레식의 대중적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레식이 오픈소스 프로그래머들을 위한 컨퍼런스인 오라일리 오픈소스 컨벤션(OSCON)에서 정부 정책이 어떻게 인터넷 공유지를 침식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저지할 지에 대해 강연할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내용에 너무 강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강연이 끝나갈 무렵 당장에라도 봉기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레식은 문자 그대로 아이콘이었고, 도화선이었다.

그러나 레식은 인터넷 정책계의 체 게바라가 아니다. 그의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은 혁명가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레식은 엔지니어이자 기업인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를 따라 자신 역시 기업가가 되기 위해 펜실베니아 주립대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또한 열성적인 공화당원이었으며, 공화당 소속 정치인이 되길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석사 과정으로 철학을 공부하면서 레식은 자신이 신봉하던 아버지의, 공화당의 시장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 개입이란 반드시 악인 것일까? 경제적 자유가 지켜지기 위해선 정치적 자유가 전제돼야 하지 않을까? 그의 이런 고민은 당시 붕괴하고 있던 동구권을 여행하고 목격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시민 자유에 대한 도덕적 신념은 시장 자유에 대한 현실적 이해와 맞물려 그만의 새로운 정치경제 사상을 구축해나가는 자양분이 됐다.

레식이 영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기독교 전파에 핵심적 역할을 한 사도 바울에게 다메석이 회심의 장소였다면, 레식에게 학문적, 정치적 사명을 깨닫게 해준 곳은 케임브리지였다. 이후 레식은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했고, 법경제학의 거두인 리처드 포스너 판사와 헌법의 원본주의적 해석을 강조하는 안토닌 스칼리아 판사 밑에서 판사보로 일했다. 비록 포스너 판사보다는 더 진보적인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게 됐고, 스칼리아 판사보다는 더 유연한 헌법 해석을 수용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로부터 배운 법경제학적인 접근법과 헌법 해석에 대한 강조는 레식의 주요 무기가 됐고, 이후 관련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레식이 처음부터 인터넷에, 기술과 법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교수로 재직할 당시 레식의 초점은 헌법 해석이 시대에 따라 왜 달라지고, 그것이 왜 정당한 지 입증하는 데 있었다. 예를 들어, 대법원의 판결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전이나 혹은 최근 판결 중 어느 한 쪽이 옳고 틀린 것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상이 변화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법도 그러한 ‘새로운 상식’에 맞게 바뀌어야 하는 것 뿐이다. 레식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 변화에 맞게 법률의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려 했다.

레식이 이러한 그의 법률적, 정치적 견해를 사이버 공간에 적용하게 된 건 미국의 언론인 줄리안 디벨이 쓴 ‘사이버 공간에서의 강간’이란 글을 접한 후다. 제록스의 팔로 알토 연구소에서 운영하던 ‘람브다무‘란 온라인게임에서 한 익명의 이용자가 다른 이용자를 폭력적 언어와 그래픽 조작을 통해 강간한 사건에 대한 서술이었는데, 레식은 이 글을 읽은 후 사이버 공간에서 소프트웨어 코드가 갖는 정치적 역할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됐다.

레식은 전자혁신재단(EFF)과 같은 인터넷 영역의 주요 시민 단체를 공동 설립한 존 페리 발로우나 ‘제3자의 물결’ 등을 쓴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 같은 이와는 달리, 인터넷이 개인에게 기존 권력 구조를 넘어선 전에 없던 자유를 준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코드, 그리고 사이버 공간에 대한 다른 법률들’이란 기념비적인 책에서 규범, 법, 시장, 그리고 기술이 사이버 공간에서 개인이 갖는 권익의 범위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레식이 보기에 사이버 공간은 자유롭기 위해서 싸워서 얻은 만큼은 자유로웠다. 레식이 사이버 공간의 법률 문제에 관심을 더 갖게 됨에 따라 그는 1997년 시카고대에서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던 하버드대 로스쿨로 자리를 옮겨, 버크만센터를 무대로 2000년까지 활동했고, 2000년부터 2008년까지는 스탠포드대학에 인터넷과 법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2008년에 다시 하버드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레식은 학문 활동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주장한 헌법의 새로운 해석을 실험하기 위해 현장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98년에 개정된 저작권법의 헌법적 타당성을 묻는 역사적인 엘드레드 대 애쉬크로프트 재판에 법률 자문으로 참여했다. 레식은 보수적 대법원 재판관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재판에서 졌고, 이것이 레식에게 법원에 의지한 정치적 변화의 한계를 체감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또한 레식은 이 재판 진행 과정에서 저작권 관련 정책 결정의 부패가 가져오는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법률 용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건 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이며, 궁극적으로 문화의 문제다. 대법원의 해석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시민들의 행동이 필요한 문제다. 그 뒤 레식의 활동은 법학자로서의 틀을 벗어나게 된다.

레식은 시민들이 실제로 움직이게 하려면 말만으론 부족하고 대안이 가능하단 걸 보여줘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실제 대안을 경험해봤을 때에만 이전에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믿던 현실의 모순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판단했다. 사실, 그 자신 역시 영국 케임브리지에 유학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어릴 때부터 굳게 지켜왔던 ‘믿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를 위해 레식은 2001년에 그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MIT의 할 애벌슨 교수 등이 주축이 돼 설립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재단의 발전에 처음부터 깊숙이 간여했고, 현재까지 이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재단은 이후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저작물의 저작권 보호 정도를 설정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를 보급해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공유의 가치를 일깨웠고, CCL은 위키백과 등에 채택되면서 인터넷 생태계를 지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됐다. 국내에서도 2005년 3월 한국정보법학회의 프로젝트로 시작돼 2009년 1월 사단법인화한 크레이이티브 커먼즈 코리아가 CCL을 보급하고, 관련 활동을 활발히 계속하고 있다.

▲레식과 작고한 아론 슈와츠(당시 16세). Rich Gibson 사진. CC BY.

디지털 혁명이 현재 진행형이고, 새로운 기술의 접근과 활용에 관한 제도적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이상, 레식의 디지털 개혁가로서의 오디세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3년 1월13일 자살로 사망한, 지식 공유 운동을 위해 애썼던 해커 아론 슈와츠의 죽음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디지털 저항 운동의 화력이 강해진 만큼 이에 비례해 통제의 노력 역시 강해지고 있다. 레식은 이러한 제도권의 모순의 뿌리는 의회의 부패에 있다고 본다. 레식의 초기 학문적 관심이 헌법의 재해석을 통해 정치적 의식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면, 200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초점은 의회 개혁이란 정치적 변화를 통한 정책적 변화에 맞춰져 있다. 현재도 그는 맵라이트와 같은 관련 시민단체의 이사진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개혁을 지속하고 있다.

레식의 생애가 자칭 IT 강국에 주는 시사점

인터넷 실명제부터 게임셧다운제에 이르기까지 각종 인터넷 규제 법안은 한국 국민의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 사회적 비용이 돼 왔다. 그럼에도 한국은 아직 인터넷 제도를 둘러싼 제도적 전쟁이 본격화되지 않았다. 아직은 정부의 시장에 대한 무리한 간섭을 제한할 수 있는 힘이 기업과 시민 사회에 부족하다. 이용자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기업과 온라인 커뮤니티 간 연합 구도는 아직 느슨한 수준에 불과하고, 저작권법을 비롯한 자유롭고 공정한 인터넷을 위한 제도적 기반에 대한 논의는 다수의 시민에겐 아직 난해하고 복잡하다.

비록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시민이 1인 1표를 갖고 있지만, 정치인은, 의회는, 정당은, 대통령은, 1인 1표가 아닌, 시민의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행동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인터넷 정책 영역의 견제와 균형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한국은 IT 강국이고, 인터넷 강국이라 하지만, 그것은 인터넷 다운로드 스피드를 말하는 것이고, 인터넷기업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인터넷 이용자의 권익 보호 측면에서는,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용자, 인터넷 기업, 온라인 커뮤니티 간의 정치적 연대 측면에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그 점에서 개혁가로서 레식의 생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안녕하지 못한 공공 인프라는 철도와 의료 산업뿐이겠는가. 통신망과 인터넷 산업은 그 동안 참으로 안녕했는가.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규제가 사회적 검증 없이 양산되고 묵인되는 가운데, 우리 인터넷 환경은 빠르기만 하되 자유롭지 못하게 됐고, 개발자와 이용자의 권익이 보장되지 못한 인터넷 산업 생태계는 콘텐츠와 소프트웨어는 빈 깡통이 돼 버렸다. 문제의 원인은 한국 국민성도, 민족성도 아니고, 잘못된 정책과 정치다. 즉 인간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다. 시민이, 이용자가 이것이 잘못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들을 대신하겠는가. 자유롭고 공정한 인터넷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인터넷 기업과 온라인 커뮤니티들간의 공동 전선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건 우리의 권리인 동시에 책임이다. 자유는 권리를 누릴 때뿐만이 아니라 그 책임을 다할 때 더 강해진다.

물론, 헌법의 재해석에서 정치적 개혁까지 확장해온 레식의 학문적, 정치적 활동의 발자취가 우리가 가야 할 길 그 자체는 아니다. 미국 인터넷 정책 영역에선 디지털 권리 단체들이 ‘자유로웠던 인터넷’을 기억하며 그 인터넷을 지키기 위해서 참여할 것을 촉구하지만, 각종 규제에 멍든 우리 인터넷 환경의 ‘자유로웠던 인터넷’은 언제였는 지 모르겠다. 그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통제의 위협을 걷어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통제의 멍에를 해체하고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정부가 컨트롤 타워에서 플랫폼으로 바뀌어야 하고 창업 강요, 포탈 규제, 한국의 스티브 잡스 찾기를 넘어서 제도적 개혁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정치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 만큼 다른 정치적 전략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달라도, 정치적 개혁의 본질은 같다. 링컨에게 있었고, 레식이 찾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고결함만으로는 부족하며,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끝없는 학습, 대화와 타협, 양보와 절충이다. 인터넷 기술 자체가 진화하듯, 인터넷 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방식과 사상도 같이 진화해 나가야 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공정 경쟁 등 오늘날 인터넷 산업에 기반이 된 법률이 통과되고 강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와 같은 개혁 시대(The Progressive Era)가 꽃을 피운 데에는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부터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까지 굵직굵직한 정치적 지도자의 활약한 몫이 컸다. 새 술에 새 부대가 필요하듯, 새로운 인터넷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 그리고 실천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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