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를 직접 표출하는 시대.

가 +
가 -



“저는 지구 온난화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하고 심각한 이슈인데요.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 아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무엇을 할 겁니까?”



7 월 23일에 열렸던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의 한 장면이다. 이날 토론회는 특별히 유권자들이 직접 만든 동영상 질문을 보고 후보들이 직접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동영상은 모두 30초 남짓. 토론회를 공동 주관한 유튜브는 3천개가 넘는 동영상 가운데 39개를 골라냈다. 눈사람 인형의 질문에 답변한 사람은 데니스 쿠치니 하원의원이었다.


“아, 먼저 전쟁과 지구 온난화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석유 때문에 벌어지는 전쟁을 이야기하다 보면 에너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석유와 석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햇볕과 바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눈사람이 녹지 않을 겁니다.”


반전주의자인 쿠치니는 화제를 은근슬쩍 이라크 전쟁으로 돌렸다. 언뜻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핵심은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려면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재치있는 질문에 재치있는 대답이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토론회가 쇼 프로그램보다 재미있다.


이날 토론회는 정치 이벤트를 흥미진진한 쇼 프로그램으로 바꿔놓았다. 질문은 10초. 답변은 30초. 기상천외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후보들이 폭소를 터뜨리거나 우물쭈물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다. 능수능란하게 받아넘기는 후보들이 있는가 하면 뻔한 답변을 늘어놓는 후보도 있었다.


눈사람 다음으로는 유방암에 걸린 환자가 나왔다. 그는 가발을 벗고 듬성듬성 몇 가락 남지 않은 머리칼을 드러내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면 저는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싸게 또는 공짜로 약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은 배럭 오바마 상원의원이었다. 미국에는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4500만명이나 된다. 사회자는 이 사실을 지적한 다음 오바마에게 물었다. “당신이 내놓은 공약으로는 이들 모두에게 보험 혜택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죠?” 오바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답변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 같은 분은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보험에 들기 싫어 안 드는 게 아니라 못 드는 거죠. 저희 어머니도 암에 걸려 돌아가셨는데요. 병원비 걱정으로 마지막 몇 달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오바마는 제약회사와 보험회사들에 화살을 돌렸다. “그들이 지난 10년 동안 로비에 쏟아부은 돈이 10억달러는 될 겁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우리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그들이 정부 정책을 쥐고 흔들지 못하도록 원칙과 소신을 가진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한 유권자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부시가 4년, 아들 부시가 8년, 그리고 남편 클린턴이 4년, 그리고 이제는 부인 클린턴이 나왔습니다. 부시 집안에서 벌써 세 번이나 대통령을 했습니다. 당신을 뽑으면 다시 클린턴 집안이 집권을 하게 되는데 도대체 두 집안이 20년 넘게 백악관을 번갈아 가면서 차지해도 되는 겁니까.”


힐러리는 한 마디로 가볍게 받아 넘겼다. “글쎄요. 2000년에 부시를 뽑았던 게 문제였던 것 같은데요.” 방청석에서는 다시 폭소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운 좋게도 제 남편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게 장점이지 단점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장점을 높이 평가해줄 걸로 믿습니다.”


정책 대결이 아니라 인상 비평에 그칠 수도.


지지율에서 가장 앞선 힐러리는 여러 차례 공격 대상이 됐다. 한 유권자는 “언론에서는 당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지만 정작 당신은 여성이 아닌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힐러리는 “여성이 아닌 다른 성으로 출마할 방법이 없었다”고 받아넘겼다. 당신이 여성의 권익을 얼마나 대변하느냐는 질문이었지만 힐러리는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나갔다.


에드워즈 상원의원은 “흑인이라서 오바마가 싫다거나 여자라서 힐러리에게 투표할 수 없다는 유권자라면 그들의 표는 거절하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박수 소리가 잠잠해지자 그는 자신이 여성들을 위한 공약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늘어놓았다. 여성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최저임금을 시간당 9.5달러로 올리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동성연애자 커플이 나와 “우리들 결혼을 합법화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고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해 볼 생각 없느냐”거나 “아이들 성교육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나이는 언제인가” 등의 흥밋거리 질문도 쏟아졌다. 에드워즈 상원의원은 엉뚱한 답변을 하다가 사회자로부터 재제를 당하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질문도 많았다.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한 여성은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더 죽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오바마는 “언제 이라크에서 나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라크에 들어가지 전에 물었어야 했다”면서 한때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표결을 했던 힐러리를 공격했다.


이날 토론회는 전체적으로 참신한 질문이 많았지만 답변은 식상했다. 후보들은 우스갯소리로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상대 후보 약점을 공격하는 등 질문의 핵심을 피해갔다. ‘LA타임즈’는 “동네 반상회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정책 대결이 아니라 단순한 인상 비평으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정치인들이 유튜브로 몰려가는 이유.


그러나 유튜브의 영향력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바야흐로 유권자들이 여론의 주도권을 쥐게 됐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즈는 “대선 후보들이 유튜브로 몰려가는 것은 과거에 이른 아침 공장 앞에서 출근길 근로자들을 기다렸던 것과 같은 이유”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출연 후보가 너무 많았고 답변 시간이 충분치 않았던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후속 질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배너티페어’는 “대선판이 갈수록 코미디 단막극을 닮아간다”고 비난했고 독일의 ‘슈피겔’은 “이번 토론회의 주인공은 유튜브였다”고 평가했다.


이번 토론회의 흥행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번 토론회를 앞두고 유튜브에는 3천개가 넘는 동영상이 올라왔는데 대부분 조회 수가 5천에서 많게는 5만건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 더하면 1천만 건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는 이야기다. 토론회 중계 동영상 역시 수십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민주당에 이어 공화당도 유튜브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고 본격적인 대선 궤도에 접어들면 유튜브의 영향력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는 이미 인종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조지 앨런 상원의원 등을 낙마시킨 전례도 있다. 꾸벅꾸벅 조는 장면이 유튜브에 올라 망신살이 뻗치는 경우는 이제 다반사다.


유권자들은 그동안 방청객의 자리에 머물러 구경만 해야 했지만 이제는 정치인들에게 직접 질문을 하고 조롱을 하거나 드러내놓고 비난을 할 수도 있게 됐다. 캠코더와 인터넷에 연결된 PC만 있으면 누구라도 수천만명의 시청자들과 직접 만날 수 있게 됐다. 누군가가 민의를 대변해 주지 않아도 직접 표출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우리 아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는 눈사람의 동영상은 지구 온난화에 안일한 태도를 보여 왔던 정치인들의 답변을 궁색하게 만들었다. “제때 치료받을 수 있었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유방암 환자의 동영상은 정치인들의 장밋빛 공약보다 훨씬 더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유권자들이 여론 형성에 주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면 정치가 다분히 정치적인 영역을 벗어나 일상의 영역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것도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외 당하는 소수를 무시하기 어렵게 될 것이고 기득권 계층과 타협도 더 어려워 질 것이다. 정치인들은 좀 더 보편적인 정의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민의를 직접 표출하는 시대.


우리나라에서도 대선 후보들이 잇따라 판도라TV 등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열띤 구애를 펼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미 UCC 동영상 토론회를 한 차례 치른 바 있고 대통합민주신당도 비슷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 미국과 비교하면 다분히 요식적인 이벤트에 그쳤고 유권자들의 참여가 부진한 편이지만 일단 시도 자체에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가뜩이나 이번 대선은 투표 연령이 19세로 낮아지는 첫 번째 선거다. 새로 편입되는 유권자들은 60만명 정도로 전체 유권자의 1.7% 밖에 안 되지만 선거의 판세를 뒤흔들 정도는 된다. 정치권이 UCC 동영상에 비상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도 이들 젊은 유권자들을 사로잡겠다는 전략에서다.


보수적 성향의 한나라당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상대적으로 통합민주신당 후보들은 활동이 굼뜬 편이다. 지난해 상반기 이후 정당 웹사이트 점유율이나 트래픽을 살펴보면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다.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박 전 대표는 개인 홈페이지와 팬클럽 홈페이지, 미니 홈피 등에서 충성도와 열의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박 전 대표도 “요즘은 UCC 때문에 어항 속 금붕어가 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온라인을 통한 이미지 개선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된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박 전 대표 못지 않게 적극적이다.


열린정책연구원 정진우 연구원은 “지난 대선 이후 보수 세력의 반격이 시작됐고 사이버 공간이 진보독점에서 세력균형의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대선에서 노사모를 비롯해 서프라이즈, 오마이뉴스 등 이른바 진보성향의 온라인 매체들이 여론을 주도했다면 최근에는 뉴라이트닷컴이나 프리존 등의 보수주의 허브 사이트들의 약진이 돋보인다.


온라인의 정치적 환경이 이슈 중심에서 퍼스낼리티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지역주의 혁파와 정치개혁 이슈로 출발했던 노사모와 달리 박사모와 명박사랑 등은 철저하게 후보 중심으로 조직화되고 있다”는 것. 아직까지 확실한 후보를 내지 못한 통합민주신당의 위기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통합민주신당에서는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후보가 아직 없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장관 등이 판도라TV와 디씨인사이드 등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홍보 자료가 대부분이고 딱히 눈길을 끄는 콘텐츠는 없다. 유권자들의 참여도 아직은 부진한 상황이다.


아직 캠코더 보급률이 높지 않고 자기 표현에 서투른 문화적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후보들의 정책과 노선에 차이가 없고 정치 쟁점이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은 탓도 있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규제를 지적한다. 판도라TV의 대선 채널은 후보 캠프에서만 동영상을 올릴 수 있도록 돼 있다. 동영상을 옮겨갈 수도 없고 조회 수나 랭킹도 확인할 수 없다.


사전선거운동을 규제하는 선거법도 걸림돌이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단순한 의견 표명은 인정하되 이를 반복해서 게재하는 것은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유권자들은 간단한 댓글 하나도 주저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선거를 주제로 UCC 동영상을 제작해 배포한다는 건 아직까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월간 ‘미디어 미래’ 9월호 원고.

네티즌의견(총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