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양성에 젖줄 대는 품앗이 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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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미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1년 반만에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아 사망했다. 그의 나이 23세때였다. 지난 2월6일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산재 인정 판결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다. 김태윤 감독이 연출했고, 배우 박철민, 김규리, 윤유선 씨가 출연했다. 어쩌면 세상에 나오지도 못 했을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극장에 걸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크라우드펀딩’ 덕분이다.

Another Famil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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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또 하나의 약속’은 2012년 ‘또 하나의 가족’이란 이름으로 제작 펀딩을 받았다. (출처: 굿펀딩)

크라우드 펀딩이란 군중을 뜻하는 ‘크라우드’와 투자를 말하는 ‘펀딩’이 결합한 말이다. 벌이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돈이 없는 이가 군중을 대상으로 투자금을 모집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대형 투자업체나 은행 대신 시민의 쌈짓돈이 길동무가 된다.

텀블벅굿펀딩, 펀딩21 등 국내 대표적인 크라우드펀딩 서비스에서 영화 모금 사례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크라우드펀딩 서비스가 국내 영화판에 지류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김화범 인디스토리 제작기획팀장은 ” 그동안 개인 후원과 같은 독립영화 후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크라우드펀딩이 생기면서 공개된 온라인 공간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하게 됐다”라며  “제작자에게는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는 다른 플랫폼이 생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영화판 다양성의 새 ‘젖줄’

크라우드펀딩을 시도한 영화가 얼마나 있는지 따져보자. 2012년 국내 크라우드펀딩 업체 텀블벅에서 진행된 영화 관련 모금 건수는 총 49건. 이 중 29편이 실제 영화로 제작됐다. 2013년에는 모금에 도전한 영화가 총 82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고, 실제 펀딩에 성공한 영화는 40편이었다. 텀블벅에서 영화 프로젝트에만 모인 금액도 2012년 1억5379만8853원을 기록했다가 2013년 2억7407만6354원으로 2배 가까이 커졌다.

크라우드펀딩이 담보하는 국내 영화의 다양성도 중요하게 볼 일이다. 제주 4․3 항쟁을 배경으로 한 극영화 ‘지슬’이 대표 사례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 두 번의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실험영화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등 장르와 소재도 다채롭다. 사회 주류의 시선이 덮어둔 소재가 크라우드펀딩 생태계로 흘러드는 셈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다양한 영화를 접할 권리가 있다. 대기업과 대형 기획사 위주로 흘러가는 국내 영화 상태계에서 크라우드펀딩이 만들어가는 영화 생태계의 의미가 남다르다.

지난 2013년 크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총 83편이다. 텀블벅에서만 2013년 한해 40편의 영화가 크라우드 펀딩에 성공했다. 굿펀딩에서는 26편, 펀딩21에서는 17편의 영화가 성공했다. 펀딩 프로젝트로 등록되고, 실패한 영화 갯수를 더하면 숫자는 이보다 늘어난다. 다음은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제작된 주요 영화들이다.

  • ‘또 하나의 약속’, 김태윤, 1억1936만5천원, 2071명, 굿펀딩
  • ‘모래가 흐르는 강’, 지율, 3210만5천원, 414명, 텀블벅
  • ‘산다2013’, 김미례, 2160만원, 225명, 텀블벅
  • ‘그리고 싶은 것‘, 권효, 2092만5천원, 475명, 펀딩21
  • ‘지슬’, 오멸, 1300만원, 264명, 텀블벅
  • ‘천안함 프로젝트’, 백승우,  961만원, 224명, 펀딩21
  • ‘어머니’, 태준식, 822만7천원, 169명, 텀블벅
  •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김곡·김선, 730만1천원, 98명, 텀블벅

제작보다 배급에 집중

영화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영화를 상영할 곳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한국영화 한 편을 극장에 배급하는 데는 보통 수억원이 든다. 이른바 ‘독립영화’는 보통 3~4천만원 정도가 필요한데,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개봉에 실패하는 사례가 적잖다. 영화 제작은 ‘몸으로 때워’ 어찌어찌 완성하더라도 배급에 필요한 돈은 ‘몸으로 때울’ 수 없는 탓이다. 크라우드펀딩 서비스에서 영화 제작 후원보다 개봉 후원을 바라는 프로젝트가 더 자주 눈에 띄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화범 인디스토리 제작기획팀장은 “제작 후원은 완성이 될지 안 될지 후원자가 확신을 하기 어렵지만, 개봉 후원은 이미 만들어진 영화가 있기 때문에 믿고 안정적으로 투자를 한다”라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 장르가 강세라는 점도 크라우드펀딩이 가꾸어 가는 영화 생태계의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사이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설명했다. 극영화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어렵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는 상대적으로 사회 문제나 이슈 등 소재와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염재승 텀블벅 대표는 “크라우드펀딩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프로젝트가 대중의 반응이 크다”라며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가 사회적 이슈를 다룬 경우가 많다”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지속케 하는 응원과 관심은 덤

권효 감독은 2013년 여름 펀딩21에서 후원금 2092만5천원을 모아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싶은 것’을 개봉했다. 크라우드펀딩은 권효 감독에게 영화를 틀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권효 감독이 얻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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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 감독은 “처음엔 아는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모르는 사람들까지 영화에 공감해서 돈을 모아주고 메시지도 남겨준 게 큰 힘이 됐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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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Δ’그리고 싶은 것’에 남긴 메시지들(출처: 펀딩21)

창작자만 관심을 받는 건 아니다. 창작자도 후원자에게 리워드(보상)를 한다. 보상은 엔딩크레딧에 이름 올리기, 시사회 초대, 제작진과 함께하는 촬영지 여행 등 다양하다. 이런 과정은 창작자가 예비 관객과 팬을 얻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크라우드펀딩이 영화 홍보 창구의 역할도 하는 셈이다.

텀블벅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의자가 되는 법‘으로 110명에게 후원을 받은 손경화 감독은 “보상을 하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지만, 110명의 관객이 생겼다”라며 “내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부담감이기도 하지만 동력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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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  손경화 감독에겐 110명의 예비 관객이 생겼다.(출처: 텀블벅)

크라우드펀딩 서비스는 조금씩 덩치를 키우는 모양새다. 텀블벅에서 2012년에 5개이던 1천만원 단위 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2013년 33개로 늘었다. 초기에는 거의 목표금액을 100만원 단위로 잡는 등 실질적으로 돈을 모금한다기보다는 크라우드펀딩 자체에 상징성을 부여하곤 했지만, 점점 실질적인 제작비를 마련하는 수준까지 올라서고 있다. 후원자 또한 초기엔 지인 중심이었지만, 요즘에는 창작자를 모르는 다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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