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인증서 폐지, 이런 식이어야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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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0일 늦은 오후, 퇴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 난데없이 낭보가 날아들었다. 미디어오늘 기사를 보자.

공인인증서가 뭔가. 국내 인터넷 환경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한꺼번에 갉아먹는 공공의 적 아니던가. 공인인증서 스트레스로 빠진 머리카락에 이제야 좀 명복을 빌어줄 수 있으려나 싶었다. 기대감에 냉큼 기사를 눌렀다. 헌데 막상 뚜껑을 따 보니, 어라 이건 아니올시다.

사건은 이렇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도 인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발단은 드라마를 본 중국 본토의 쇼핑객이 국내 e쇼핑몰을 방문하면서 시작됐단다. ‘별그대’의 본고장인 한국에서 쇼핑하면, 나도 김수현이나 전지현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중국 쇼핑객들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바다를 건너 한국의 온라인 쇼핑몰에 도착한 중국인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결제를 하려면 공인인증서가 있어야 된다는데, 중국인들이 공인인증서 따위가 뭔지 알 턱이 있었겠는가.

이들은 우리말로 뜨는 팝업창을 보고, 대충 ‘확인’ 단추를 눌렀을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잊힌 구형 ‘액티브X’라는 사실은 모르는 채.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다음이 문제였다. 공인인증서는 한국 은행에서 발급받아야 하는 복잡하고 번거로운 보안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인 온라인 쇼핑객은 다시 인터넷을 서쪽으로 건너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소식을 접한 박근혜 대통령은 3월20일 열린 규제개혁 장관회의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요구하고 있는 공인인증서가 국내 쇼핑몰의 해외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 규제정책의 문제점을 친히 지적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적에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공인인증서를 가리켜 “암적인 규제”라며 “절대다수의 국민이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가 폐지되길 바란다”라고 거들었단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와 400년 묵은 외계인 덕분에 공인인증서 폐지 염원이 실현된 꼴이다.

그러나 이번 일 때문에 공인인증서가 폐지되는 것은 아쉽고도 석연찮은 일이다. 공인인증서나 액티브X를 걷어내는 일은 정부와 국민이 해야 하는 일이다. 제대로 여론을 수렴하고 절차에 따라 제도를 개선하는 게 올바른 ‘과정’ 아닌가. 그동안 모르쇠와 우격다짐식 반대로 일관하던 행정당국이 박근혜 대통령 말 한마디에, 그것도 어느 별인지도 모를 먼 곳에서 지구로 떨어진 외계인 덕분에 바뀐다는 건 우습지 않은가. 십수년 동안 공인인증서 제도를 개혁하라며 목이 터져라 외친 시민과 언론의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중국 쇼핑객의 불편이 국민들의 오랜 요구보다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건가.

정부의 치우친 경제논리에도 적잖이 불만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공인인증서가 좀 불편해도 어쩔 수 없이 국내에서 쇼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중국인 쇼핑객이 국내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사지 못하는 것은 예방해야 할 경제손실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렇다면, 국내 인터넷 환경을 비표준으로 내팽개쳐 둔 대가로 감수한 손실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 걸까. 외계인도 철폐할 수 있는 그 허약한 규제를 그동안 떠안고 살아온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호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주의는 의사결정 과정의 정당성을 담보로 움직인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야 어찌 돼도 상관없다는 식이라면 문제가 있다. 절차적 정당성보다 결과적 당위성에 더 무게를 두는 사회에서 국민은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과 지적엔 귀를 닫고 각료와 초대받은 소수 앞에서 깜짝 이벤트를 벌이듯 정책을 결정하는 대통령 앞에서 ‘예측’과 ‘민주적 절차’란 얼마나 허망한 단어인가. ‘끝장토론’이 아닌 ‘깜짝토론’이 보여준 씁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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