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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째깍’ 대신 ‘더듬더듬’…브래들리 타임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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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1] 어두컴컴한 영화관. 팝콘과 함께 먹은 콜라는 늘 말썽을 일으킨다. 끝날 때가 다 된 것 같기도 한데, 조금만 더 참는게 좋을까 아니면 지금 나갔다올까.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지? 휴대폰을 켜면 너무 눈이 부실텐데…. 볼까 말까. 나갈까 말까. 하…하필 내 자리는 한가운데인 거냐.

[상황2] 배가 고프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진다. 점심시간까지 몇 분이나 남았을까. 음성손목시계를 차고 있지만 누르고 싶지 않다. “↗오전↘열↗한↗시↘사→십→삼↗ 분↘” 소리가 나면 아마 다들 날 쳐다볼 거다. 보이지는 않아도 다 느낄 수 있다.

[상황3] 불타는 금요일 밤, 절친이 만들어준 소개팅 자리. 그런데 저 남자, 아무리 봐도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몇 시지? 적당한 때 일어나야 마녀사냥 본방사수를 놓치지 않을 텐데! 지루해하는 모습을 들킬까봐 휴대폰을 꺼내 보기가 미안하다. 대체 이 카페에는 왜 시계가 없는 거야!

[상황4] 불의의 사고로 친오빠가 시력을 잃었다. 시계 마니아인 오빠의 서랍장에 멋드러지게 진열된 손목시계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 우리 오빠는 시간을 어떻게 보게 될까? 인터넷에서 시각장애인용 손목시계를 찾아봤다. 아… 평소 오빠였다면 이런 스타일의 시계는 절대 쓰려 하지 않았을 텐데.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여지지 않는 건 아닌데. 오빠가 시력을 잃었다고 해서 스타일까지 잃게 하고 싶진 않다. 오빠를 위한 멋진 시계 어디 없을까.

우리는 시계를 ‘본다’고 말합니다. 영어로도 시계는 ‘와치’입니다. ‘보다’라는 동사 ‘와치(watch)’와 발음과 철자가 똑같지요. 하지만 시계를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볼’ 수 없는 상황도 많지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을 ‘만져’ 볼 수는 없는 걸까요?

이원(EONE)이라는 스타트업은 누구나 만져 볼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간지나게 말이죠. 이 시계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시계입니다. 그래서 ‘와치’가 아니라 ‘타임피스’라고 부릅니다.

이원은 타임피스를 개발하면서 아름다운 ‘디자인’에 집중했습니다. 타임피스 개발에 도움을 준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시각장애인임을 드러내는 모양의 시계는 갖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계를 굳이 ‘시각장애인용’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원은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누구나 쓸 수 있는 ‘모두의 시계’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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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 타임피스는 동그랗게 깎은 티타늄으로 시계알을 만들었습니다. 길고 짧은 바늘은 작은 구슬 2개가 대신했고요. 옆면 구슬은 ‘시’를 앞면 구슬은 ‘분’을 나타냅니다. 구슬을 세게 밀면 원을 따라 빙그르 움직이지만 살짝 흔들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자석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시계 눈금이 시원시원하게 그려져서 그런 걸까요. 눈을 감고 시계 테두리를 따라가면서 만져보니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었습니다.

김형수 이원 대표는 보스톤글러브와의 인터뷰에서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했습니다. MBA 수업 중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지금 몇 시야?’라고 물어보았답니다. 그 친구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음성 지원이 되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기 싫어 조용히 물어본 것이지요. 김형수 대표는 ‘상황2’와 비슷한 일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는 디자이너, 엔지니어와 함께 팀을 꾸리고 지난해 7월 크라우드펀딩 서비스 킥스타터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이원이 정한 목표 투자금액은 4만달러, 우리돈 4600여만원이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6시간 만에 목표 금액을 달성했고, 한 달 뒤 최종 투자금액 6억원(59만달러)을 거뜬히 넘어섰습니다.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킥스타터에서 128달러 이상을 기부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전달됐고, 지금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오는 족족 동이 나고 있습니다. 미국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예약판매를 받고 있습니다. 미리 예약하면 20달러를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지역을 담당하는 이원코리아 홈페이지에서는 28만9천원에 판매됩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품절입니다.

지금 당장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만나보고 싶다면 홍대 근처에 위치한 KT&G 상상마당 1층 디자인스퀘어로 가면 됩니다. 4월13일까지 ‘시간을 만지다’라는 이름으로 브래들리 타임피스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홍대 근처에서 ‘벚꽃엔딩’을 즐기는 청춘들은 어쩌면 벌써 구경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을 만지다’ 브래들리 타임피스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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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봄 밤. 홍대 인근 KT&G 상상마당입니다. 브래들리 타임피스 전시회장은 입구에서 바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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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아뇨! 보고, 만져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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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과 가죽소재 끈을 단 타임피스 3종. 시각이 제각각이네요.

진열된 타임피스마다 시간이 제각각입니다. 고장이 난 걸까요, 건전지가 없는 걸까요? 이원코리아에 물어보니 전시장을 찾는 분들이 맘껏 만져볼 수 있도록 시간을 맞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 구슬이 고정돼 있지 않고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면 그건 고장난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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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 타임피스’는 패럴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브래들리 스나이더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시력을 잃은 뒤에도 꿈을 잃지 않은 브래들리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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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이 얇은 여성분에겐 조금 큰 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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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앞면, 뒷면 그리고 옆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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