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 조약과 장애인의 ‘책 읽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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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가 진행될수록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무심코 혹은 알면서도 지나쳤을지 모르는 저작권에 대한 무관심이 저작권자 뿐 아니라 정작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장애인들까지 괴롭히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토론회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6월13일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마라케시 조약과 장애인 정보 접근권 보장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이 토론회는 이른바 ‘마라케시 조약’을 국내에 빨리 도입하도록 촉구하고자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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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케시 조약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마라케시 조약은 지난해 6월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린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채택한 세계적인 조약입니다. 시각장애인, 더 나아가 책을 읽기 어려운 독서장애인에게 콘텐츠를 다른 형태로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작권이라고 하면 저작자의 허락 없이 복제, 배포는 물론이고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도 용인되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점차 강화되고 있는 저작권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마라케시 조약입니다.

마라케시 조약의 핵심은 이겁니다. 책을 읽기 어려운 이들이 원래 활자 형태의 콘텐츠를 다른 형태로 바꾸는 데는 저작권법 적용에 예외를 두자는 겁니다. 물론 세부 내용들은 있지만 조약 자체가 결국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예외를 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아주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발제자로 나선 이일호 연구원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일호 연구원은 독일 뮌헨대학에서 법과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 역시 시각장애인이기도 합니다.

“마라케시 조약은 정부 예산이나 국가 지원 등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시각장애인이 정보를 원활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이 조약은 세 가지 관점에서 최초의 조약입니다. 첫 번째는 86년 베른조약 이후 나온 모든 조약들이 저작자의 권리를 부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마라케시 조약은 저작권 제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장애인권과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인권을 이야기하는 최초의 조약입니다. 저작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을 다루면서 저작권과 인권이 만나는 최초의 사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간의 저작권법 조약들이 다소 광범위했던 것과 비교해서 장애인, 그 중에서도 시각장애인, 그리고 독서장애를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어문에 대한 내용을 전문으로 다루는 아주 구체적인 조약이라는 점도 처음입니다.”

그 동안 저작권과 관련된 조약은 대부분 서방의 부유한 국가를 중심으로 체결돼 왔습니다. 권리자의 이익을 더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요. 하지만 마라케시 조약은 반대로 제3세계나 신흥 국가들을 중심으로 제기됐다고 합니다. 처음에 반대하던 미국과 유럽연합도 결국은 가장 빨리 합의하고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저작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인권은 그리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토론회에 가기 전에는 우리가 늘 마주하는 그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장애인들에게 이렇게까지 큰 걸림돌이 될지 잘 몰랐습니다. 연세대학교 작업치료학과의 김종배 교수가 그 부분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저는 시각장애는 아니고 지체 장애인입니다. 5번 경추가 손상돼 하반신이 마비됐고, 팔을 일부 움직입니다. 손가락도 못 씁니다. 책을 꺼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책장을 넘기는 것도 어렵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게 정보에 대한 제한이 됐습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의 이상묵 교수를 만났는데 그 분은 4번 경추가 손상돼서 아예 팔도 못 씁니다. 그런데 저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언어, 곧 국가별 문화의 차이입니다. 영어를 얼마나 잘 하느냐가 정보 접근의 차이를 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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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 교수가 언급한 이상묵 교수는 영어에 익숙하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마존에서 책을 바로 사서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존은 전자책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애인들이 킨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도구들도 있고, 스마트폰도 여러가지 제어 장치들이 있어서 콘텐츠를 접하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반면 아마존 대신 국내 온라인서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김종배 교수 입장에서는 국내 전자책의 콘텐츠가 너무 없다는 겁니다.

직접 출판사 관계자들도 만나봤답니다. 텍스트 파일이 없어서, 전자책을 만들기 어려워서 전자책을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파일이 유출되면 출판사의 수익에 지대한 영향이 있기 때문에 잘 팔릴만한 책은 전자책으로 내지 못하고, 반대로 잘 읽히지 않는 책도 노력에 비해 수익이 안 나기 때문에 출판을 꺼린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출판업계의 입장을 일부 전달한 커뮤니케이션북스의 박영률 대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사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책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출판사가 디지털판으로 파일을 갖고 있습니다. 오디오북이든, 전자책이든, 또 다른 형태의 것이든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꺼리는 건 유출 때문입니다. 팔리는 책 위주로 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는 대부분 판타지, 로맨스에 집중돼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신간이나 학술서 등의 책들은 안 나옵니다. 이익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독서 장애인들에게 책을 공급할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에 대한 장치는 사실 뭐가 됐든 뚫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기술적인 것보다도 교육이나 법적 문제로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저작권자나 출판사 중에서도 독서 장애인들에 대한 지원에 더 적극적인 이들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자격을 주고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저작권자들에게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예든 비용이든 별도의 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칭찬과 명예가 따라야 합니다. 유통에 대해서는 좀 더 안전한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박영률 대표의 설명입니다. 업계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바로 저작권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디지털 형태의 콘텐츠가 장애인이 아닌 이들에게 넘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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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와 장애인들 사이에 그들에게 맞는 저작물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습니다. 문제는 전자책이든, 오디오북이든 그 파일이 당사자가 아닌 저같은 사람들에게 전해질까 하는 걱정입니다. 제 3의 우려가 있는 것이지요. 물론 점자나 데이지 같은 형태의 저작물은 퍼지기 어렵겠지만 오디오북이나 전자책은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못 만들어서 안 나오는 게 아니라 퍼질까봐 못 낸다는 말에 저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콘텐츠에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콘텐츠를 무심코 혹은 의도적으로 인터넷에 의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공짜로 떠다니는 자료와 비용을 지불하는 자료 사이에서 고민을 안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동안은 저작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나아가 그 자료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제공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겁니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래서 이 콘텐츠를 어떻게 제공해야 안전할 것이냐는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박영률 대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혼재하는 콘텐츠 유통 방식, 즉 직거래를 언급했고, 김영일 국립장애인도서관장은 신뢰할 수 있는 국가 기관, 도서관 등이 가운데서 철저하게 콘텐츠를 보호할 수 있도록 보증하는 방법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장치 외에도 저작권에 대한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라케시 조약은 아직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최재원 문화체육관광부 문화통상팀장은 실무적인 부분이 더 고민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내 저작권법과 관련해서 검토를 거쳐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장애인복지법 등을 통해 시각장애인 접근권을 해소하는 법 개정이 이뤄져 있습니다. 마라케시 조약에 명시된 내용과 똑같이 현재 법상으로도 저작권이 일부 제한됩니다. 법 개정이나 별도로 부딪히는 부분은 없습니다.

마라케시 조약이 도입된다고 해서 지금의 접근성 문제가 해소될 것이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조약의 통과와 별개로 사회적으로 접근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들이 더 필요합니다. 마라케시 조약이 이를 촉진할 수 있는 장치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마라케시 조약 서명을 앞두고 있습니다. 외교부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상반기 안에 서명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67개 나라가 서명을 했고, 미국은 곧 비준도 할 계획입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의 진행 상황을 보고 비준 시기를 고려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라케시 조약도 낯설지만 이미 법제화돼 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제도도 갖춰졌고, 사회적으로 합의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남은 건 출판사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장애인들도 더 마음 편하게 자료를 요구할 수 있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콘텐츠에 대한 정당한 대가 지불일 겁니다. 장애인 스스로도 주어진 콘텐츠들의 재화로서의 특성을 이해하고 잘못 유포되지 않도록 하는 합의가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장애인과 그들을 위한 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출판사가 아니라, 판매자 입장에서 있는 물건을 팔지 않는 것은 문제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토론 말미에 일반인 참석자가 꺼낸 이야기인데 “음식점에 식사를 하러 가려고 해도 휠체어가 못 들어가 밥을 못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준비된 책이 있는데 포맷이라는 걸림턱이 있어 읽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양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 토론장에 모인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습니다. 현재 독서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고작 전체 책의 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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