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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허점 악용한 수사기관 도·감청 활개

2014.09.12

허술한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이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감시활동을 방조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보통신 사회를 감시하는 세계 시민단체 모임 ‘진보통신연합(APC)’은 9월4일 인터넷거버넌스포럼에서 발표한 ‘2014년 세계정보사회감시 보고서(Global Information Society Watch 2014)’에서 한국의 허술한 감시 규제 체계가 인권 침해를 야기한다고 비판했다. 보고서 가운데 한국 부분은 진보네트워크 장여경 활동가가 작성했다.

국내 수사기관, 지난해 고객정보 957만건 가져가

지난 2013년 KT·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같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 회사(ISP)는 수사기관에 고객 개인정보 957만4659건을 넘겼다. 겹치는 것이 없다고 치면 전체 인구의 5분의1에 달하는 수치다. 장여경 활동가는 이렇게 대규모로 개인정보를 가져가는 것은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여기는 인권침해 행위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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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관이 957만건이 넘는 개인정보를 넘겨받을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장여경 활동가는 수사기관의 도·감청 활동에 제동을 걸어야 할 법 체계가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수사기관이 국민을 감시할 수 있는 길을 많아진 반면, 법 체계는 이런 상황에 대응하지 못해 허점을 노출했다는 분석이다.

허술한 법 규정이 과도한 감시활동 야기해

1993년 제정된 통비법은 수사기관이 도·감청 활동을 하려면 미리 법원에서 영장을 받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감시 대상이 한국인이 아니라면 대통령 승인만 받으면 된다. 또 위급한 상황에는 36시간 동안 아무 허가 없이도 감시활동을 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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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수집을 방조하는 문제도 있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같은 정보가 따로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닐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모두 안다면 그 사람의 일상생활을 모두 파악할 수도 있다. 이처럼 흩어진 정보를 하나로 묶어주는 정보가 메타데이터다. 통신사가 이름, 주민번호, 주소 등 고객정보를 각각 분리하기만 하면 법원 같은 외부 기관의 허가 없이도 수사기관에 제공할 수 있도록 전기통신사업법이 허용했다고 장여경 활동가는 전했다.

수사기관이 손쉽게 통신사 고객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은 과도한 감시로 이어진다. 지난해 12월 철도노조가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을 벌였다. 경찰은 노조원을 상대로 감시활동을 시작했다. 노조원뿐 아니라 노조원 가족의 통신 기록까지 입수했다. 실시간으로 휴대전화 위치를 추적했다. 경찰이 감시한 이 가운데는 10대 학생도 있었다. 경찰은 노조원과 전화통화를 나눈 300여명의 신원도 통신사를 통해 받았다. 경찰은 통신사에게 받은 신원정보를 바탕으로 이들에게 노조원과 관계를 추궁했다.

철도노조와 인권단체는 실시간 위치추적이 감청에 준하는 허가 요건이 필요한데도 형식적인 허가만으로 실행돼 헌법의 영장주의 원칙에 위반된다며 2014년 5월13일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독립 기구 만들어 정보기관 감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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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도 광범위한 도·감청 활동에 제동을 거는 추세다. 국제연합(UN)은 지난해 말 ‘디지털 시대에 사생활권‘ 결의안을 채택하며 온라인에도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감시활동에 대한 답이지만,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법 체계가 수사기관의 광범위한 감시활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여경 활동가는 수사기관의 활동을 감시하는 조직을 새로 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의 감시활동을 감독하려면 꼭 독립 기구를 세워야 합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나 국회는 그동안 감독기관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장여경 활동가는 국제 공조도 필수적이라고 봤다. NSA 사태에서 보이듯, 정보기관의 감시활동은 국경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장여경 활동가는 “각 나라마다 정비관의 비밀 감시활동을 규제할 국게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nuribit@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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