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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어린아이의 것
by 비전 디자이너 | 2010. 01. 08

2010년 1월 6일에 쓴 글 ‘고용 2.0 : 기계가 고용을 삼킨다, 그 전망과 대안’에서  기계화에 이은 디지털화, 특별히 IT의 소셜화에 의해서 나타나는 사회적 변화가 어떻게 고용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 그리고 그와 같은 산업구조의 변동에 따라서 나타나는 위험부담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 그 전망과 대안에서 논하였다.

사실상,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기계화에 이어 디지털화가 고용시장을 저기술노동자 뿐 아니라 전통적 전문가 집단에까지도 직업 평판, 안정성, 연봉수준, 복지혜택 등에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할 때, 그것이 어떠한 ‘새로운 수요’에 대한 집중을 야기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한 마디로 ‘창조성’이라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이노디자인의 김영세 대표가 말한 것과 같은 ‘이매지너’의 시장이 각광을 받을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이 가장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정치평론가로 더 인지도가 더 높은 듯 하지만, 언어학자로 출발한 미국 MIT의 노엄 촘스키교수가 그 답을 이야기했다.

그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 요소로, 그 정의의 근거로, 언어성을 꼽았다. 그리고 그 언어성의 핵심은 개방적 창조성에 있다. 인간이라면 그 출신배경, 성장과정, 인종, 종교, 성별을 막론하고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용은 결코 기계의 암기, 자료, 모방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개방적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창조한다.

그리고 이 창조성이, 이 인간성이, 기계의 수치적 우월성이 모방할 수 없는 인간의 절대적 비교우위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경험경제학’(The Experience Economy)이라는 말이 있다. 경영 컨설턴트인 조셉 파인이 저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 조셉은 어떻게 커피 콩 하나는 몇 센트에 불과하지만 스타벅스 커피는 수 달러에 이르는지, 그 진화과정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준다.

커피 콩 그 원재료 자체는 가치가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공장에 의해서 통에 담겨지고, 종업원에 의해서 서비스되고, 스타벅스라는 새로운 장을 통해 하나의 경험으로 포장되면, 그 부가가치의 증대에 따라서 값어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공업화, 서비스화의 영역에서는 그것은 기술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경험화’라는 단계로 넘어섰을 때부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즉 상상력이 최대의 부가가치의 원천이 되는 사회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21세기 사회다.

(관련 강의를 조셉 파인이 TED에서 한 적이 있고,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는 연사 중 한 명이어서 일전에 번역을 했다. 감사하게도 다른 한 분이 감수를 해주셔서 TEDx서울에 공개됐다. 관련 링크 참조 : http://tedxseoul.com/xe/talks/2128)

정리하자면, 상상력은 기계화·디지털화라는 고용시장의 변동이라는 측면 외에도 다른 면에서 소비시장에서의 서비스화·경험화 수요의 중심축 이동이라는 부분에서 봐도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이 ‘상상력’이 과연 어떤 상상력인가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생각해본 상상력은 첫째, 고용시장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인간의 보편적 특성으로서의 ‘상상력’이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사용력’과 직결된다. 둘째는 소비시장 측면에서 ‘경험의 창조와 관련된 영역’이다.

이 두 가지 논의를 합쳐, 상상력을 공급-수요 두 관점에서 정의해면, 그것은 언어사용력과 같은 보편적 상상력을 경험의 창조와 관련된 영역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렇게 정의해놓고 나면, 우리는 벌써부터 어리둥절해진다. 이유는 우리가 매뉴얼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사용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재료만 주어지는 것은 친절하지도 않고, 페어 게임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학습하는 방식은 매뉴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서, 탁월한 실패를 반복함으로 배우는 방식이었다.

인간의 걸음마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 직립보행이라는 또 다른 특징이라는 그 인간의 특징은 수없는 넘어짐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언어사용이라는 것도 옹알이든지 정해진 발달단계를 거쳐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상상력은 지금 우리가 이전 산업시대의 공장과 닮은 학교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교육하는 것으로 학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자기가 부딪쳐보고 깨지고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실험과 실패와 그 후 재도전을 권장함으로써 발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가 잔존해 있는 곳은 우리 교육 시스템 전체를 통틀어봐도 단 하나 밖에 없다.

그 곳은 ‘유치원’이다. 그 중에서도 자유시간.

아무렇게나 놀고 있는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인 교육을 실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실제로 전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집단이며 동시에 그러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곳인 MIT 미디어랩에서 운영하고 있는 연구소 중에 하나가 ‘평생 유치원‘(Lifelong Kindergarten)이다.

그곳은 필자가 연구소로 소개한 만큼 실제로 유치원이 아니고, 유치원에서 유지했던 그 창조성을 그대로 발현해 디자인, 창조, 학습에 새로운 장을 만들기 위해 운영되는 곳이다. 유치원의 교육적 중요성, 천진발랄한 창조성이 중대하지 않다면, 그러한 별칭의 연구소가 그것도 MIT 미디어랩에서 운영되기는 힘들다.

실제적으로 우리 과학, 수학계의 지난 세기 최고 천재들을 생각해보자.

아인슈타인 이후 최대천재로 불렸던 물리학계의 거성, QED(양자전기역학)을 창시한 리처드 파인만의 국내에 번역된 평전 제목은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요’다. 실제로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 대학원에 진학해 진지한 학문세계에 큰 심적 부담을 느꼈던 파인만은 놀이와 재미로 학문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진지성의 결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진지하되 그것이 무겁지는 않다는 것이다.

가장 천재적인 두뇌를 요구하는 수학 영역 중 하나인 정수론의 대가인 폴 에어디쉬. 국내에 번역된 그의 평전 제목은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이다. 밥보다 섹스보다 수학을 더 좋아해서 하루 4시간 자는 것 이외에는 거의 수학에 몰입했던 수학자의 일생은 사실 하나의 주제로 정리된다. 그에겐, 그냥, 수학이 너무 재미있었다. 다른 어떤 것을 하기보다.

꼭 과학, 수학 같은 천재들이 주목을 받는 소수의 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IT계에 큰 흐름 중 하나였고 이제는 IT가 소셜화되면서 사회적 움직임 중 하나가 되고 있는 ‘오픈소싱’을 생각해보자. 어린아이와 같은 재미와 흥미, 호기심은 동기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리눅스OS의 창시자 리누스 토발즈의 자서전 제목 이름이 ‘리눅스, 그냥 재미로’(Just for Fun)이다. 수년 전에 읽어서 책의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리누스가 책 초입에 인간의 진화단계를 언급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문명사회가 점점 더 풍요를 누리면서 매슬로우의 최상위 단계인 자기실현 단계를 넘어서 인간이 좇고자 하는 것은 ‘재미’라고.

그렇다면 그게 무슨 재미일까? 유흥과 향락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음주가무와도 거리가 멀다. 믿기진 않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지겨워하는 공부라는 게 노예에 의해서 유지되던 경제시대를 살던 아테네의 시민들과 농노들이 경제 시스템을 지탱해주던 르네상스 시대들의 귀족들에게는 그보다 더할 수 없는 재미였다는 것.

즉 그것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것을 밝혀 나가는 재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린아이 같은 사람, 그러한 왕성한 호기심, 순수한 창조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사람이 급격히 변동하는 고용시장의 승자가 될 것이고, 새로운 소비시장의 스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유치원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에 그래서 어미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되느냐 되물었던 랍비와 마찬가지로.

단지 그 재미를 유지하기 위해 3년에 한 번씩 분야를 바꿨던 피터 드러커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경쟁력에 치여서가 아니라, 어떤 한 분야를, 대상을 그냥 재미로 파고 드는 게 필요하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매니아가, 광이, 오타쿠가 될 필요가 있다. 꼭 하드락과 메탈이 아니더라도, 소녀시대와 애프터걸스가 아니더라도, 일본 아니메와 프로그램 코딩이 아닐 지라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것에 제대로 미치는 것이.

그것이 오직 불확실성만이 확실하고, 예측 불가능만이 예측 가능해지는 시대에 생존을 넘어서 행복을 위한 근거있는 투자로 보인다.

한 번 물어보자. 스스로에게.

24시간. 일주일. 365일. 거기에 과연 내가 ‘그냥 재미로’ 하는 일과 관계는 얼마나 될까?

열심히 일한 그대여. 이제는 좀 더 똑똑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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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OCW(공개강의운동) 오거나이저, 공익 NGO 세계화와 빈곤문제 공공인식 프로젝트(GP3) 프로젝트 디렉터, 마이크임팩트 소셜 웹 서비스 기획자, NHN의 네이버 3기 서비스 자문위원으로 일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CCK)와 글로벌 보이스 온라인(GV)의 자원봉사자로도 봉사한다. 쓴 책으로는 '소셜 웹이다'와 '소셜 웹 혁명'이 있고, '드래곤플라이 이펙트'를 번역했다.
5 Responses to "창조는 어린아이의 것"

매뉴를 메뉴로 고쳐주고 싶다.

댓글 안달림 ;;

좋은 글이군요.
다만 뭔가 제한적인 느낌이 드네요. 억압된 느낌이랄까요.

창조라는 것도 일정 틀을 알아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있죠.
그 틀을 넘거나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틀 내에서 안주해버리는 사람도 있죠.

어린아이가 창조성이 높다는 것은 그러한 틀이 정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요.
그 일을 하는 어린아이 입장에서는 그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틀이 있는 어른 입장에서 보
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 또는 기발한 짓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 겠죠.

위에서 약간 제한적인 느낌이 든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이유를 알 듯하네요.
아마도 그 이유는 너무 요즘 추세에 대한 주제가 아닐까 하는점에서 그렇게 느낀 듯하네요.

주입식 반대! 창조성 최고!
약간 이런 시대라고 해야할까요.

이렇게 썼다고 이 글에 반대하진 않습니다.

사람마다 쫓는 가치는 다르겠지만

제 입장에서도 ‘재미’를 제 1의 가치로 설정하여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글에는 충분히 동의하고 있습니다.

괜찮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창조를 하고 살았는데 돈이 안 되니 가족들이 싫어합니다. 돈이 되지 않는 건 가치가 없다는 사회입니다. 재미를 추구 하고 살려면 일단 돈이 많아야 할겁니다. 재미가 돈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에 대해 기본소득제라는 정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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