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세로’를 호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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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처음 영화가 출현한 이후로 영상을 담는 네모난 틀은 대체로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길었다. 때로는 일대일 비율의 정사각형 모양도 나왔고 간혹 높다란 교회 건물에서 상영되기 위해 세로형 영상도 있었지만, 영상은 가로 중심이었고 점점 더 넓어지는 쪽으로 진화했다.

스마트폰 대중화와 LTE 서비스 보급으로 모바일 동영상 소비가 급속하게 느는 추세다. 닐슨코리아클릭은 2017년 모바일 트래픽 중 영상이 약 74%를 차지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이처럼 모바일로 동영상 소비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눈은 여전히 수평의 가로의 동영상이 익숙하다.

△ 페리스코프

△ 페리스코프

하지만 어떤 우유가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라고 했던 것처럼 “모바일은 원래 세로다”라는 당돌해 보이는 외침이 곳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다. 최근들어 모바일의 모습 그대로 사용자에게 가로로 화면을 돌리지 않도록 세로형 동영상을 유통하는 곳들이 미국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페리스코프다. 페리스코프는 트위터가 지난 3월 공개한 스마트폰 생중계 응용프로그램(앱)이다. 페리스코프는 글에서 영상으로 한 단계 진화한 트위터다. 온라인 생중계와 SNS를 결합한 일종의 소셜 생방송 플랫폼으로, 시청자가 수동적인 TV와는 다른 시청 습관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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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스코프 시청자는 방송에 메시지를 쓰거나 ‘하트’를 보내는 식으로 방송에 참여할 수 있다. 하트는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비슷한 기능으로, 하트를 많이 받은 방송은 상위로 추천된다. 또한 사용자는 시청자이기도 하며 언제든 방송 진행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 간단한 소개글을 적고 ‘방송 시작하기’ 버튼만 누르면 바로 생방송이 시작된다.

케이본 베익포어 페리스코프 최고경영자(CEO)는 “시청자와 방송 진행자 양쪽의 입장을 모두 고려한 게 세로 화면 지원”이라며 “시청자가 하트나 댓글로 방송에 참여하려면 가로 화면보다 세로 화면이 더 자연스럽다”라고 설명했다. 케이본 베익포어 CEO는 “사용자가 일반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세로 화면이 동영상에 있어 대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영신 박사는 ‘페리스코프가 바꾸는 미디어 세상‘ 보고서에서 “페리스코프는 세로 촬영으로 세팅되어 있다”라며 “더 이상 촬영 도구와 보는 도구를 이원화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글에서 그는 “이제는 공급자가 찾아가는 시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쓰는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시간 방송 콘텐츠뿐 아니다. 지난 1월27일 스냅챗은 미디어 플랫폼 ‘디스커버’를 공개했다.  <CNN>과 <데일리메일>, <야후뉴스> 등 미국 7개 언론사가 뉴스를 제공한다. 새로운 뉴스 형식을 만들기 위해 실험을 이어가고 있으며 현재 대부분의 콘텐츠는 짧은 동영상이 주를 이룬다. 디스커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기본값이 세로 화면이라는 점이다.

스냅챗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에반 스피겔은 <애드위크>와 인터뷰에서 “수직적으로 생각하라(Think vertically)”고 말했다. 그는 스냅챗이 디지털 비디오 시장의 세로 화면 비율 문법에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페리스코프나 스냅챗 등이 모바일 시대에 걸맞는 포맷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짧은 분량의 동영상을 모바일로 소비할 때 휴대폰을 돌려보지 않게 하기 위해 모바일에 최적화해 영상 포맷을 맞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 교수는 “오랜 시간 길게 영상을 볼 때는 아무래도 16대9의 가로 화면이 안정감이 있다”라고 말했다.

윤성호 감독 역시 “스마트폰을 가로로 눕히는 것보다 세로 화면이 손에 익숙한 건 사실”이라며 “(페리스코프나 스냅챗의 출현은) 너무 당연한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윤 감독은 이를 두고 굉장한 패러다임의 변화라거나 중요한 역사의 기로에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세로로 찍을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 생긴 것 정도라고 봤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인물에 집중해야 하는 ‘바스트샷’도 가로 화면으로 찍었다면 앞으로는 세로 화면이라는 선택지가 생겼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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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리스코프 (사진 : 페리스코프 미디엄 블로그)

페리스코프나 스냅챗처럼 세로 영상을 기본으로 지원하는 플랫폼이 등장하자, 이에 맞춰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체도 나온다. 스냅챗의 ‘디스커버’에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는 <데일리메일> 역시 세로형 동영상 콘텐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버즈피드>의 전 회장인 존 스타인버그 <데일리메일> 북미 지사 최고경영자(CEO)는 “가로 화면은 TV와 영화 스크린의 산물일 뿐”이라며 “모바일로 세로형 영상을 본 게 벌써 8년이며 유튜브도 모바일로 더 많이 보는데, 제작자들은 아직도 사용자가 스마트폰을 (가로로) 돌리게 만든다”라고 지난 4월 자신의 미디엄 블로그에 밝힌 바 있다.

특히 모바일 동영상 광고도 세로 형태로 제작된 게 더 잘 ‘먹힌다’는 것는 것도 세로형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존 스타인버그 CEO는 “스냅챗 디스커버에서 실험한 내용에 따르면 사용자들은 가로 화면보다 세로 화면으로 제작된 동영상 광고를 끝까지 볼 확률이 9배 더 높다”라며 “더 공격적으로 세로 화면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 스냅챗의 세로 화면으로 꽉 찬 동영상 광고를 끝까지 보는 비율이 가로 영상보다 9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스냅챗의 세로 화면으로 꽉 찬 동영상 광고를 끝까지 보는 비율이 가로 영상보다 9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MCN 스타트업인 비디오빌리지도 세로 화면 동영상 제작을 시도하려 한다. 조윤하 비디오빌리지 대표는 “MCN도 CP(Contents Provider)와 채널사업자의 역할이 바뀌면서 생겨난 시장인 것처럼, 변화하는 시청 기기에 따라 콘텐츠도 계속해서 변화해 갈 것”이라며 “방송사업자의 그릇이 가로형 TV라면, 우리의 그릇은 세로형 모바일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벤처투자사 KPCB의 분석가 매리 미커는 지난 5월, ‘2015년 인터넷 트렌드’ 보고서를 통해 “모바일 시대가 되며 가로 화면보다 세로 화면으로 동영상을 소비하는 비율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영신 박사는 “페리스코프는 동영상 시장의 큰 축이 모바일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조”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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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리 미커 ‘2015 인터넷 트렌드 보고서’ 자료 일부

이들의 전망처럼 동영상이 가로에서 세로 중심이 된다면 서사에도 영향을 줄까.

극장 스크린과 TV 브라운관, 모바일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은하해방전선’부터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출출한 여자’ 등의 작품을 선보여 온 윤성호 감독은 “서사에 영향을 안 끼치는 건 아니겠지만 완전히 지배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봤다. 다만 윤 감독은 “TV가 등장한 후 영화라는 매체만 줄 수 있는 ‘스펙타클’에 더 집중하고 영화에 걸맞은 러닝타임이 나오듯, 유통이 그 시대 서사에 자극제가 되는 건 맞다”라고 말했다.

윤 감독은 “인간이 뭔가를 볼 때는 재미에 정보 요소도 있어야 한다”라며 “만약 농구 경기를 본다면 가로로 뛰어다니는 걸 봐야 하는데 세로 화면으로 보면 개인플레이만 보게 돼 답답함을 느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신 정보를 좁게 전달해야 하거나 단독 인터뷰샷과 같은 경우는 세로 화면이 당연한 선택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 사진 : 플리커. CC BY-SA 2.0

△ 사진 : 플리커. CC BY-SA 2.0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만약 세로 화면으로 영상을 만든다면 수직적 이미지에 대한 고려를 하게 될 것”이라며 “파노라마적인 형식은 어려워지고 위·아래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사진으로 치자면 5명이 함께 나오는 사진을 찍긴 어렵다”라며 “혹시나 개인주의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겠다”라고 말했다. 이동연 교수는 “세로 화면으로는 설정샷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을 넣기가 어렵다”라며 “이야기나 서사 구조보다는 묘사 중심이나 감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식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박관수 기린제작사 대표는 “가로 화면은 동시에 여러 인물을 담을 수 있어서 인물간의 관계를 담기 쉽고 스펙타클을 담기에도 용이한 비율로, 굳이 대비하자면 3인칭 시점이 될 듯하다”라며 “세로 화면은 1인칭 시점에 가깝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로 화면은 좌우의 정보가 줄어들어 양옆에서 뭐가 나타날지 모르는 화면비가 돼 ‘서스펜스’가 더해지는 효과가 생길 것 같다”라고도 말했다.

홍명교 <오늘보다> 편집위원은 “영화에 추격씬이 많이 나오는 것은 4대3, 16대9 등 가로 화면에서 영향을 받았다”라며 “만약 세로로 더 많이 동영상을 소비하는 시대가 온다면 당연히 영화 미학이 많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수평의 사막 위 자동차 추격씬이 나오는 영화는 세로 화면의 영상에서는 나오기 어렵다고 봤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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