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시간 알려주는 시계, 3D프린터로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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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이 돌아가는 시계는 바늘시계, 숫자로 시간을 표현하는 시계는 전자시계. 보통 이렇게 많이 부른다. 글자로 시간을 표기할 수는 없을까. 가능하다. ‘2:35’를 ‘두 시 삼십 오 분’이라고 표현하는 시계 말이다. 영어로는 ‘워드클록’이라고 하지만, 우리말로 쓰자면 글자시계 정도가 적당할 터.

이호민 워드클록 개발자와 송영광 대디스랩이 한글 워드클록 제품화를 꾀하고 있다. 몸체는 3D프린터로 만들 수 있도록 해 메이커 운동과도 엮을 예정이다. 가로와 세로에 5개씩 LED를 배열하고, 전면에 불빛이 투과하도록 고안한 패널이 시간을 표현한다.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은 5분 간격이다. 우리글 25개로만 시간을 표현하려다 보니 그렇단다. 책상에 놔두면, 시계 이상의 멋진 실내장식 소품이 된다는데, 그깟 2~3분 못 본들 큰 손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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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광 대디스랩 대표(왼쪽)와 이호민 개발자

여럿의 아이디어가 모인 ‘한글 워드클록’

“아두이노를 막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오라일리에서 만든 메이커 잡지에서 처음으로 워드클록을 봤어요. 한글로는 안 될까 생각하다가 LED를 5×5로 배열하면, 오 분 단위로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이호민 개발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다. 국내에서는 비교적 이른 2011년부터 아두이노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본업이지만, 하드웨어 지식이 업무현장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호민 개발자의 아두이노 한글 워드클록은 2011년 국내 <메이크 매거진>에서 실시한 메이커 대회에서 상도 탔다. ‘메이커 정신’과 표현미는 일찍부터 인정받은 셈이다. 에폭시판 위에 동판을 코팅해 만들었던 2011년의 워드클록이 지금의 3D프린팅 기술로 대체됐을 뿐이다.

에폭시 동판에서 처음 출발한 한글 워드클록의 소재 변천사가 흥미롭다. 동판에서 3D프린터로, 최종적으로 모듈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아이디어가 녹아들었다. 처음 대디스랩이 한글 워드클록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워크샵 의뢰 때문이었다.

“2014년에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워드클록 제작 워크샵을 요청해 왔어요. 이호민씨의 워크클록을 보니까 동판도 써야 하고 손이 많이 가는 기술이 필요하더라고요. 몸체를 3D프린터로 키트화 하고, 워크샵에 참석한 이들이 조립할 수 있도록 쉽게 만들었죠.”

송영광 대표는 한글 워드클록을 주제로 2014년 겨울 한차례 워크샵을 열었다. 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대디스랩이 동판 대신 고안한 3D프린터 몸체 덕분에 손쉽게 워드클록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시간을 한글로 표현해주는 앞판은 종이로 만들었다. 워크샵에 참석한 한 고등학교 과학교사로부터 의외의 아이디어가 나왔다.

“2014년 12월 워크샵에 참여한 분당 경영고등학교의 과학동아리 담당 과학선생님이 학교의 3D프린터로 앞판까지 완성하셨더라고요. 우리도 해야겠다 싶었던 거죠. 이렇게 해서 앞판까지 모두 3D프린터로 모듈화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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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워드클록’

말하자면, 한글 워드클록은 최초 개발자인 이호민 개발자와 모듈화를 담당한 송영광 대표의 대디스랩, 아마추어 개발자인 과학교사의 아이디어가 한데 모인 메이커 운동의 산물인 셈이다.

소재는 시대의 기술과 어울리도록 변화를 거듭했지만, 한글 배열만은 이호민 개발자가 고안한 것 그대로다. 한글 워드클록에는 가로와 세로줄에 각각 5개씩 LED가 있다. 한글 배열도 5개씩이다. 총 25개 글자가 오분 단위의 시간을 표현해준다. ‘한시 오분’에서 ‘한시 십분’으로 넘어갈 때 ‘오’에 켜진 불이 꺼지고 대신 ‘십’ 부분의 LED가 켜지는 식이다. 시간을 읽는 방법을 정해 원칙으로 세우고, 여러 번 쓰일 수 있는 글자의 위치를 고심한 끝에 탄생한 배열이다.

이호민 개발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라며 “공통으로 쓰일 수 있는 글자가 무엇이 있는지를 찾고 고민했다”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시간을 표현할 때 ‘시’와 ‘분’은 매번 쓰인다. ‘오분’을 제외하면, 분을 표현하는 데도 ‘십’은 항상 따라온다. 공통된 글자를 먼저 배열하고, 그 글자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글자를 최대한 가까이 붙여 배열한 것이 한글 워드클록의 특징이다. ‘일곱’과 같이 시간을 표현하는 데만 한번 쓰이는 나머지 숫자나 ‘정오’처럼 시간을 나타낼 때 필요한 표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는 법칙에 따라 배열했다.

25개 글자만으로 5분단위의 모든 시간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수고스러움 덕분이다. 글자 배열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점도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이기에 적당하다. 이호민 개발자는 한글 배열과 아두이노 소스코드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BY 2.0)로 ‘깃허브‘에 공개했다. 더 나은 글자 배열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면, 변경해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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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호민 개발자가 처음 만든 ‘한글 워드클록’

메이커 운동의 동력, 목표와 맥락 그리고 참여

송영광 대표는 한글 워드클록에서 메이커 운동의 동력을 확인했다. 한글 워드클록 워크샵과 키트화 과정에서 발굴한 뜻밖의 수확이었다.

“한글 워드클록으로 워크샵을 진행할 때 참여한 이들에게 소스코드를 설명해주고, LED를 번갈아가며 켜보도록 했거든요. 아두이노를 어려워할 수도 있는데, LED를 켜거나 직접 동작하는 것을 보여주니까 그런 부분에서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두이노에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전자회로처럼 보일 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쉽게 감이 안 서기 때문이다. 추상성은 대상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송영광 대표는 메이커 운동의 동력을 목표와 맥락에서 찾았다. 한글 시계를 만든다는 것이 목표고, 그를 위해 아두이노를 조립하고 LED를 배열하는 것이 맥락이다. 뚜렷한 목표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맥락이 워크샵 참여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다는 게 송영과 대표의 해석이다. 송영광 대표는 이 같은 흥미로운 제품이 많이 등장할수록 국내에서도 메이커 운동을 널리 확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호민 개발자는 한글 워드클록 덕분에 메이커 운동의 순기능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하게 됐다. 재미로 시작한 시계 만들기가 다양한 생각 거리를 던져준 셈이다.

“처음에는 노트에 그림을 그리면서 한글 배열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5분 단위 시계가 된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아두이노로 시계를 만들면서 이렇게 제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오픈소스로 공개하니까 다른 사람이 아이디어를 넣어서 기능을 추가하기도 하고요. 메이커 운동의 목적이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아닐까요.”

처음 동판으로 제작된 한글 워드클록은 3D프린터로 찍어낸 몸체로 바뀌었다. 지역 날씨를 받아와 구름이나 비를 표현하는 기능도 추가됐다. 여러 사람이 모여 아이디어를 추가한 덕분이다.

이호민 개발자와 대디스랩이 함께 만든 한글 워드클록 키트는 오는 6월 마지막 주 크라우드펀딩 서비스 ‘와디즈’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펀딩에 참여한 이들은 제품을 받거나 도면을 받을 수 있다. 도면은 이미 오픈소스로 공개돼 있지만, 펀딩을 통해 한글 워드클록을 알리겠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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