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 ‘이야기’에서 ‘큰사람컴퓨터’까지, #하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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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채팅’을 한다는 건 오늘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마다 스마트폰 하나씩 들고 다니는 세상에서 ‘카톡’이니 ‘라인’이니 차고 넘치는 게 문자메시지 서비스니까. 기계 스스로 인터넷에 연결된다는 그야말로 커넥티드 세상에서는 텍스트만 주고받는 채팅도 이제는 옛날얘기다. 실시간 영상통화도 우리 손안으로 들어온 지 오래다.

하지만 어디인지 모를 화면 건너편에 있는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던 시절도 있었다. 전화를 걸면, 1초에 겨우 1200bps의 속도로 정보를 주고받던 시절, 어쩌면 사람의 문자 타이핑 속도가 정보의 전송 속도보다 빨랐을지 몰랐을 그런 시대가 불과 30여년 전의 일이다. 당시 PC통신에서 채팅 좀 했다는 이들은 ‘이야기’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는지. 당시 채팅의 달콤함에 빠져 무수히 많은 밤을 보낸 아저씨라면 모를 리 없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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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개발한 황태욱 고문, 이종우 소장, 정재흠 개발자(왼쪽부터). 이영상씨는 싱가포르에 거주 중이다.

한글 보고파 시작한 ‘이야기’

“이야기 개발은 태욱이가 먼저 시작했어요. 채팅으로 한글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하야할까 고민하다가 만들기 시작했죠. XT나 AT 쓰던 시절이었네요.”(이종우)

“그때 AT 가격이 한 700만원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교수들은 그래픽카드 하나만 해도 400~500만원 짜리 쓰고 있었으니까요.”(정재흠)

이야기는 1987년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대학 동기 넷이 모여 만든 PC통신 접속 프로그램이다. 황태욱 고문과 이종우 소장, 정재흠 개발자, 이영상 씨가 주역이었다. 통신을 위한 모뎀 연결과 한글 표기, 자동으로 전화를 걸어주는 기능 등이 이야기 초기 버전의 핵심이었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구상한 이는 황태욱 고문이었다.

“당시 PC통신에는 그래픽은 없었어요. 한글도 안 됐고요. 한글을 표기하기 위한 한글카드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한글을 표현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소프트웨어로 구현해보자 해서 만들기 시작한 게 이야기였어요.”

당시 컴퓨터는 한글을 제대로 표기하지 못했다. 한글을 보기 위해선 별도의 하드웨어가 필요했다. 이종우 소장이 기억하기로는 한글카드의 가격이 대학교 등록금과 맞먹을 정도였다. 컴퓨터도 없는데, 대학 등록금과 비슷한 가격의 한글카드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하드웨어가 없으니 이를 소프트웨어로 구현하고자 했던 게 이야기의 출발이었다. 이야기의 등장 덕분에 국내 채팅 이용자들은 채팅창에 ‘annyeonghaseyo(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넬 필요가 없어졌다.

황태욱 고문이 개발을 시작하자 친구들이 하나둘 옆에 붙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을 것이라 궁금히 여기며 지켜보다가 함께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정재흠 개발자는 이야기를 만들 당시 네 친구가 맡았던 각자의 역할을 이렇게 기억한다.

“태욱이가 영감을 내놓으면, 저랑 영상이가 주로 코딩을 했어요. 종우는 그 코딩에 틀린 점은 없나 살펴보면서 더 탄탄히 정리했고요. 저랑 영상이가 좀 엉망으로 했거든요, 하하.”

친구들은 주로 학교 근처 PC 가게에서 모였다. PC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동네에 PC를 파는 이들이 가게를 내던 시절이었다. 컴퓨터와 채팅을 즐기던 이들에게 PC 가게는 별천지였으리라. PC 가게가 이야기 4인방의 아지트였고, 주인은 이들의 형 노릇을 했다. 배고프면 거기서 먹고, 졸리면 그대로 잤다. 수업 끝나고 남는 시간에 아지트에 모여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좀 순진한 생각이다. 이야기를 만들다가 시간이 좀 남으면 들어가곤 했던 것이 수업이었으니까.

1988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이야기는 1989년 첫 번째 버전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해 12월 무료 소프트웨어로 일반에 공개됐다. 통신 에뮬레이터였지만, 모뎀과의 통신은 사실상 부가기능이었다. 한글이 핵심 기능이었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채팅에 목마른 PC통신 이용자들로부터 환영받았고, 게시판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모뎀으로 PC통신이나 채팅 좀 한다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야기를 썼다. 한글을 쓸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편했다. 자동으로 전화를 걸어주는 기능이 있었던 덕분이다.

“PC통신에 접속하는 사람이 늘면서 전화를 걸어도 통화 중인 경우가 많았거든요. 회선 수에 제한이 있었으니까요. 서로 접속을 하려고는 하는데, 통화 중이이니까 계속 전화를 하는 거죠.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는 통화 중일 때 끊고 다시 걸어야 했는데, 이야기가 나온 다음부터는 이야기가 자동으로 해주니까 편했죠.”(황태욱)

황태욱 고문은 “전화를 걸고 통화중일 때 자동으로 다시 접속하도록 해주는 기능이 제일 인기 있었던 것 같다”라며 “거의 채팅 폐인으로 지냈던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물론, PC통신 이용자들이 전부 이야기를 통해 자동으로 전화 다시 걸기 기능을 이용하고 있는 판이었으니,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접속이 원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파일 전송 기능이나 컬러를 활용한 그래픽 표현 기능이 추가된 것은 이후 버전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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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5,0′(위)과 ‘이야기 5,3’

명품 SW된 ‘이야기’, 큰사람컴퓨터로

이야기 4인방은 PC통신 세계에 금방 이름을 떨쳤다. 지금처럼 모든 이들이 연결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 덕분이다. PC를 갖고 있는 이들도 적었고, 통신을 활용하는 이들은 더 적었다. 매일 통신으로 만나던 이들은 마치 옆집 사람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과 달리 그때만 해도 넷상의 지인들은 모두 친절했다.

이야기를 만든 학생들이 있다는 소문에 이들을 도우려는 손길도 이곳저곳에서 이어졌다. 드림위즈 부사장을 지냈던 박순백 교수도 그중 하나다. 이종우 소장은 박순백 교수로부터 모니터를 받은 옛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PC통신에 일찍 눈을 뜬 ‘얼리어답터’ 교수가 학생들에게 내린 일종의 하드웨어 기부였던 셈이다.

“그때 모니터가 굉장히 비쌌거든요. 영상이가 서울 가서 직접 모니터랑 VGA 카드를 들고 왔어요. 학생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 선뜻 주신 거죠.”

PC 가게에서 이야기를 만들던 친구들은 그때 컬러 화면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전부터 이야기에 컬러 그래픽을 구현해두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발한 이들은 그 색깔이 어떠한지 직접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개발은 했으되, 컬러를 표현할 장비가 없었던 탓이다. 머릿속으로만 구상한 색깔을 엉성하게 입힌 컬러 버전의 이야기를 보고 다른 이들이 종종 “이거 색깔이 좀 이상해”라고 말하는 것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VGA 카드를 접한 이후에야 이야기의 색깔에 이상하다는 품평을 한 다른 이들의 속마음을 알게 됐단다. 보라색 바탕이었고, 글자는 초록색으로. 파란색과 주황색의 보색대비도 과감히 표현했을 정도로 온갖 화려한 색깔은 다 구현했으니, 그 화면이 컬러를 볼 수 있는 장비를 갖고 있던 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알만하다.

응원하는 이들이 있었던 만큼, 이야기의 성공담을 시기하던 이들도 많았다. 지금처럼 온라인에서 험한 욕이 오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야기가 잘나간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많은 대학에서는 ‘타도 하늘소’와 같은 슬로건이 내걸렸다.

“큰사람을 설립한 이후에는 ‘클사람’, ‘클아이’ 뭐 이런 것도 있었던 것 같고요. 무엇보다 이야기가 무료이다보니 사업을 못 하던 이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해요.”(정재흠)

이야기로 유명해진 경북대학교의 컴퓨터 동아리 ‘하늘소’의 시작도 이야기의 시작과 같다. 하늘소의 중심은 당연히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만든 경험은 큰사람컴퓨터 창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수업을 빠져도, 학점이 안 나와도 당시에는 원하는 대기업에 골라 갈 수 있었지만, 이들은 취업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이야기의 성공을 눈앞에서 지켜봤으니 자신감도 있었다.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하숙집에 회사를 차렸다. 1992년의 일이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1994년에 전국적으로 큰 폭염이 있었거든요. 그때 대구 하숙집에 스티로폼을 대서 만든 방에 들어갔어요. 아,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더라고요. 더워서. 영상이가 남자들밖에 없으니까 속옷만 입고 일 하자고 했던 것도 기억나네요.”(이종우)

큰사람이 부족했던 건 ‘겁’과 ‘경험’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큰사람의 이야기’는 조금씩 어려워졌다. 이들은 당시 도스 환경에 집착해 이야기를 개발한 것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는다. ‘윈도우3.0’을 내놨지만, 초기에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우 운영체제(OS)가 ‘윈도우3.1’로 그야말로 대박을 친 시기였다. 때를 맞춰 경쟁 제품도 등장했다. ‘새롬데이터맨’이다. 새롬데이터맨은 이야기보다 윈도우에 먼저 입성했다. 겨우 6개월 정도 늦었을 뿐인데, 그 사이 시장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집혀 있었다.

그나마 이야기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은 책이었다. 큰사람은 큰사람정보통신과 큰사람컴퓨터, 도서출판 하늘소로 구성돼 있었다. 도서출판 하늘소에서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을 출판했다. 책 판매에 따른 매출이 큰사람의 주요 매출이었다.

“이야기 버전 5,0부터 책으로 냈어요. 책에서 10%를 인세로 벌었죠. 다행히 책이 많이 팔렸어요. 학생 신분으로 치자면 당시에 꽤 큰 액수였는데, 넷이 함께 유지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황태욱)

1년에 수천만원이면 큰돈이었지만, 큰사람은 지금처럼 투자니 창업자금이니 하는 외부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인세가 거의 유일한 수익원이었다는 뜻이다. 4명 몫을 나누면, 월급으로 따져 100여만원에 불과했다. 오래 이어가기엔 어려운 환경이었다.

물론, 이야기는 소프트웨어 패키지 형태로도 판매됐다. ‘이야기 6,0’이 4만9500원이었고, 그다음 버전은 5만5천원이었다. 출시 직후부터 무료로 쓰던 프로그램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실제 판매로는 많이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 회사 상황이 별로 안 좋았어요. 차기 제품도 없었고, 게다가 전세계적으로 IMF 몰아쳤고요. 힘드니까 동업하던 친구들에게 감정적으로 변하기도 했고요.”(이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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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위기 직후 큰사람컴퓨터는 인터넷전화(VoIP)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금도 관련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야기가 윈도우에 발을 늦게 들인 만큼, 차기 아이템은 어떤 분야에서건 늦지 말자는 판단에서다. VoIP 시장에는 일찍 진입한 셈이다.

새롬과의 경쟁 관계는 VoIP 쪽에서도 한동안 이어졌다. 새롬도 ‘새롬 다이얼패드’라는 이름의 인터넷전화 서비스를 갖고 있었다. VoIP 쪽에서도 큰사람보다는 새롬이 좀 더 잘나갔다. 새롬 다이얼패드를 통해 무료 통화 시대가 열렸다는 얘기도 한창 나왔으니 말이다. 당시 큰사람과 새롬의 차이는 ‘사업적 마인드’의 차이였던 셈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 국내 PC통신 시장의 붐을 이끈 이야기는 결국 2001년 공개소프트웨어로 출시된 ‘이야기멀티’를 마지막으로 달리기를 멈췄다.

현재 큰사람컴퓨터에 남아 있는 인물은 연구소장인 이종우 소장 뿐이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이영상 씨는 현재 싱가포르에서 전혀 다른 분야의 사업을 운영 중이다. 황태욱 고문과 정재흠 개발자는 각각 업계에서 기술고문과 프리랜서 개발자로 일하는 중이다.

이야기를 유료 판매했던 것, 유료 버전의 가격을 결정했던 과정 등 당시의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는 황태욱 고문의 생각이다. 하지만 당시 네 친구들이 겁 없이 창업과 사업에 뛰어든 것만은 분명하다. 정재흠 씨는 졸업과 함께 시작한 큰사람의 도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겁이 없었어요. 아는 게 없었으니 겁도 없었던 거죠. 잘 만드는 것과 잘 파는 건 완전히 별개의 것이더라고요. 제품만 잘 만들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친구랑 동업이요? 절대로 하지 마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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