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아동 교과서, 정부가 책임지고 보급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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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았습니다. 고작 두어 달 앞당겨졌을 뿐이에요.”

남형두 교수(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가 말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옛말이 된 시대, 하룻밤만 자고 나도 쫓아가기 버겁도록 빠르게 변하는 세상 아닌가. 30년이 넘도록 고집스레 바뀌지 않을 게 무엇일까.

시각장애인 교과서 얘기다. 이상한 일이다. 새학기가 되면 새 교과서를 받아들고 공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간단명료한 상식이 우리나라 초중고교 교육 현장에선 지켜지지 않고 있다. 시각장애인 학생에 한해서만.

학기가 바뀌면 학생들은 한두 달 전부터 새 교과서를 지급받는다. 그런데 시각장애인 학생에겐 교과서를 손에 쥐는 일이 험난한 여정이자, 높은 문턱이다. 기존 교과서를 점자교과서로 변환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종이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PC나 휴대기기에서 디지털 파일로 학습 자료를 찾는 일이 보편화됐지만, 시각장애인에겐 남의 일이다.

이는 법이나 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형두 교수는 “저작권과 정보접근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학년기에 있는 초중고교 시각장애인 학생에게 교과서를 디지털 파일로 보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남 교수는 저작권법 전문가로서 장애인의 정보접근권과 저작권의 합리적인 공존을 제안하는 주장을 여러차례 했다. 그는 현행 법·제도로도 시각장애인 학생에게 디지털 교과서를 보급하는 일은 어렵잖다고 말했다. 그건 시각장애 아동들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라고 했다. 업계 종사자나 주변 사람들의 인식 개선이 우선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합리적인 대안도 제시했다. 30년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진 않아야 하기에.

남형두 교수는 1986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16년 동안 변호사로 일했다. 변호사 시절 미국 워싱턴대에서 저작권법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5년부터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시각장애 아동에게 교과서를 제때 지급하자는 얘기가 30년이 넘도록 반복되고 있다.

= 예전과 요즘 논의는 좀 다르다. 2009년에 저작권법과 도서관법이 개정되며 입법적으로는 해결됐다. ‘마라케시 조약’에 정부가 서명도 했다.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는 상태인데, 그것까지 되면 법·제도적으로는 지금까지 얘기는 해결됐다.

마라케시 조약은 2013년 6월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린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채택한 세계적인 조약이다. 시각장애인, 더 나아가 책을 읽기 어려운 독서장애인에게 콘텐츠를 다른 형태로 바꿀 수 있도록 저작권을 일정부분 제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 : 마라케쉬에서 날아온 기적같은 소식: 독서장애인을 위한 저작권 제한 조약에 합의)

문제는 법·제도로 해결되는 것과 현실은 다르다. 출판사업자는 책이 나오면 무조건 국립중앙도서관에 하드카피 2본을 납본하게 돼 있다. 2009년 법 개정 이후로 출판사업자는 중앙도서관이 요구하면 디지털 파일로도 책을 납본하도록 바뀌었다. 문제는, 이게 강제조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디지털 파일로 납본하지 않아도 법으로 처벌하거나 행정적으로 제재하는 게 없다. 법은 있어도 의식수준이 낮아 제대로 안 되는 것이다.

– 디지털 파일로 납본하면 해결될 문제인가.

= 저작권법 외의 제약 요소들도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 웹 접근성을 보장하라고 돼 있다. 미국은 시각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웹에서 이미지 파일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비장애인의 편의를 위해 이미지 파일을 쓰는데, 이게 비장애인에겐 취향의 문제이지만 장애인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멋을 좀 덜 내면 비장애인은 볼 수 있다.

– 시각장애 학생들의 교과서 보급 문제에 특히 관심 갖는 까닭은.

=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보장하고 있다.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은 장애인은 고교까지 의무교육 대상자로 하고 있다. 교육시킬 의무와 교육받을 권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과서다. 교과서가 제때 지급되는 것이 의무교육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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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는 영어교과서를 빼면 대부분 국정이다. 중학교는 검정제, 고등학교는 인정제다. 중고교로 갈수록 교과서 종수가 많아진다. 장애인이 맹학교나 농학교 같은 특수학교에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본인이 원하면 일반학교도 다닐 수 있다. 일반학교 다니는 걸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비장애 학생은 3월부터 교과서를 받는데, 시각장애인 학생은 빨라야 3월말, 4월이다. 그때까진 다른 아이들이 책을 읽고 공부하는 동안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내 아이가 교실에서 그렇게 앉아 있다면 부모로서 어떻겠는가.

– 시각장애 학생에게 교과서가 어떤 형태로 보급되는 게 바람직한가.

=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대체 감각은 청각과 촉각이다. 촉각은 점자도서, 청각은 소리도서다. 2009년 저작권법과 도서관법을 개정시 주력했던 건 소리도서였다. 중도실명자가 점자를 배워 공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디지털 파일을 소리로 변환하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특히 독학이 가능한 대학생이나 성인들은 대부분 소리도서를 원한다.

문제는, 학년기 시각장애 학생들은 수업 중에 선생님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소리도서를 이용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점자교과서나 큰글자 교과서를 받아야 한다. 그게 제때 보급되지 않는 게 문제다.

– 시각장애인 교과서가 제때 지급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인가.

= 정부는 시각장애용 교과서 보급을 지자체 교육청에 위임한다. 그런데 통합교육 받는 시각장애인 학생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광역자치단체나 기초자치단체는 구역 내 시각장애인 초중고교생이 10명도 채 안 된다. 거기 공무원이 배정돼 지자체별로 책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건 탁상공론이다. 출판사도 의무조항이 아니다보니 제때 도서를 납본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 출판사는 인력이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 교과서 만들 때 필자에게 한글 파일 받아서 인디자인이나 쿽 파일로 만든다. 그 단계에서 점자책을 염두에 두고 만들면 훨씬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걸 염두에 두지 않고 인디자인이나 쿽 작업을 했다가 다시 열변환해서 텍스트 파일 추출해 시각장애인용 파일을 만들다보니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 묵자책 만드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 점자책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작업하면 된다. 거기에 예산이 들어간다면, 이는 교육부가 맡아줘야 하는 부분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디지털로 납본한 파일이 유출돼 피해를 봤다면 국가가 이를 보전하도록 하면 된다. ‘미분배보상금’을 활용하자.

– 출판사는 디지털 파일이 유출돼 저작권이 침해될까 두렵다고도 한다.

= 그게 대표적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이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보자. 예컨대 1만원짜리 참고서가 있다 치자. 그 텍스트 파일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고 해서, 어떤 부모가 이를 내려받아 출력해 제본까지 해서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하겠나. 물론 상업 소설 같은 건 파일이 유출되면 책 판매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학습서는 다르다. 더구나 교과서는 무료 교재다. 그걸 누가 파일이 있다고 내려받아 인쇄해 보나. 그건 출판인의 관습적 두려움일 뿐이다.

또 하나. 시각장애인을 위해 디지털로 납본한 파일이 유출돼 피해를 봤다면 국가가 이를 보전하도록 하면 된다. 저작권법에 따라 교과서 저자에겐 저작권료를 지급한다. 그런데 소재 파악이 안 되거나 상속인이 파악 안 돼 저작권료를 못 주는 경우도 적잖다. 이렇게 쌓아둔 돈이 ‘미분배보상금’이다. 그게 수십억원에 이른다. 혹시라도 교과서 파일 유출로 피해를 봤다면 이를 활용하면 된다. 저작권법 시행령에서도 그렇게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 시각장애 아동 교과서 보급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 지금처럼 지방교육청에 맡겨선 똑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시각장애 학생 교과서 보급은 중앙정부가 할 일이다. 중앙에서 내려다보면 어느 지자체가 어떤 교과서를 채택했는지 다 나온다. 처음부터 교과서를 점자 파일로 보유하고 있다가 필요한 곳에 뿌려주면 된다. 교육부 산하에 특수교육원이 있다. 거기서 전국 시각장애인 학생들 파악해 교과서 제작·배포 업무를 하는 게 맞다.

시각장애 학생 교과서 보급은 중앙정부가 할 일이다. 교육부 산하에 특수교육원이 있다. 거기서 전국 시각장애인 학생들 파악해 교과서 제작·배포 업무를 하는 게 맞다.

또 있다. 출판사들은 검인정 교과서를 만들기 전에 제안서를 낸다. 이때 점자책도 만들 수 있도록 다지털 파일로 납본할 것을 검인정 심사 평가 요소로 교육부가 배점을 주는 방안이 있다. 지금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점자 교과서 제작이 완료될 수 있다. 지금은 출판사가 교과서를 묵자로 만든 다음 나중에 점자책을 만들다보니 배포가 늦어진다.

– 이런 문제를 예전에는 정부에 건의하지 않았나.

=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 공무원 제도를 보라. 업무에 익숙해질 만하면 자리를 옮긴다. 사고방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우리나라 교육 제도는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 관점에서 결정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니 학년기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자치단체별로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 문제를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내보낸다. 수요자 입장에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시각장애인인 조선대 김영일 교수가 학창시절, 새학기가 되자마자 받은 유일한 점자책이 ‘황강에서 북악까지’라고 들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전기였다. 내가 하고픈 말은 그거다. 초중고교 시각장애 학생 점자책을 대통령 전기라고 생각하고 만들라는 얘기다. 학생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데. 제때 교과서를 못 받는 학생이 느끼는 좌절감을 아는가. 좌절감이 쌓이면 시각장애인 학생은 미래를 쉽게 포기하게 된다.

초중고교 시각장애 학생 점자책을 대통령 전기라고 생각하고 만들자. 제때 교과서를 못 받는 학생이 느끼는 좌절감을 아는가. 좌절감이 쌓이면 시각장애인 학생은 미래를 쉽게 포기하게 된다.

– 사람들의 인식 개선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했는데.

= 시각장애인에게 디지털 파일이 안 올 경우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야 한다. 중도장애인은 점자로 책을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변에서 책을 음성으로 녹음해주면 그걸 들으며 공부했다. 점자책은 부피도 크다. 사전에서 ‘A’ 항목 하나가 책 한 권이다. 사전 한 권이 점자책으로는 서고 하나를 가득 채운다.

그런데 디지털로 넘어오며 어떻게 바뀌었나. 단말기도 다양해졌고 MP3 파일에 책갈피, 검색에 되감기 기능도 된다. 디지털 파일만 있으면 시각장애인도 정안인이 책 읽는 것과 똑같이 메모하고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에게 점자책과 녹음이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라는 게 말이 되나. 파일만 있으면 시각장애인이 너무나 행복한 세상이 와 있다. 온다. 실제 파일 유출 위험도 거의 없는데. 결국 인식 개선 문제다. 시각장애인에게 디지털 파일을 제공받는 일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알게 되면, 지금처럼 안 된다는 쪽으로 먼저 생각하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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