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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시대, 셀카에 잡힌 21세기 존재방식

2015.10.25

“나무 한 그루가 숲 속에서 쓰러질 때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그 나무는 쓰러지는 소리를 낼까?” – 조지 버클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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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셀카”로 통하는 자기촬영 사진은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나라에 따라 셀피(selfie), 지도리(自撮り)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형태와 촬영방법에는 큰 차이가 없고, 그런 이유로 셀카는 국경을 초월해 동시대를 지배하는 문화현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주목이라기보다는 ‘눈총’에 가깝다. 시간이 지날수록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늘어나지만, 여전히 셀카에 대한 인식은 (특히 서양에서는) 곱지 않다. 관광객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셀카봉(selfie stick)”은 디즈니랜드를 비롯해 유명 관광지 여러 곳에서 안전을 이유로 금지를 당하기까지 한다. 고대 이집트의 조각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중국의 문인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습을 기록에 남기려는 인간의 욕망은 항상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셀카가 급작스레 대중들의 관심, 혹은 미움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셀카에 대한 많은 비판은 사진을 찍는 사람의‘ 허영심(vanity)’이나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령, 렘브란트가 일생에 걸쳐 그린 여러 장의 자화상에는 아무런 가식이 없이 자 신의 모습이 냉철하고, 심지어 비판적일 만큼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젊은 이십 대 여성의 페 이스북에 올라오는 셀카 사진은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려는 동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자화상이 21세기 여성과 다름없는 동기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셀카 현상에 대한 비 판은 힘을 잃는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은 뒤러 자신을 그리스도의 모습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림 2(좌)) 지나이다 세레브리아코바의 자화상은 자신의 성적매력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젊은 여성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젊은 여성들의 셀카와 차이가 없다. (그림 2(우)) 그렇다면 21세기의 셀카 사진을 과거의 자화상과 구별 짓는 요소를 나르시시즘에 두는 것은 잘못된 진단일 수 있다.

“Pics, or It Didn’t Happen”

어쩌면 우리는 셀카에 대한 힌트를 오래된 영화 한 편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바로 이탈리아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1966년 작품, ‘확대(Blow-up)’다.

한 남자가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다가 우연히 살인현장을 목격한다. 아니, 엄밀하게는 목격하지는 못하고 사진만 찍었다. 공원에서 포옹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찍은 줄 알고 돌아와 필름을 확대 인화하다가 수풀 에서 총을 든 손을 발견했고, 다음 사진에서는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피 사체라 확대한 사진만으로는 확인이 힘들었다. 그는 밤에 공원으로 돌아가 시신을 확인하지만 사진기를 가져 오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니 누군가 침입해서 인화한 필름을 모두 훔쳐갔고, 다음날 돌아간 공원에서는 시신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의 손에 남은 건 너무나 희미해 형체를 알기 힘든 시신처럼 보이는 물체의 흑백사진 한 장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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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좌) 지나이다 세레브리아코바, <화장대에서>(우)

영화가 관객에게 표면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주인공은 정말로 살인사건을 목격했는가?” 하지만 단순한 그 질문에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단지 총을 든 손이 있었고, 시신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가“ 살인사건” 을“ 목격”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관객이 목격한 것은 총을 든 손을 찍은 사진과 시신 뿐이다. 살인현장에 있었지만, 살인 자체는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살인사건을 뒷받침하는 건 형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사진 한 장과 주인공이 목격하고 그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시신밖에는 없다. 그것만으로는 법정에서 효력을 가지기도 힘들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머리 속에서 구축하는 가상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충돌이다. 그 두 가지가 충돌할 때, 사람들은 증거를 요구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이 주관적 해석을 넘어선 진실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탐구였다면, 안토니오니의 ‘확대’는 인지(認知)된 진실, 혹은 실재(reality) 의 증명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Pics, or it didn’t happen.” “사진을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이 말은 이제는 인터넷에서 하나의 밈(meme)이 될 만큼 유명해졌다. 2

영화 의 한 장면.(출처 : movieclassics3326)

[그림3] 영화 <확대(blow-up)>의 한 장면.(출처 : movieclassics3326)

역사적으로 인류사회는 목격자(eyewitness)를 중요시해왔다. 하지만1980년 대 말, 미국에서 DNA테스트가 처음으로 범인확인에 도입된 이후, 목격자의 진술만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이 속속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과학계, 특히 심리학과 뇌과학에서 목격이라는 것, 시각적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 오류가 많은지를 입증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목격자의 진술만으로는 유죄를 입증할 수 없다는 새로운 원칙은 그렇 게 미국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사진이 없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은 목격자의 시각적 오류 가능성을 넘어 현상의 실재 자체를 의심하는 말이다. 글 앞에서 인용한 18세기 철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말 (“나무 한 그루 가 숲 속에서 쓰러질 때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그 나무는 쓰러지는 소리를 낼까?”)은 소리라는 것 자체가 인간, 혹은 동물의 인식(perception)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면 “소리” 자체가 성립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소리라는 현상이 우리의 인식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면, 우리 의 인식 없이는 현상도 존재하지 않는가?

또 하나의 존재방식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등장하는 ‘나’는 현실의 나와 다른 하나의 아바타(avatar)이다. 프로필 사진은 현실의 나보다 조금 더 날씬하고, 조금 더 젊고(혹은 어리고), 조금 더 매력적이며, 페이스북에서 하는 나의 말은 현실에서 내가 입으로 쏟아놓는 말보다 더 현명하고, 더 재치있고, 더 유식하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만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현실에서 만날 때는 그러한 격차가 있음을 감안하고 만나며, 이러한 태도는 SNS에 머무는 시간이 긴 젊은 세대에 더욱 익숙하다.

현실의 나와 온라인의 나는 다른 존재일 뿐 아니라,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세상에 거주한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나는 글과 사진, 그리고 동영상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사진이 없으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은 SNS 세상에서는 한치의 과장도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매체에서만 알고 지내는 무 수한 “ 친구”와“ 팔로워”들은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지만, 내가 SNS를 중단하는 순간 나와의 연결점은 증발해버린다. 그런 그들에게 나의 존재증명은 내가 꾸준히 업로드 하는 사진과 글, 동영상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는 곳마다 풍경 속에 있는 나의 셀카를 찍어 알리바이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숲 속에 있는 나무는 쓰러져도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으면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이고, 생사가 알려지지 않은 채 무인도에 표류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사람들에게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존재이듯, SNS 안의 나, 혹은 나의 아바타는 내가 꾸준히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면 존재하기를 멈추고, 타임라인 저 아래로 까마득하게 묻혀 버린다. 내 타임라인에 매시간 쏟아져 들어오는 수백, 수천 명의 “친구들” 중 어느 누가 존재증명을 멈추면 그는 존재를 멈춘다. 스마트폰으로 SNS를 “손에 달고 사는” 젊은 세대들이 셀카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존재 증명이기 때문이다.

두 공간의 충돌

셀피.(출처 : 플리커, Bill Dickinson, CC by-nc-nd 2.0)

셀피.(출처 : 플리커, Bill Dickinson, CC by-nc-nd 2.0)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더 던진다. 바로 장소(in-situ)의 문제다. 영화 중반에 주인공은 어느 가수의 공연장에 갔다가 가수가 부숴버린 기타 조각을 차지하려고 수십 명과 몸싸움을 한다. 하지만 공연장을 나와 거리를 걷던 그는 그렇게 싸워서 차지한 기타 조각을 아무 생각 없이 길거리에 던져버린다. 주위 사람 들은 웬 쓰레기를 버리나 하는 표정을 짓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큰 몸싸움이 일어날 만큼 소중했던 기타 조 각이 공연장이라는 문맥(context)을 떠나자 아무도 관심 없는 물건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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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제와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이 장면은, 평론가 로저 이버트(Roger Ebert)의 주장처럼 이 영화가 196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권태감(ennui)을 묘사한 것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은 수준에서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만 의미를 갖는 상징물(=아이돌 가수의 악기)에 대한 주인공의 경멸적 태도, 혹은 거리 두기는 그가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세상이라는 것을 분절되어 각자의 문맥을 가진 서로 다른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신이 사라지고 사진이 사라졌을 때 주인공의 반응은 범죄를 입증하려는 태도가 아닌, 골똘한 사색이다.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사실과 현실의 차이에 대해 사색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주인공이 현실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게까지 한다.

식당이나 길거리, 공원 등에서 셀카를 찍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포즈, 행동이 과장되고 우스워 보이는 것은 그 사진이 궁극적으로 도착하게 될 가상의 공간과 그들이 현재 존재하는 현실공간이 만나는데서 생기는 불일치 때문이다. 여고생들이 입술을 삐죽이 내밀거나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할 때 그들은 SNS라는 가상공간에 이미 들어가 있다. 같은 장면을 페이스북에서 보면 아무렇지도 않거나 오히려 재미있겠지만, 그런 촬영이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우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을 때 느끼는 괴로움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평소에 듣는 우리의 목소리는 성대에서 우리의 몸을 타고 청신경에 전달되는 소리인 반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소리다. 따라서 내가 평소에 말을 할 때 듣는 나의 목소리는 주위 사람들이 듣는 목소리 와 전혀 다른 목소리인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나의 진짜 목소리인가? 이는 청각 인식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 라 다르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 뿐 어느 하나가 진짜라고 주장할 수 없듯, SNS에서 살고 있는 나의 이미지와 현실에서 살고 있는 나의 이미지 중에서 어느 하나가 진짜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 세상에서 셀카의 문제 는 실존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다만, 가상세계에서 실존을 이야기하는 상황에 인류가 적응하는 데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기사는 미래창조과학부와 KISDI가 ICT인문사회 혁신기반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발간하는 ‘ICT인문사회융합동향’ 2015년 3호에 게시된 글입니다. 원고의 저자는 박상현 리틀베이클라우드 이사입니다. 블로터는 KISDI와 콘텐츠 제휴를 맺고 동시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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