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라라 크로프트’로 보는 여성 게임 캐릭터 변천사

2015.11.27

상의로 입은 탱크톱은 복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다. 하의로 착용한 반바지도 허벅지를 절반도 가리지 못한다. 가슴은 유달리 크게 강조됐지만, 반대로 허리는 지나치게 가늘다. 하지만 양손에 든 것은 다름 아닌 권총. 게이머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 캐릭터의 이름은 ‘라라 크로프트’다. 20세기의 마지막에 등장해 지금까지 게이머와 함께 오지를 모험 중인 게임 ‘툼 레이더’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tomb_2_800

마침내 여성이 된 ‘라라 크로프트’

라라 크로프트가 변했다. 손바닥만한 의상 대신 탐험가에게 꼭 어울리는 실용적인 옷으로 갈아입었다. 특정 신체 부위가 유달리 강조되던 모습도 벗어던졌다. 오지를 홀로 모험하는 고난과 역경 속 주인공의 면모가 더 두드러졌다. 무려 20여년 동안 이어진 그의 모험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단순히 의상의 변화에만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라라 크로프트의 변화 속에 게임 업계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툼 레이더’ 시리즈가 성공적인 프렌차이즈로 성장한 덕분에 라라 크로프트는 게임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굴꾼’이 됐다. ‘툼 레이더’의 역사는 2013년 ‘툼 레이더 리부트’를 거쳐 2015년 11월 게임 콘솔 ‘X박스 원’으로 공개된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로 이어진다. 도굴꾼 라라 크로프트는 19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니터 속에서 탐험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2013년 공개된 작품에서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의 모습이 등장한 이후 여기저기에서 짧은 탄식이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시리즈를 대표하는 의상의 변화를 지적했다. 시리즈 전통의 ‘섹시한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는 게 주된 의견이었다. 라라 크로프트의 변화는 가장 최근 작품인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로 이어졌다. 연속된 두 작품에서 라라 크로프트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변화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게임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게임 시나리오 작가 리아나 프래쳇이 그 중심이다. 리아나 프래쳇은 게임 업계에서 여성 노동자가 받는 불합리한 처우에 관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유명하다. 여성 캐릭터가 상징하는 불편함에 대해서도 지적을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2012년 11월 트위터에서 리아나 프래쳇은 “적절한 복장을 한 여성 캐릭터가 희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트윗을 남기기도 했다. 게임 업계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 ‘#원리즌와이(#1reasonwhy)’가 유행하자 리아나 프래쳇이 참여해 남긴 짧고 굵은 문장이다.

리아나 프래쳇이 재창조한 라라 크로프트와 이전 작품의 라라 크로프트를 비교해보자. 기존 ‘툼 레이더’는 퍼즐을 풀고, 적과 대치하는 요소가 게임의 중심을 이루었다. 라라 크로프트는 처음부터 강력한 전사로 등장했으며, 게이머가 맞서야 하는 상대는 복잡한 퍼즐이나 적들뿐이었다.

최신 작품인 2013년 ‘툼 레이더 리부트’에서 라라 크로프트는 오지에 홀로 남겨진 유약한 탐험가로 등장한다. 자연의 위협에 맞서며, 넉넉하지 않은 자원을 활용해 가까스로 위험을 피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라라 크로프트가 이전처럼 비소로 강력한 전사가 되는 것은 게임을 한참이나 진행한 이후의 일이다. 게임을 진행하며 획득한 기술과 도구를 사용해야 비로소 ‘여전사’가 된다.

앞서 설명한 라라 크로프트는 여성의 탈(그래픽)을 뒤집어쓴 전통적인 게임 캐릭터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뒤에서 말한 새로운 라라 크로프트는 스스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는 주체적이고 완성된 여성 캐릭터다. 앞의 라라 크로프트에서 여성이라는 요소는 게임 캐릭터를 디자인하기 위해 고려된 객체에 머무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2015년 11월9일 미국의 라디오 방송 ‘토크 라디오 AM640’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리아나 프래쳇은 라라 크로프트의 변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라는 여전히 아름답고 강력하고 특징적이지만, 이전에 해왔던 것처럼 성적인 부분이 강조되지는 않습니다. 라라가 성적인 배경 위에 있지 않다는 점이 제가 이 게임 개발 프로젝트에 끌린 까닭이기도 하고요. 라라는 객체로서가 아닌 온전한 사람으로서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죠.”

tomb_800

‘툼 레이더’의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왼쪽부터 1996년, 2008년, 2015년)

게임 속 여성은 왜 변화해야 하는가

게임이 이야기 속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은 사회와 게임의 상호 보완을 통해 구조화된다. 게임이 그 속에 사회를 반영하는 콘텐츠를 받아들이면, 게임이 다시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지금은 싱가포르국립대학에서 뉴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강의를 하는 안 마리 슐리너는 1998년 발표한 그의 논문 ‘라라 크로프트는 가짜 폴리곤을 입고 있는가?’에서 게임의 기능 중 하나로 사회화 기능을 주장했다.

안 마리 슐리너는 20세기 후반 세대가 기술이나 문화, 윤리, 지리, 사회계급을 뛰어넘어 게임에 빠져들고 있다고 봤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20세기 이전 세대가 흔히 걸림돌로 생각하던 지리적, 문화적 장벽을 초월해 일종의 통합된 사회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술의 발달과 네트워크의 연결,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국제적인 정보망이 큰 역할을 했다. 게임은 시각적 충격과 다양성을 통해 젊은 세대의 사회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미국의 게이머가 동양의 문화를 게임으로 접하고, 한국의 게이머가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도 게임 덕분에 가능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게임이 젊은 세대의 새로운 사회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는 안 마리 슐리너의 의견을 받아들일 때, 게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위력적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그렇다. 지금까지 게임은 그 구매자 집단이 주로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신체와 특징을 대상화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신체 부위가 강조되는 여성 캐릭터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생각했고, 이야기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주인공인 남성의 조력자 역할에만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혹은 남성 주인공(게이머)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게임은 사회가 축적한 여성과 남성의 분리된 성 역할을 답습하는 동시에, 게임의 구조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 역할을 구분해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고정된 성 역할을 학습하도록 하는 데도 기여해온 셈이다.

doax3_char

‘데드 오어 얼라이브 익스트림3’ 게임 속 여성 캐릭터. 여성 캐릭터의 과도한 성 상품화 문제로 미국 출시가 불투명해졌다.

이제 막 시작된 변화

‘메갈리아’를 전후로 온라인 세상에서는 페미니즘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여성 차별을 거부하는 목소리 또한 뜨겁다. 이 같은 흐름은 국제적이며, 라라 크로프트에서 볼 수 있듯 게임을 비롯한 문화 콘텐츠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이다. 게임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작은 운동인 셈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게임업계에서도 페미니즘 이슈는 ‘게이머게이트’ 사건 이후 중요하게 조명을 받고 있어요. 게임이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관해 여성들로부터 관심을 끌게 된 계기가 된 것이죠. 앞으로 게임 개발 업계에서도 이 같은 의견을 받아들일 필요성에 대해 느끼게 될 것이고, 여성의 변화는 중요한 의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득 게임개발자연대 대표는 게임업계의 작은 변화가 이른바 몇 가지 기폭제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진단한다. 김종득 대표가 말한 ‘게이머게이트’는 2014년 미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된 사건이다. 여성 게임 개발자 조퀸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종의 여성혐오 운동이었다. ‘게이머게이트’ 사건 이후 온라인에서는 여성혐오 문제와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게이머게이트’ 이전에 트위터를 중심으로 발생한 ‘#원리즌와이(#1reasonwhy)’ 운동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더 읽어보세요!

지난 11월19일에는 게임 ‘데드 오어 얼라이브 익스트림3(DOAX3)’의 미국, 유럽 출시가 불투명해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DOAX3’ 공식 페이스북이 북미 출시 일정을 묻는 사용자의 질문에 “북미와 유럽에 출시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획이 없다”는 답변을 남겼기 때문이다. ‘DOA’ 시리즈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격투 게임이다. 이 중 ‘DOAX3’는 2016년 출시가 예정된 상태다. 여성 캐릭터의 비치발리볼 게임으로 기획된 만큼, 캐릭터들의 기획 의도와 목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북미와 유럽에서 게임 출시를 고려하지 않는 까닭으로 게임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은 ‘DOAX3’에 포함된 지나친 여성의 성적 대상화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게임이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게임업계 스스로 깨닫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게임의 변화가 빨리 확산할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게이머와 게임 개발자는 게임이 여성을 다루는 기존 방식에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게임이 오랜 세월 남성의 놀이문화로만 여겨져 왔기 때문이고, 남성 게이머들은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게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모바일게임 시장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익명의 게임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용 모바일게임 아이콘에 게임의 맥락과 큰 관련이 없는 여성 캐릭터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모바일게임 마켓 상황을 살펴보면요, 게임 아이콘에 여자 캐릭터가 등장해야 그나마 사람들이 눌러서 들어오거든요. 일단 게임 설명 페이지에 들어오도록 유도해야 다운로드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많은 게임 개발 업체가 앱 아이콘에 여자를 그려 넣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아이콘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십중팔구 헐벗은 의상에 특정 신체 부위가 강조돼 있다.

김종득 게임개발자연대 대표는 “사실 게임 속 여성의 변화는 거센 저항을 받는 것이 사실”이라며 “현실에서 페미니즘이 받는 저항과 마찬가지로 ‘이게 왜 문제냐’라거나 ‘예쁜 여자가 좋다’는 식으로 변화를 못마땅해 하는 이들이 아직 더 많다”라고 설명했다.

sideway@bloter.net

기술을 이야기하지만, 사람을 생각합니다. [트위터] @Sideway_s, [페이스북] facebook.com/sideways86, [구글+] gplus.to/sideway [e메일] sideway@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