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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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업계에서는 ‘한국형’이 대세다. 한국적인 색깔을 갖고,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국산 콘텐츠라는 뜻일 게다. 짧게 줄여 ‘K’를 앞에 붙여 쓰는 것은 최근의 유행이다. ‘K팝’이 그렇고, ‘K-무크(MOOC, 공개형 온라인강의)’가 그렇고, ‘K-ICT’가 그렇다. ‘K’를 향한 뜨거운 열병이라 하겠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널뛰듯 넘나든다는 점에서는 전염병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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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ckr, Republic of Korea, 2012, CC BY-SA 2.0

여하간 ‘한국형’의 기원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노랫말에서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라며 청중의 정체성을 따져 묻던 가수 배일호의 노래 ‘신토불이’가 등장한 1992년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살짝 바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며 목청을 높이던 2000년대 초반부터였을 수도 있다. 기원은 알 수 없되, 이 빌어먹을 전염병은 모 전 대통령 부인의 50억원짜리 ‘뉴욕 한식당 사업’이라는 처참한 모습으로까지 실로 유구한 세월을 이어오며 연명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당연히 소프트웨어 산업에도 K는 있다. 콘텐츠 업계보다야 비교적 그 기원을 밝히기도 쉽다. 때는 1988년. 당시 정부는 우리 손으로, 이 땅에서 만든 신토불이 운영체제(OS)를 갈구했다. OS 개발 사업이 국가 연구과제로 지정됐고, 3년여 뒤인 1991년 완성돼 사용자와 만날 채비를 끝냈다. 바로 ‘K-도스(DOS)’다. 하지만 K-도스는 사용자와 공급업체로부터 외면받는다. 이미 MS-DOS라는 좋은 OS에 모두들 큰 불만이 없었던 탓이다. 프로젝트가 사라진 시점이 1994년 정도였으니 시작부터 사망선고에 이르기까지 불과 6년도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K-도스뿐일까. 한국무선인터넷표준화포럼(KWISF)이 통신사의 각기 다른 플랫폼을 통합하고자 한국형 표준 플랫폼 ‘위피(WIPI)’를 처음으로 들고 나온 것이 2001년의 일이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부요(BOOYO)’라는 이름의 한국형 공개 소프트웨어 표준 리눅스 배포판을 소개한 것이 2005년의 일이다.

83억원 예산이 투입됐다는 공인인증전자주소 전자메일 기술 ‘샵(#)메일’은 또 어떠한가. 보안성이 뛰어난 온라인판 등기우편이라는 거창한 수사를 동원해 국제 표준을 무시하고 밀어붙인 실패작 아니던가. 2015년 국정감사에서 전병헌 의원실이 밝히길, 2014년을 기준으로 일반 개인사업자의 샵메일 발송 건수가 단 1건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납세자 면을 볼 낯이 과연 남아있을지조차 의문이다.

K-도스와 위피, 부요, 샵메일. 이 밖에 많은 한국형 소프트웨어가 손에 꼽기도 어려울 만큼 등장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이들이 남기고 간 것은 어쩌면, 사용자의 스트레스와 ‘예산 먹는 하마’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같은 한국형, 혹은 K-소프트웨어는 마치 숙명과도 같이 다음과 같은 뚜렷한 목표와 방향성을 공통적으로 챙긴다.

• 시장의 필요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

• 국제 표준은 엿 바꿔 먹어야 한다.

이 같은 목표를 향해 늘 한결같고 우직하게 내달린다는 점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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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티맥스 윈도우’ 공개 현장

앞서 설명한 것이 정부가 주도한 한국형 ‘삽질’이었다면, 다음에 나오는 것은 기업이 이끈 한국형 ‘무리수’다. 기업이 저 홀로 앞장섰다는 점만 보면 적어도 세금을 낭비한 것은 아니니 넉넉한 수준에서 양해할 수 있겠다. 허나, 그 삽질의 양상은 정부가 주도한 그것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둘은 민관 사이의 데칼코마니다. 한국형 소프트웨어 삽질의 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티맥스의 한국형 OS ‘윈도우9’를 어찌 빼먹을 수 있겠는가.

견실하기로는 정평이 나 있던 중견기업 티맥스는 2009년 7월 실로 성대하게 삼성동 모 호텔을 빌려 직접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한국형 OS 발표회를 개최한 바 있다. 국내 IT 업계의 눈과 귀가 쏠렸음은 물론이다. 자체 개발한 한국형 OS를 처음으로 발표하는 자리가 무척이나 감개무량했음은 티맥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행사를 인터넷으로 생중계까지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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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다를까. 티맥스가 만들었다는 윈도우9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실행하는 데는 수 분이 넘게 걸렸다. 웹브라우저는 클릭만 했다 하면 먹통이 됐고, 동영상 하나도 제대로 재생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미완성 아니냐”라는 불만이 빗발쳤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미완성은 아니었다. Win32 호환 OS인 ‘리액트(React)OS’를 참조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라이선스 위반 혐의까지 붙었다.

말하자면, 티맥스 윈도우 사건은 견실한 중견 소프트웨어 업체가 사용자를 상대로 벌인 거대하고 얄팍한 사기극이었다. 당시 티맥스는 티맥스 윈도우가 국내 IT, 소프트웨어 업계에 전무후무한 코미디로 기록되리라는 것을 예상이나 했을까. 티맥스의 윈도우9는 그날 이후로 ‘K-코미디’가 되고 말았다.

2015년 12월1일 티맥스가 ‘티맥스OS’를 설립했다. OS 개발을 위해 별도의 신규 법인이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티맥스는 PC나 모바일 기기 등을 아우르는 통합 OS 개발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12월 중으로 공식적인 자리도 만들 예정이라고 하니 허언은 아닌 셈이다.

티맥스는 소프트웨어 업체다. 소프트웨어 업체가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가수가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티맥스의 OS 개발 재도전 선언에 딴죽을 걸 하등의 이유는 없다. 하지만 2009년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손사래 치며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티맥스가 윈도우9를 소개하며 강조한 것은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우수성이 아니라 행사장 포디엄 위에 자랑스럽게 세워둔 전통 북과 행사장 전체에 줄기차게 내보냈던 ‘아리랑’ 가락 뿐이었다. ‘국산’이니 ‘한국형’ 같은 수사가 티맥스 윈도우 두 번째 버전의 전부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만약 이번에도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하다. ‘한국형’이 죽어야 한국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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