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국계 IT 영업사원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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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가상극을 하나 써볼까 한다. 현실같은 가상이다. 아니, 가상같은 현실인가… 편안하게(?) 감상하시길. 

들어간다.

나는 외국계 IT기업에서 네트워크 장비를 판매하고 있는 영업사원이다. 하지만 오늘 따라 담배맛이 유난히 쓰다. 이 놈의 담배를 끊어보려고 했는데,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지 쉽지가 않다. 세상살이가 빡빡하다.

정부 프로젝트가 하나 떴다. 1000억원 규모의 큰 프로젝트다. 절대 놓칠 수 없다. 이런 큰 프로젝트 놓쳤다가 우리 장비 안좋은 걸로 소문나기 십상이다. 잘해 보자. 아자, 아자.

언제나처럼 대형 시스템통합(SI) 업체들이 앞에 나섰다. 정부는 맨날 SI업체를 내세운다. 안그래도 될 것 같은데 정말 변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뻔한 싸움이 됐다. 가장 큰 규모의 SI업체 두 곳이 덜커덕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바람에 결과는 싱겁게 끝났다. 두 회사가 손을 잡으면 누가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계속 이러려나,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프로젝트 사업자는 결정이 됐고,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관건은 SI업체와의 가격협상이다. 이들이 사업권을 따냈으니, 장비공급 결정권은 이들이 쥐고 있다. 얼마나 또 깎아줘야 할지. 이번에는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데 경쟁사가 얼마나 내지를지 속이 탄다. 아마 경쟁사 담당자도 나처럼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갈 것 같다. 정말 제명에 못살지…

정부가 배정한 관련 장비 예산은 대략 50억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근데 막판까지 SI업체 담장자는 "당신네 경쟁사는 15억원을 불렀다"고 귀띔해준다. 혼자 고민하다, 보스에게 물어본다. "그 인간들은 또 그렇게 하냐. 어떻게 하겠어. 경쟁사엔 넘길 수 없고. 13억원이 마지노선이라고 해줘. 그 이하는 안돼." 보스는 단호했다. 

13억원을 불렀다. 정말 많이도 내렸다. 그래도 할 만큼 했다. 맨날 이렇게 깎아대니 고객들이 나중에 기술지원해달라고 해도 그냥 전화로 대충 처리한다. 우리도 남겨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기술지원한다고 사람 보내고 하면 남는 게 없다. 제대로 내고 지원을 해달라고 해야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다. 하늘이 노랗다.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간다. 담배가 어디에 있더라. 윗사람이 부른다. 불호령이 떨어질 건 뻔하다. 경쟁사가 얼마나 불렀는지도 파악도 못하고 프로젝트 하나 날렸다고 노발대발이다. 아, 이놈의 인생. 나도 잘나가는 사업군으로 가고 싶다. 이놈의 공공 프로젝트는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
 
경쟁사는 10억원을 불렀단다. 대단한 놈들. 그렇게 하고도 남는 게 있나. 뺏기는 것보다 일단 그거라도 챙기는게 당장이야 실속은 있긴 하겠지만 출혈 경쟁도 하루이틀이지 정말 못해먹겠다. 신문을 보니 자기네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수주했다고 보도자료를 낸 모양이다. 얍삽한 녀석들. 하여간 포장술은 대단해.

그런데 더 큰 충격은 다른 소식이었다. 그 SI업체가 정부와 45억원에 납품 계약을 했다는 거다. 그럼 뭐야, 가만히 앉아서 전화 이곳 저곳 걸어서 가격 인하 싸움붙이고 35억원을 거져 챙겨먹었다는 것 아닌가. 대단한 사업 모델이다. 저런 사업모델을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지.

SI업체들은 어차피 외국기업 물건인데 깎으면 깎을수록 예산 절감되고, 우린 수익 올리고 좋지 않느냐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럼, 난 우리나라 돈 빨아가는 매국노인가? 아, 갑자기 정체성 혼란이다. 뭐 하루이틀도 아니고. 나야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지만 이게 비단 우리만 당하는 현실이 아닌게 문제지. 쩝.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들이나 국산 네트워크, 서버, 보안 업체들도 모조리 당하고 있는데, 그 때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 걸로 봐서 저 양반들 생각에 마냥 동의할수도 없다. 그나마 우린 고객이랑 유지보수 계약이라도 직접 체결하는데 국산 장비 업체들은 그것도 안하는 것 같다. SI 업체들이 고객과 유지보수 계약 체결해 놓고 정작 물건 납품한 소프트웨어나 장비 회사에겐 제대로 돈도 안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

국산 장비업체에 다니는 친구녀석 얘기가 생각난다. 고객들은 수시로 "문제가 생겼으니 빨리 와서 이것 좀 고쳐라"고 한단다. 그럼 녀석은 이렇게 대답하지. "저희랑은 유지보수 계약 안하셨잖아요?"라고… 그러면 들려오는 오는 소리 "뭔 소리야 그 때 SI업체랑 했잖아. 그건 그거고 니네들 담엔 물건 안팔거야? 죽고 싶어?"라는 소릴 밥먹듯이 듣는단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대형 SI업체들 횡포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는데, 뭐 그게 그 사람들만의 문제인가? 우리나라 IT 하는 사람들 죄다 걸린 일이지. 그나마 대통령이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많아서 그럭 저럭 불만을 토로하면 정부가 받아주는 시늉이라도 해서 다행이지만 그게 뭐 오래 가겠어?

새해가 되니까 신문과 방송에 지난해 SI업체들 매출과 수익이 엄청 올랐다고 대문짝 만하게 나왔네. 올해는 IT서비스 회사로 탈바꿈하면서 매출을 더욱 올리겠다고 한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담배나 피워야지.

이러니 IT 전문업체들이 제대로 크기나 하겠어?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게 죄라면 죌까? 에휴~~ 그래, 그나마 난 배부른거야. 난 외국계 기업에 다니니까 말야. 국산 업체들은 정말 장해. 이런 환경에서도 끝까지 뭔가 해보겠다고 저 난리 굿을 펴는 것을 보니, 친구 녀석 불러서 소주나 한잔 사줘야 겠어.
 
어, 또 다른 정부 프로젝트 떴네. 이번엔 얼마나 긁어야 할까? 아, 두통약이 어디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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