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B씨] ‘인간 vs 인공지능’, 누구를 위한 대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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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1일 ‘제2의 세기의 대결’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열린 행사가 있습니다. 국제통역번역협회 (IITA)와 세종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가 공동 주최한  ‘인간 vs 인공지능(AI) 번역대결’ 행사입니다. ‘알파고’에 이어 인간과 AI의 두 번째 대결이라는 주최 측의 홍보가 더해지면서 대회는 뜨거운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주최측이 내린 결과는 인간의 승리.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의 압승이었다’라는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동시에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에서 진 인간이 ‘정신 승리’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대결 방식을 두고 공정하지 않다는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행사 메인 포스터, 세종대학교 제공

행사 메인 포스터, 출처 : 세종대학교

이 대결은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 번역사 4명과 구글 번역기, 네이버 번역기 ‘파파고’, 시스트란 번역기 등 총 번역기 3가지가 제한된 시간 안에 영어와 한국어 지문을 번역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번역기는 10분 동안, 인간은 50분 동안 문제를 번역했습니다.

대결 직후 번역 평가 점수가 공개된 부분에 대해서도 평가 기준이 사람에게 맞춰져 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번역기 순위에 대한 추측성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현장에 쏟아진 언론의 관심이 높았음을 행사가 끝난 뒤 쏟아진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현장에 쏟아진 언론의 관심이 높았음을 행사가 끝난 뒤 쏟아진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주최측도 참여 업체도 “불공정하다” 한목소리

이런 기사 분위기에 행사를 연 주최측도 이해는 하지만 다소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번역 분야에서 AI가 얼마나 인간의 능력에 가까워졌는지 비교해보자는 취지에서 행사를 진행했는데, 여론과 언론보도가 부정적으로 나오자 당혹스럽다는 입장입니다.

급기야 국제통번역협회와 세종대 측은 책임을 서로 미루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선을 그은 건 국제통번역협회입니다. 강대영 국제통번역협회 국장은 <블로터>와 전화통화에서 “주최는 우리(협회)가 한 것이 맞지만, 공정성 문제 때문에 출제 및 평가는 심사 위원에게 일임했으며, 우리는 진행만 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불공정성 논란이 나오는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기계처럼 빨리 번역할 수 없습니다. 기계와 인간을 일대일로 대입한다면 본질에서 불합리합니다. 공정한 조건은 제한 시간을 동일하게 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니 한계라고 잡고 갔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는 것으로.”

인간과 번역기의 대결은 분야 특성상 완벽히 공정한 여건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번역엔 명확한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협회 측 역시 출제된 문제 중 인간 번역사한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도 있었다며 대회를 둘러싼 불공정성 논란을 인정했습니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홍보실장 역시 이번 행사에 대해 진행만 했을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문제 제출과 평가를 세종대에서 맡긴 했지만, 그런 부분은 모두 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가 했다고 답했습니다.

“곽중철 교수가 한국 번역업계에서 누구도 토 달 수 없을 만큼 최고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모든 걸 맡겼습니다. 행사 진행도 구글에는 연락했는데 답이 없었고, 네이버는 협회 측에서 연락한 것으로 알았으며, 시스트란은 행사 소식 듣고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국제통번역협회와 세종대학교 측 모두 행사는 주최했지만, 자세한 행사 내용이나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주최한 곳은 있는데, 정말 주최했다고 얘기하는 곳은 없는 셈이지요.

행사를 두고 참여 업체로 거론된 구글, 네이버, 시스트란도 불만이 많습니다. 구글과 네이버는 행사에 자신들이 ‘참여’했다는 주최측 말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참여 의사를 밝힌 시스트란 역시 행사 진행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번 대결에 이용된 서비스업체들

이번 대결에 이용된 서비스업체들

구글 관계자 : 주최 측으로부터 참관 신청을 받았지만 제삼자가 주최한 행사여서 참관하지 않기로 했다.

네이버 관계자 : 행사에 대해 사전 연락을 받았지만, 행사와 파파고의 서비스 취지가 맞지 않아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 행사를 지원, 후원하지도 않았고 현장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이번 행사에 대해 밝힐 공식 입장이 없다.

이들은 왜 이번 행사와 거리를 두는 걸까요? 이번 대회에 사용된 네이버 번역 서비스 ‘파파고’는 장문의 지문을 번역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파파고 서비스는 정식 버전이 아니라 베타 버전입니다. 200자까지만 인공신경망 번역(NMT) 방식을, 그 이상 넘어가면 통계 기반 번역(SMT) 방식을 적용합니다. 따라서 인공신경망 번역 실력과 인간 번역가의 실력을 겨루는 이벤트의 성격과 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이버 번역기에서 200자가 넘어가면 이런 쪽지창이 뜹니다. (사진=네이버 화면 갈무리)

네이버 번역기에서 200자가 넘어가면 이런 쪽지창이 뜹니다. (사진=네이버 화면 갈무리)

번역 업계 관계자는 “달리기 시합으로 비유하자면, NMT 방식은 성인 남성의 체력을 지녔고 SMT 방식은 갓난아기의 체력을 가진 것과 같다”라며 NMT와 SMT의 차이점을 설명했습니다.

이런 지적은 행사 시작 전에 이미 나왔습니다. 파파고에서 한 번에 번역되는 글자 수가 200자가 넘어가면 행사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구글, 시스트란과 비교해서 네이버 파파고에 불리한 경쟁이 아니냐는 의문이 현장에서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해 주최측은 “200자씩 끊어서 대결을 진행하겠다”라고 답했습니다.

사진=21일 행사 생중계 영상 갈무리

사진=21일 행사 생중계 영상 갈무리

하지만 실제론 달랐습니다. 이번 대결이 제시한 지문은 총 4개입니다. 모두 200자를 훨씬 넘는 길이로, 주최측은 이 지문을 200자씩 잘게 쪼개지지 않은 채 뭉텅이로 번역기에 입력했습니다. 한영 지문 중 하나인 위 지문을 번역하면서 주최 측은 638자를 한 번에 입력했습니다.

시스트란 역시 대결 과정과 결과에 불만을 제기합니다. 문제 출제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지적입니다. 우선 비문학 영역에서 출제된 레고 관련 뉴스 기사가 열흘 전인 2월10일자 기사입니다. 비문학 문제 중 수필이 출제된 점도 공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김유석 시스트란 상무는 “시스트란은 당일 외신 기사를 즉석에서 택해 번역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라며 “번역 기술은 방금 보도된 기사를 빨리 읽는 데 있으며, 문학을 번역기로 돌려서 보는 사람은 없는 만큼 사람에게 유리한 결과를 내기 위한 대결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최측은 “출제 및 평가를 심사위원에게 일임했다”라고 답했습니다. 출제를 담당한 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출장 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행사 주최가 대결 내용을 당일까지 살피지 않고, 특정 교수 한 명에게 모든 진행을 맡긴 점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대결’ 아닌 ‘활용’에 방점 찍어야

“기계가 번역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담당해야 할지, 또 번역 완성도 등이 인간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하는 차원에서 기획하게 됐습니다. 구글, 네이버, 시스트란, 누가 1위였는지 번역기 순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번역기 사용은 결국 개인의 선호 기호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국제통번역협회 관계자가 밝힌 이번 행사 기획의도입니다. 비록 행사는 참여한 기업도, 주최한 협회와 학교도 만족하지 못했지만, 취지는 좋았습니다. 다만, 기계와의 대결에 주목하다 보니 행사의 본래 목적을 잃었을 뿐이죠.

같은 AI를 적용하더라도 문어체 영역을 주로 다루는 번역 서비스도 있고, 실생활 대화를 돕기 위해 제공하는 구어체 영역 통역 서비스가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번 대회는 공정함과 거리가 멀었을지 모릅니다. 다양한 영역을 가진 번역 분야를 단순히 ‘번역’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진행하기란 어려우니까요.

사진 = Pixabay. Tumisu. CC0 Public Domain

사진 = Pixabay. Tumisu. CC0 Public Domain

주최측과 여러 업체, 관계자의 말처럼 인간과 기계의 역할을 따로 분리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어땠을까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있는 행사가 됐을 지 모릅니다.

집단지성을 이용한 번역 서비스를 운영하는 이정수 플리토 대표는 이번 대회를 두고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번 대회의 공정성과 인간과 기계의 장단점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계 번역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시대마다 달라지는 문화적 의미와 뉘앙스를 읽어내는 건 인간의 영역이죠. 동시에 기계번역이 인간에게 가져올 편리함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결국, AI는 사람의 번역 데이터를 기반으로 발전하고, 기계의 도움으로 통번역가들은 서비스의 편의를 얻을 수 있으므로 둘의 공존이 불가피하죠.”

지난해 인간과 퀴즈대결을 벌인 국산 AI ‘엑소브레인’ 개발을 담당한 ETRI 박상규 박사는 번역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전했습니다.

“AI 번역이 아직 사람을 대체할 수준은 아니지만, 장점은 있어요. 인간처럼 정확하게는 못해도 빠른 시일 내에 많은 문장을 번역할 수 있다는 점,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서비스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과 AI가 서로 경쟁이 아닌, 상생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결 결과처럼 기계의 빠르기와 생산성을 활용하면서 자동번역기가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을 통번역사가 편집하면 훨씬 생산성 높은 번역 작업이 이뤄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