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중독 문제, 본질은 게임이 아니다”

정신과의사와 심리학자가 말하는 게임 중독

가 +
가 -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1년 유예한 가운데,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생산적인 논의 과정 없이 1년 뒤에도 같은 논란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보기엔 명확한 기준이 없고, 사회에 미치는 부작용이 클 거라는 게 비판의 요지다. 거시적 관점에서는 사회적 병리 현상을 게임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4월24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에서는 게임 중독을 주제로 한 강연이 연달아 나왔다. 25일에는 한덕현 중앙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뤘고, 26일에는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소 소장이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게임 중독 문제를 이야기했다. 두 강연에서 공통으로 지적된 사항은 게임 중독 문제의 본질은 게임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게임을 질병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90년대의 관점에 머물러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됐다.

 

90년대 인터넷 중독 논란의 되풀이

WHO는 오는 5월 예정된 국제질병분류 개정(ICD-11)에서 게임 장애(gaming disorer)를 질병으로 등재할 예정이었다. 게임 장애의 시초는 90년대 인터넷 중독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미국 피츠버그대학의 킴벌리 영 박사는 인터넷 채팅에 빠진 주부의 사례를 토대로 인터넷 중독 개념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알콜 중독 진단 기준에 인터넷을 대입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인터넷 중독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지만, 인터넷 중독에 대한 진단 기준은 제각각이었다. 얼마나 인터넷을 오래 해야 중독인지 기준은 명확하게 마련되지 않았다. 또 인터넷으로 채팅, 쇼핑, 게임 등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이질적인 행동 등을 뭉뚱그려 인터넷 중독으로 진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인터넷 중독은 현재 정신과 진단체계 내의 정식 장애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덕현 중앙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임 중독 논란은 인터넷 중독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진단 기준과 진단 역치가 불명확하다는 얘기다. 미국 정신의학 협회(APA)가 발간하는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최신판 ‘DSM-5’는 인터넷 게임 장애를 섹션3에 추가했지만 실제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기까진 더 많은 연구 및 임상실험이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덕현 교수는 DSM-5에 인터넷 게임 장애가 정식 질환에 오르지 못한 이유로 ▲진행된 연구들의 단점이 많음 ▲인터넷 자체가 문제인지 인터넷을 통한 행동과 경험이 문제인지 불명확 ▲종적 연구가 아닌 횡적 연구만 존재 ▲우울증, 불안장애 등 공존 질환과 높은 관련성 등을 꼽았다.

WHO의 ICD-11 개정안 초안은 게임 장애에 물질 중독과 유사한 기준을 적용했지만 중독의 핵심 증상인 ‘금단 현상’과 ‘내성’을 진단 기준에서 제외했다. 장애로 진단하기에 불리한 기준을 제거했다는 얘기다. 한덕현 교수는 “WHO의 진단 기준에서 벗어난 게임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며 “(WHO의 게임 장애 진단은)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며 게임 자체의 문제인지 게임을 하는 이용자의 문제인지에 대한 고민이 안 됐다”라고 말했다.

 

WHO ICD-11 개정안 초안의 게임 장애 정의와 진단 기준

  •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하여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게임을 지속하거나 반복하는 게임 행동 패턴
  • 게임에 대한 통제 기능 손상이 손상됨
  • 삶의 다른 관심사 및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함
  •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중단하지 못함
  • 게임에 중독된 행동 패턴이 개인, 가족, 사회, 교육, 직업, 기타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정도여야 하며 진단을 위해 최소 12개월의 기간 동안 증상이 나타나야 함

게임 말고 즐길 게 없는 사회가 문제

게임 말고 즐길 게 없는 사회가 문제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장주 소장은 게임 중독은 결국 게임이 아닌 사회의 문제라고 짚었다. 이 소장은 게임 중독 문제를 쥐 공원 실험에 빗대어 설명했다. 쥐 공원은 캐나다의 심리학자 브루스 K. 알렉산더 박사가 중독의 원인을 짚기 위해 행한 실험이다. 넓고 편안한 환경의 쥐 공원에 놓인 쥐와 비좁은 실험실에 격리된 쥐 두 그룹으로 나눠 모르핀을 탄 물과 일반 물을 함께 제공해 섭취량을 비교하는 내용이다. 실험 결과 쥐 공원의 쥐들은 일반 물을 더 선호했으며, 모르핀에 중독된 쥐들도 모르핀이 든 물을 적게 마시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환경이 중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얘기다.

이 소장은 “쥐 공원 실험은 청소년들이 게임에 중독되는 이유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라며 “게임 중독을 병리 현상으로 접근해, 게임 장애로 진단된 사람을 좁은 공간에 놓고 환자로 관리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싸고 편리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또 게임 장애를 질병으로 등재하는 일이 유용성보다 유해성이 더 크며, 진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효성 없는 장애 보유자를 양산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킬 거라고 덧붙였다.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소 소장

정치권과 게임 개발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게임 중독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 구도에서 정치가 제대로 된 중재 역할이나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치적 중재가 제대로 안 되면 결국 논리적 합당성과 별개로 갈등이 지속될 거라는 전망이다. 이 소장은 “게임 개발사가 스스로 미래 지향적인 가치와 비전을 보여주고 게임이 사회에 어떻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네티즌의견(총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