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베르너 홀츠바르트 글, 볼프 에를브루흐 그림, 사계절 펴냄
* 이럴 때 강추!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뒤통수 맞아 황당한 날, 맞을 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뒤통수라 생각할수록 분한 날, 따지고 싶은데 딱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잠 안 오는 날.
‘그런 날 왜 하필 애들 책을 봐?’라고 물으신다면, 올해 7살 난 아이의 그림책을 함께 보다 보니 문득 그 속에 인생이 있더라고, 애들 책 무시할 거 아니더라는 말씀 드리고 싶다. 그 진기한 경험을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됐다는 것도.
상상해 보시길. ‘누가 내 머리에 똥을 싸는’ 것보다 더 기막히고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인 두더지가 그런 불운을 당했다. 해가 떴나 안 떴나 보려고 모처럼 땅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마른 하늘에 똥 벼락’을 맞았다.
“이게 뭐야!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
그래서 책 제목이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다. 1990년 독일에서 출판된 이래 무려 28개 언어로 번역됐고 국내에서만 100만부 넘게 팔린 ‘그림책계의 스타’다. 아들이 유난히 똥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똥에 관한 책을 사러 갔다가 “그런 (더러운 소재를 다룬) 책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베르너 홀츠바르트가, 기어이 ‘똥 책’을 직접 만들고야 말겠다며 내용을 구성해 자신이 광고기획사에서 일할 때 삽화가로 인연을 맺은 볼프 에를브루흐에게 그림을 부탁했단다. 그림책이니까 아무래도 그린 사람이 더 유명한데, 볼프 에를브루흐는 (그 까다롭고 받기 힘들다는) 독일 아동문학상 수상작 <아빠가 되고 싶어요>(1993년)를 비롯해 철학적이고 심오한 주제를 상상력 넘치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라고 하더라.
아무튼 똥 벼락을 맞은 두더지는 사건의 증거물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머리에 똥을 이고 범인을찾아 나선다. 지나가던 비둘기에게 묻는다.
“네가 내 머리에 똥 쌌지?”
비둘기는 “아냐, 내 똥은 이렇게 생겼는걸”하며 하얀 물똥을 ‘찍’ 갈겨 한방에 결백을 증명한다.
이런 식으로 말, 토끼, 염소, 소, 돼지 등 사건 용의자들을 차례로 심문한 두더지. 의문이 풀리지 않자 ‘전문가’인 파리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세상 모든 똥을 섭렵한 이 능력자는 “재촉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라”며 침착하게 증거를 분석한 뒤 ‘개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똥은, 아니 증거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CSI 그리섬 반장이 말했다!) 두더지는 마침내 ‘흐흐흐 다 주거떠!’라는 표정을 지은 채 짧은 팔다리를 흔들며 힘차게 걸어간다.
그림 1. 범인을 짐작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띈 채 걸어가는 우리의 두더지.
베르너의 아들처럼, 우리 아이도 이 책이 펼쳐 보인 ‘똥의 향연’에 순식간에 매료됐다. 동물들의 똥이 제 똥과 다르게 생겼다는 것, 뭇 생명이 저마다 다른 똥을 눈다는 걸 태어나 처음 알았으니 신천지를 발견한 기분이었을 게다. “오도당 동당 초콜릿 똥!” “쿠당탕 탕탕 사과 똥!” 운율까지 맞춰 ‘똥 타령’을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읽어달라고 졸랐다.
그림 2. 책에는 큰 글씨와 작은 글씨가 번갈아 나온다. 큰 글씨만 읽으면서 책장을 넘겨도 그림 덕분에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이가 한글을 몰랐을 땐 큰 글씨만 읽으면서 슬쩍슬쩍 책장을 넘기곤 했다^^) 작은 글씨는 동물들이 똥 싸는 모양을 재미있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굳이 작게 써서 괄호 안에 넣어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책은 아이들이 (똥)그림을 보면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느끼는 것이니 작가의 묘사는 그저 참고만 하라는, 저자들의 깊은 뜻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나 역시 이 책에 매료됐다. 여러 번 읽다 보니 그날 기분에 따라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속이 답답한 날엔 ‘세상사도 니 똥 굵다, 니 똥 샤프심이다 심증만 갖고 왈가왈부 말고, 내 똥 이렇게 생겼다고 단순 명쾌하게 보여줄 순 없는 것일까’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똑같이 풀 먹는 동물들도 다 다른 똥을 싸는데, 같은 밥 먹는다고 누구나 같은 똥 쌀 거라는 편견을 버리자’며 자못 비장해진 날도 있다.
특히 내게 깊은 울림을 준 대목은, 유머와 반전이 빛나는 책의 마지막 장이었다.
그림 3. 대죄를 짓고도 태평하게 낮잠을 쳐 자는 ‘뚱뚱보 한스’의 저 뻔뻔한 낯짝을 보라.
마침내 찾아낸 범인은? 두둥! 정육점 집 개 ‘한스’다. 두더지가 한스의 집(개 집) 위로 올라갔다는 설명과 더불어, 책에는 ‘엥?’하는 표정으로 이마 위에 떨어진 작은 곶감씨 같은 물체를 올려다보는 한스가 클로즈업 된다. 대책 없이 큰 한스의 얼굴과 터무니없이 작은 두더지 똥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며 ‘픽’ 웃음이 난다.
한스를 응징한 두더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땅 속으로 사라진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한스는 아마 그 곶감씨 같은 것이 두더지 똥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행여 안다고 해도, 두더지가 왜 하필 자기 이마에 똥을 눴는지는 절대 모를 것이다. 대체 이걸 복수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일년쯤 똥을 싸서 모아두었다가 한스가 두더지 똥무덤에 코를 처박게 만들든가, 가장 지독한 똥을 싸는 돼지더러 “그렇게 아무데나 똥 싸지르고 다니면 돼지 똥 벼락을 맞을 줄 알라”고 경고해 달라며 뇌물이라도 쓰는 게 복수다. 무릇 ‘내가 당한 아픔과 고통, 너도 똑같이 당해보라’가 복수의 기본 정신이니,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의 명대사가 “내 꽃밭 망쳐 놓고도 니 꽃밭 무사할 줄 아느냐”인 건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치사회적으로 외연을 넓히면 이렇게 바뀐다.
“니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무너뜨렸으니, 나도 니 땅에 폭탄을 터뜨려 끝장을 내주마!”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보는 이를 참담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다. ‘우리가 이렇게 유치하고 희망없는 존재들인가, 젠장 기분 더럽다.’ 막장 드라마와 부시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두더지는 정말이지 쿨하다. 어느 날 갑자기 똥벼락을 맞았고, 황당하고 분하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따져본다. 분노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 가장 큰 법이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사그라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도 그제야 선명해진다.
그러니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는 두더지의 물음 뒤에 생략된 말은 ‘똥 싼 놈 찾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가 아니라 ‘(진실이) 궁금해.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어’다. 이 둘 사이엔 태평양만큼이나 넓은 간극이 있다. 절망과 희망이라는.
두더지는 한스를 섣불리 용서하거나 복수심에 불타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 쿨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런데도 한스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아무데나 똥을 싸지르고 다닌다면, 이 동네 두더지들은 물론 개구리, 지렁이, 뱀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똥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사건이 거듭돼 동네가 시끄러워지면 돼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한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낼지 모른다. ‘연대’는 약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유익하고 희망적인 방법이니까.
뒤통수 세게 맞아 억울하고 분한 날, 나는 ‘두더지처럼 쿨하게 가자’고 생각하며 남몰래 이 책을 꺼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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