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의 탄생,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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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컴 붕괴 이후 IT 업계의 구원타자로 나선 팀 오라일리가 ‘개방, 공유, 창조’의 ‘웹 2.0’ 패러다임을 내세운 이후 ‘오픈’은 트렌드의 급물결을 탔다. 나아가, 구글이 검색 지존으로 올라서고 IT 업계의 태양이 되가자 오픈은 이제 하나의 질서이자 법칙으로 굳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역사적인 흐름을 생각해보면 오픈은 운석이 떨어져 내린 충격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야 발견한 ‘오래된 미래’다. 우리가 국가라는 새로운 조직 관리의 틀을 발견하고, 그 기반 위에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교환의 원리를 정립하기 이전부터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공동체’로서 생활해 왔으며 그 ‘공동체’를 통해서 ‘공유지’를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공동체 자치에 의한 공유지 관리에 오늘날 회자되는 오픈의 철학, 비전, 그리고 질서가 담겨있는 것이다.

1968년으로 돌아간다.

그 해, 생물학자 가렛 하딘이 저명한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주장은 목초지, 물고기, 광물 등과 같은 ‘공유지'(commons resource pool)의 관리는 일괄적으로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되며 참여자의 강력한 합의 하에 관리되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목초지, 물고기, 광물 등의 ‘공유지’는 정부 아니면 시장이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정부 규제의 독이 심하면 시장 효율성의 약을 쓰고, 시장의 그림자가 짙으면 정부가 다시 질서를 잡는 것이다. 사람의 ‘상호 작용’이 아닌 조직의 ‘질서’가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2009년에 여성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니애나 대학의 엘리노어 옴스트롬이 <집단 행동과 자치 제도>(Governing the Commons)라는 책을 통해 스위스의 목양지, 일본의 숲, 스페인과 필리핀의 관개 관리를 예로 주장한 것처럼 꼭 그 흑백논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3의 길이 있다. 그 것은 그 같은 공유지를 ‘지역’의 공동체’가 관리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 관리가 항상 우월한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의 범위가 명확히 규정되고 갈등 해결의 매커니즘을 공동체가 가지고 있고, 그리고 참여자들의 결과물에 대한 책임 의식이 동반할 경우에 공유지 관리는 공동체가 더 우월하다.

예를 들어 아마존 밀림이 정부에 의한 규제나 시장에 의한 사유화에 의해서 더 우월하게 관리되는 것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자연 자원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공동체에 의한’ 관리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지금 소셜 웹 환경의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정보재, 콘텐츠들도 위와 같은 ‘공유지’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적으로 정보재를 설명해보면, 정보재는 내가 소유한다고 남이 소유하지 못할 것은 아니며(비배타성), 그러나 내가 소유할 경우 남보다 우월한 경쟁력을 가질 수는 있다(경합성). 따라서 경제학이 이야기하는 ‘공유지'(commons)의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프트웨어를 비롯해서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는 정보재, 콘텐츠가 항상 정부 혹은 시장에 의해서 관리되거나 소유될 때 더 나은 방식으로 관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984년 당시 대표적 운영체제였던 유닉스(Unix)의 상용화에 대한 반대 운동이 있었다. 이는 정보 공유지(knowledge as commons)의 사유화에 대한 저항 움직임이었다. 이 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리처드 스톨만이 1985년에 발표한 ‘GNU 선언문'(The GNU Manifesto)은 그 운동을 주도한 해커 정신을 잘 보여준다. 선언문에서 스톨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가 사회에 공헌하는 것은 오직 그 결과를 사회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예언자 스톨만과 그의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너무 고결했다. 그가 유닉스에 저항해 만든 GNU라는 대안 운영체제가 사회나 산업에 기여한 바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스톨만은 이것이 단순한 대안 운영체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움직임이길 원했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영어 이름은 ‘Free Software’인데, 이 것은 영어 원어상으로는 가격이 ‘공짜’라는 의미와 ‘자유’로운 권리를 동시에 담고 있다. 당연히 스톨만은 후자를 주장했지만, 사실상 ‘상업화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공짜’에 대한 명백한 선호도 있었다. 물질을 초월한 정신적 의미를 담은 것이다.

공짜와 자유라는 두가지 의미는 리누스 토발즈와 그의 뒤를 따르는 전세계 프로그래머들로 구성이 된 GNU/리눅스 프로젝트에 의해서 구분되기 시작한다. 1991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90년대 중후반에 이르자 스톨만의 ‘독점적’ 소프트웨어 개발과 이용에 대한 반대에는 동감하지만, ‘상업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타협하기를 원했다. 현실을 본 것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도 수익을 보장해야 했고, 수익성이 없이는 장기 프로젝트의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후 ‘자유 소프트웨어’와 구분되어, 리눅스 프로젝트는 스스로를 ‘오픈소스’라 부르게 된다. <성당과 광장>(The Cathedral and the Bazzar)이라는 책에서 에릭 C. 레이몽은 이 사건을 ‘획기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스톨만의 정신적 후광에서 벗어나 대안 소프트웨어 개발 운동이 ‘오픈소스’로 정립되어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GNU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리눅스는 끊임없이 성장해 왔고, 서버 시장에서는 무시 못할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현재 모바일, 태블릿 시장 등에서 애플의 iOS 운영체제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도 바로 이 리눅스의 피를 물려 받았다. 하버드 로스쿨의 정보생태학자인 요하이 뱅클러가 ‘코스의 팽귄'(Coase’s Penguin)이라는 논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리눅스는 공유지에 대한 공동체의 관리가 정부, 시장에 의한 관리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명백한 사례인 것이다.

뱅클러는 정보를 생산하고 분배할 수 있는 수단인 컴퓨팅이 참여자 대다수에게 가능하고, 대량의 정보가 모두에게 공유되며, 대규모 프로젝트의 역할이 작게 분할된 덕분이라고 보았다. 그 상황에서는 파트타임 프로그래머들이 세계 최대의 IT 업체와 경쟁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용자들에 의한 대규모 협업 생산(large-scale collaboration)을 ‘P2P 생산'(Peer to Peer production) 혹은 사회적 생산(social production)이라고 정의했다. 이 용어는 오늘날 파일 공유 사이트들을 명명하는 데 많이 쓰이고 있다. 음성통신 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스카이프도 파일 공유 사이트 중에 하나였던 카자(Kazzar)의 명맥을 이어받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에 의한 관리의 효율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조용히 입증되고 있다.

무엇보다 명백한 예는 ‘패자 부활전’에 성공한 넷스케이프다. 넷스케이프는 MS와 반독점 법적 공방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그러다 1998년 역사적인 결정을 하는 데, 바로 넷스케이프의 소스 코드를 모질라 재단을 통해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넷스케이프는 파이어폭스로 변신한다. 파이어폭스는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끓임없이 성장해 현재 전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20%가 넘는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죽어가던 넷스케이프를 ‘오픈’이 살린 것이다.

이것이 IT 산업계에 있어서 오픈의 기본적 개념이고 역사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오픈은 아니었다. 예컨대, 리처드 스톨만에게 있어서 오픈이란 ‘자유’였다. 도덕이고, 정치이고, 그에게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리누스에 이르서 오픈은 ‘관리 방식’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스톨만이 반대했던 ‘상업화’ 중에서 그들은 ‘독점화’만은 반대하고 ‘상업화’는 일부 수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게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비록 타협을 이루었을 지라도 여전히 공동체의 가치 증진을 위한 ‘오픈’이었다.

그럼, 지금 오픈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구글에 이르러서는?

구글이 안드로이드 플랫폼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스톨만과 리누스의 핏줄을 이어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구글의 페이지 랭크 알고리즘이라고 하는 것도 요하이 뱅클러가 위의 ‘코스의 팽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부 특정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다수의 선호에 따른 ‘검색 민주주의'(search democracy)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공동체에 의한 공유지의 관리를 주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구글은 다르다. 구글이 검색 시장을 석권해서 구글 어스를 통해 지도를, 구글 에디션을 통해 책 콘텐츠를 흡수하며 하고 있는 일은 점점 더 디지털화되는 사회 환경의 정보 접근(information access)의 ‘문’을 ‘독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글의 오픈은 그들이 ‘오픈소싱’을 여전히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픈’이지만 그 것이 ‘구글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구글 측에서는 구글을 위한 것이 정보 접근성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사회를 위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마존 농부나 오픈소스 개발자들과 다른 것은, 그들은 주주와 광고주를 끓임없이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공동체’를 이용하는 것이지 그들 자신이 ‘공동체’는 아니다. 그 점에서 그들의 오픈은 ‘제한적’ 오픈이다. 다시 말해 구글이 오픈의 질서를 개편한다고 했을 때, 그 것은 어디까지나 ‘구글에게 이로운’ 오픈일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 버라이존과 구글은 밀약을 맺었다. 인터넷에서 모든 콘텐츠는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망 중립성'(Net Neutrality)을 모바일에서는 양보한다는 내용이다. 한때 망 중립성 수호의 기수를 자임했던 구글의 이면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만’의 오픈의 정체다. 구글은 개방을 통해 오픈을 독점했다. 지금 추세로 보면, 정보 접근의 문을 지키면서 콘텐츠를 선별하는 것이 그들의 미래, 그들이 말하던 ‘악하지 말아야’ 할 미래라고 주장하는 것도 억측과 오산은 아닐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에 ‘의한’ 공유지의 관리와, 공동체를 ‘이용한’ 공유지의 관리가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IT 혁명의 초창기였던 1995년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에서 이에 대해 분명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시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보의 사유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그리고 그 방법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직접적이지 않고 은밀하다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번 오른 바 있는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는 그의 <모래꽃>에서 중세 악마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 것은 ‘뿔달린 염소가 아니라 먼지’라고. 조용히 쌓여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불안하게 진행되는 ‘오픈의 미래’는 구글같은 오픈의 대표 주자들에게도 결코 이로운 시나리오는 아니다. 네덜란드의 교통 안전 전문가 한스 몬더만은 신호등없는 거리로 도시를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 그가 2003년에 실험한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그라스텐은 각종 교통 신호를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우측 통행자 우선’ 원칙 하나로 교통 사고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실험 결과에 놀란 유럽 지역 곳곳에서 동일한 원리에 입각한 교통 개혁이 시행됐고, 한스 몬더만은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됐다.

안전성의 비밀에 대해 몬더만은 이렇게 말한다. 차도와 인도, 차와 사람을 서로 구분한 것, 각종 교통 안내와 신호로 인간과 인간의 상호 소통을 막은 것이 문제라고. 인간이 위험성에 대한 공통의 의식을 가지고 소통을 통해 문제 해결을 노력하라고 한다면, 그들의 잠재력이 안정성을 충분히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면 바보로 행동한다.” 그것이 몬더만의 말이었다.

사실 이것이 공동체에 의한 공유지 관리의 핵심이었다. 인간을 창조자로 대우했기 때문에, 동료로 배려했기 때문에 그 ‘소셜’, 사회적 생산 혹은 P2P 생산에 의해서 오늘날 디지털 혁명의 중심인 ‘오픈’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웹 2.0 만트라 ‘개방, 공유, 창조’의 정체였다.

오픈이 ‘과거의’ 오픈일 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그리고 우리의 더 나은 ‘미래로’ 열린 ‘오픈’이려면 먼저 우리 각자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창조의 본능을 포기하는 순간, 스스로를 바보 취급하는 순간, 우리에게 오픈은 누군가의, 누군가만을 위한 오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의 책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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