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못 막는 ‘n번방 방지법’, 실효성 있나?

"플랫폼이 사적 검열하라는 얘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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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국회에서 디지털 성범죄 방지를 위한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소위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일부 법률안에는 디지털 성범죄자 처벌을 강화하는 한편, 기존 웹하드 사업자에게 부여되던 삭제·필터링 등 기술적 조치 의무를 모든 네이버·카카오 등 부가통신사업자로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불법음란정보가 담긴 촬영물 또는 복제물 발견 시 삭제하거나 전송 방지 또는 중단하는 등의 기술적 조치를 의무로 하고 이를 위반할 시 ‘징벌성 과징금제’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네이버·카카오 등 인터넷업계는 ‘과징금 폭탄’을 우려하고 있다. 국내 사업자에 대한 규제만 강화될 뿐, 텔레그램·디스코드 등 해외 사업자를 제재하기 어려운 탓에 법적 실효성이 떨어질 거라고 주장한다. 일부 법률 전문가들도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최민식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는 4월28일 인기협&스페이스에서 사단법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주최로 ‘n번방 방지법, 재발방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열린 긴급토론회에서 “국외 비(非) 신고 사업자인 텔레그램 등은 수범 대상에서 제외되고 오히려 관리 가능한 국내 사업자에게만 적용될 것”이라며 “해외 인터넷 사업자는 내버려두고 국내 사업자를 규율하는 것은 방향성이 틀렸다”라고 말했다.

또 “민간 사업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존에도 충분히 (인터넷사업자를) 규율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있으나 이를 준수하려 노력하지 않고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라며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 대한 용어와 정의, 처벌기준, 행위양태, 이득 차단 등을 구체적으로 정립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검열시대 열린다…자율규제가 최선”

토론회 참석자들은 규제범위 확장으로 사적 검열이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개방된 공간인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은 모니터링이 가능하지만, 메신저 등에서 오가는 정보는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확인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전면적인 기술적 조치를 시행하면 사용자의 통신을 아무 권한 없는 사업자가 감시하게 돼, 사실상 통신비밀을 침해하는 ‘사적 검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황용석 건국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인터넷의 채널은 다양하다. 메신저는 사적 채널로, 사업자가 내용을 검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적용된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진근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ISP(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의 책임이 대폭 늘어나는 셈인데, 이미 업로드된 저작물이 아닌 ‘움직이는 정보’를 필터링해야 한다. ‘검열 사회’가 되는 셈”이라며 “기존 과태료 부과를 넘어 징벌적 과징금제를 도입하고, 더 나아가 기술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 형사처벌을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정부가) 방조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가연 오픈넷 변호사는 “디지털 성범죄물만 100% 골라내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현행법이 규정하는 기술적 조치는 키워드 또는 동영상 해시값에 의한 필터링”이라며 “아직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디지털 성범죄물 여부는 결국 인간의 판단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국가가 할 일을 사적 영역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의 모니터링단에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계 최대 규모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 다크웹 운영자 손정우는 1심 집행유예, 2심 1년6개월형을 받아 지난 27일 출소했다. 손정우의 사이트 회원인 미국인은 징역 97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에 거센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 같은 사례를 빌어 근본적인 재발방지는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라는 발언도 나왔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실패를 보여주는 범죄사건”이라며 “행정질서를 도입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엉뚱한 처방이다”라고 말했다. 김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도 “지나치게 낮은 형벌로 인한 법의 위화력이 상실됐다”라며 “이 같은 범죄에 사법부가 낮은 형량기준을 가지고 법을 집행해온 것이 핵심 문제다. 국제 공조 역량도 아직 미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23일 국무총리 주재 국정현안점검회의에서 관계부처 합동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내놨다. 선삭제, 후심의 절차 도입으로 방심위 삭제절차를 간소화해 신속한 삭제가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담겼다.

그러나 이 역시 국내 사업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다. 방심위는 삭제할 콘텐츠를 심의하는 기관이다. 이번 대책에 명시된 ‘선삭제’ 절차는 사실상 ‘삭제요청’을 먼저 하겠다는 의미다. 국내 사업자의 경우 대부분 방심위 시정조치 요구에 즉시삭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법의 집행력 때문이다.

반면 해외 사업자는 국내법 집행이 어려워 접속차단 수준에서 협조하고 있다. 그마저도 사업자의 ‘자율적’ 판단이 전제돼 있다. 김 교수는 “본사 위치도 모르는 텔레그램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고 책임 불이행에 따른 형벌을 집행할 수 있겠나”라며 “유사 규제를 시행했던 경험에서 보듯 대부분 중소 사업자는 해외로 이전하고 국내 산업만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실효성 없고 이용자 프라이버시까지 침해하는 모니터링 의무나 기술적 조치 의무를 신설하기보다는 플랫폼 사업자의 자율규제를 장려하고 피해자를 빨리 찾아 구제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적극적 법 집행 △국제적 공조 수사 강화 △수사에 비협조적인 해외 플랫폼에 대한 국민적 거부운동 △플랫폼 감청 허용 및 온라인 잠입수사 법제화 등 디지털 범죄 수사력 보강 등이 대책으로 제시됐다.

텔레그램 등 해외 인터넷사업자를 규제하는 방안에 대해 박성호 인터넷기업협회 사무총장은 “역외적용과 관련한 조항은 만들 수 있으나 국제적 사법 공조가 없으면 실행이 어렵다.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라며 “이에 협조하는 기업과 비협조하는 기업이 차별화될 수 있어야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디지털 성범죄 관련 목소리를 내온 민가단체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모니터링·신고 체계를 일원화하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 사무총장은 “방심위 인력이 부족한 만큼 국민들이 여러 채널로 신고하는 경우 대표 인터넷 기업으로 바로 연결하는 ‘원스톱’ 채널을 확보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라며 “판단 주체는 방심위가 되겠지만 우리도 빠른 신고, 조속한 처리를 할 자세가 돼 있고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여야는 오는 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n번방 사건’ 법안들을 우선 처리하는 데 합의했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등 다른 상임위에 제출된 관련 법안 역시 신속 처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