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뷰] ‘죄’의 굴레는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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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뷰’는 게임, 드라마, 영화 등 국내에서 서비스되는 콘텐츠를 감상·체험하고 주관적인 시각으로 풀어보는 기획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치 않는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사진=하얀 까마귀 방송화면 갈무리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SF8-하얀 까마귀’

“까마귀는 원래 흰 깃털을 가진 아폴론 신의 심부름꾼이었어. 어느 날 까마귀는 심부름 도중 한눈을 팔다 늦어버렸고 아폴론이 그 이유를 추궁하자 까마귀는 그의 아내인 코로니스가 간통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게 돼. 아폴론은 까마귀의 말을 믿고 간통한 코로니스를 죽여버리지. 하지만 코로니스를 죽이고 나서야 까마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돼. 화가 난 아폴론은 까마귀를 까맣게 태워 죽여. 그후로 까마귀는 검은색이 됐지. 까마귀는 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걸까. 미움받지 않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그 결과는 죄 없는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지”-하얀 까마귀 中

숨기고 싶은 진실과 마주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SF8-하얀 까마귀’는 이런 발상에서 출발한다. 제1회 한국과학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코로니스를 구해줘’를 각색한 하얀 까마귀는 원죄와 마주한 인간의 선택을 가상현실(VR) 게임이라는 배경 안에 풀어놓는다.

근미래 VR 게임, 가능성을 보여주다

한때 잘 나갔던 게임 BJ ‘주노(안희연 분)’는 1인 방송 중 등장한 동창의 폭로로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쓴다.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주노는 게임 방송국 WGN 개국 1주년 행사를 돌파구로 삼고 VR 게임 ‘인사이드 오브 마인드2(IoM2)’ 시연 행사에 참석한다. IoM2는 VR에 접속해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는 형태로 설계된 게임이다. 주노는 팬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IoM2에 접속하고 8년 전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선다.

VR 게임의 발전된 모습은 많은 작품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됐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미러-시즌5’의 ‘스트라이킹 바이퍼스’나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등을 통해 현실과 가상 공간을 잇는 미래형 게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인간의 몸에 VR 관련 기기를 부착하고 게임 소프트웨어에 접속한 채로 현실같은 가상세계를 탐험하는 방식이다.

흰 옷을 입고 IoM2를 체험하는 BJ ‘주노’. /사진=하얀 까마귀 방송화면 갈무리

하얀 까마귀에 등장한 VR 게임도 비슷하다. IoM2는 인간의 기억을 관장하는 측두엽에서 트라우마를 찾아 감각을 주관하는 전두엽으로 보낸 후 시각화 하는 설정을 담았다. 이런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무거운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를 사용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VR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기술을 집약시킨 플랫폼과 대형 기기를 개발한다면 무의식 상태로 가상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뇌파를 자극해 체험하는 설정인 만큼 기술에 대한 위험도 강조한다. WGN 개국 1주년 행사장에 화재가 발생해 게임에 접속한 채로 식물인간 상태가 된 주노는 미션을 완수하지 못해 가상세계 속에 갇힌다. 현실에서 3개월 넘게 식물인간으로 목숨을 연명한 주노는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실제로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망연자실한다. 이는 기술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단편적 표현으로 풀이된다. 진보된 VR 게임이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선이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로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1인 방송 환경도 등장한다. 하얀 까마귀는 2026년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정보통신 기술(ICT)의 발전된 형태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1인 방송 시청자의 목소리와 텍스트가 동시에 등장하는 기술적 표현도 찾아볼 수 있다. 언젠가는 현실화 될 것 같은 미래 기술 안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담아냈다.

죄의 무게, 피한다고 끝이 아냐

영상에 등장하는 현실 같은 VR 게임과 화려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는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한 맥거핀(중요한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하얀 까마귀는 ‘거짓말의 무게’와 ‘책임’에 대한 메시지를 강조한다.

/사진=하얀 까마귀 방송화면 갈무리

친구에 대한 동경과 애정은 집착으로 변했고 결국 모든 것을 가지기 위해 궁지로 몰아넣는 집요함을 보인다. ‘학교’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소녀의 욕심이 죄 없는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장면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추악한 욕망이 드러난다. 아폴론 신의 신뢰를 깨지 않으려 거짓말을 했던 까마귀와 주노를 동일 시 하는 부분이다.

담임인줄 알았던 NPC가 정체를 밝히면서 진실에 다가서는 속도도 빨라진다. 흰 옷을 입은 주노와 대비적으로 까만 복장을 착용한 NPC는 게임에서 깨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진실을 말할 것을 권한다. 이 부분까지 주노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하얀 까마귀로 그려진다. 원죄를 밝히고 거짓말을 인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NPC의 복장이 검정색이었다는 점에서 “진실을 말하면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현실 속 주노는 이미 손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미션을 클리어 한다 해도 되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노의 무의식은 이미 이를 인지하고 있기에 주변 인물을 모두 검은색 까마귀로 표현했을 지 모른다.

/사진=하얀 까마귀 방송화면 갈무리

엔딩신에 하얀 까마귀가 된 주노를 통해 감독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마지막 참회의 기회를 부여 받지만 끝내 성공한 삶을 포기할 수 없던 주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창문을 깨고 뛰어내린다. 차디찬 바닥에 처박힌 하얀 까마귀는 신의 심판을 받은 듯 번개를 맞고 흑화돼 사라진다. 게임 속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전까지 가상세계에서 죽었던 주노가 다시 깨어나 수없이 같은 상황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성공이란 가면 뒤에 추악한 죄를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말에는 비극만이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가 느껴졌다. 하얀 까마귀를 연출한 장철수 감독의 작품 중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포함됐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