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전문성 육성 없인 벤처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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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벤처업계엔 스타가 없습니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산업을 이끄는 영웅은 다를 바 없습니다. 5년 전에는 번창하던 새싹들이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5년 뒤 번창할 새싹은 굉장히 적습니다. 우리 앞날을 암울하게 만드는 징조입니다.”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의 진단은 냉정하고 가혹했다. 6월13일 서울 코엑스 그랜드컨퍼런스룸에서 열린 ‘오픈소셜 컨퍼런스 코리아 2008’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안철수 의장은 1세대 벤처인답게 경험에서 우러난 생생한 진단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실리콘밸리엔 지금도 끊임없이 스타가 탄생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며 “국내 벤처가 왜 잘 안되는지 알려면 실리콘밸리가 왜 잘 되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며 허약해진 국내 벤처산업의 기초체력을 걱정했다.

안철수 의장

안철수 의장은 국내 벤처산업의 취약점으로 세 가지를 대표적으로 꼽았다. 먼저 ‘전문성’이다. 안 의장은 “실리콘밸리에선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팀을 꾸릴 수 있으므로 초보 CEO가 실수를 하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시행착오를 안 하니 받쳐주지만, 국내에선 CEO나 직원 다 같이 실수하고도 자기가 뭘 실수했는지조차 모른다”며 “전문성도 책으로만 배우는 건 한계가 있고 사람, 선배로부터 배워야 하는데, 대부분의 국내 중소기업은 인력시스템과 교육시스템에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중소기업에 대한 사회적 지원 시스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안철수 의장은 “국내에선 중소 벤처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하는 일도 취약하고 벤처캐피털이나 금융권도 위험진단 및 위험관리 시스템이 상당히 취약하다”며 “허약한 위험관리 시스템의 부담을 대표이사 연대보증 등으로 벤처기업 대표에게 떠맡기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벤처기업이 핵심 역량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산업계 고질병인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거래관행에 대해서도 입을 보탰다. “미국은 대기업 우산 아래 굉장히 많은 벤처기업이 생겨나고 있고, 그 벤처들 속에서 혁신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인수합병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진단한 뒤 “국내에선 대기업이 단기적 이익을 위해 중소기업을 하청업체처럼 부려먹는 게 현실”이라고 왜곡된 거래 관행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거래하던 중소기업이 죽으면 불나방처럼 또다른 기업이 나와서 똑같은 과정을 거쳐 죽는 일이 반복된다”는 대목에서는 많은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철수 의장은 “현실은 어렵지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면 전문성은 높아지지 않는다”며 “적어도 10년 정도 전문성을 기르도록 대학이 돕는다면 국내 벤처도 전문성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해법을 내놓았다. 그 자신도 “지난해 연말부터 여러 대학에서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고민 끝에 카이스트 풀타임 정교수로 일하기로 한 것도 벤처기업 전문성 강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잘 나가던 기업 CEO를 박차고 고된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도 이를테면 스스로 부족했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안철수 의장은 “대학 연구원이나 교환교수를 선택해 부담 없이 청강하며 공부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쉽게 공부하면 남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학위과정을 선택했다”며 “벤처 경영인 10년 동안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줄 알았는데 실제 공부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고 유학 시절에서 얻은 깨달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다른 이들이 부족한 부분들을 내가 채워줄 수 있겠구나 싶어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고 말해 청중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안철수 의장은 “벤처기업이 어렵다는 걸 알고 시작했기에 누굴 탓할 일은 아니다”라며 “치열하게 전략을 세우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다면, 나머지 인프라나 대기업과의 관계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풀어야 할 숙제”라며 말을 맺었다.

다음은 안철수 의장 기조연설 요약문이다. (괄호 안은 편집자 주)

2004년께, CEO 9년차일 때 나를 성가시게 만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벤처이지만 기업 지배구조가 잘 만들어진 벤처를 만들고 싶었다. 실리콘밸리처럼 창업자들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한 회사 뿐 아니라 산업 전체에 공헌하고 싶었다.

먼저, 기업지배구조에 관해서는 민주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삼권분립이 됐다. 어떤 측면에선 도덕적인 지도자 한 명이 나라를 이끌면 속도감은 있지만, 사람은 원체 약한 존재다. 교만하고 부패하기 쉬운 게 사람 속성이다. 그러다보니 효율성 측면에선 한 명이 이끌면 좋겠지만 사람 속성 때문에 삼권분립이 정착됐다.

기업 지배구조도 마찬가지다. 회사도 개인 소유가 아니다. 상장법인은 여러 사람 소유다. 공공 소유물이다. 한 명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이사회가 존재하며 상호 견제하고 감시하는 게 맞다. 우리가 그런 모델을 보지 못하니까 회사에선 CEO 한 명이 모든 걸 결정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벤처도 건전한 기업 지배구조를 가져야 한다. 그런 모델을 만들고 싶었다.

둘째, 실리콘 밸리에서 HP는 70년 이상 역사가 있다. 한 번 창업한 사람의 경험과 노하우가 선순환되면서 산업 자산이 되더라. 인수합병을 통해 대기업에 가면 그 기업 발전에 힘쓴다. 나중에는 정치가나 행정가, 교수가 되기도 한다. 소중한 경험을 사회의 각 분야에서 쓴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안 된다. 한 번 잘 되면 창업자가 그 기업에 계속 머무르거나 반대로 기업이 잘 안되면 창업자도 영원히 재기를 못한다. 실패한 경험도 소중한데 우리나라에선 활용을 못한다. 창업자도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기업 뿐 아니라 산업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다.

2005년 소프트웨어 기업 최초로 순익 100억원을 돌파했을 때 CEO를 그만두고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기업지배구조 면에선 계속 노력해서 이젠 안철수연구소가 다음커뮤니케이션 다음으로 기업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창업자 선순환 구조 모델이나 산업 전반을 돕는 문제는 내가 준비되었는지 자문해보니 더 준비해야겠더라. 10년 정도 경영을 했지만 국한된 산업분야에서의 경험이었다. 좋은 조언자가 되고 실질적으로 공헌을 하려면 경험을 정리하고 저변을 넓혀야 한다. 공부를 좀 해서 정리한 다음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는 방법이 여러가지더라. 나이가 드니 쉽게 공부하는 방법도 있다. 대학 연구원도 있고 교환교수로 가는 길도 있다. 부담없이 청강하면서 공부하는 방법이 있다. 내 경험으로는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이다. 쉽게 공부하면 남는 게 없다. 들을 땐 아는 것 같은데 뒤돌아서면 남는 게 없다. 반대로 학위과정 학생이 되면 교수도 학생을 괴롭히고 숙제도 내주고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고생하니까 굉장히 많은 게 자기 것이 되더라.

학위 과정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시험치고 인터뷰하고 MBA 과정에 들어갔다. 2년 동안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 괴로워도 시간은 지나더라. 이제 졸업식 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이 채 안 된 셈이다.

공부를 해보니 좋은 게, 자기 실력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경영에는 많은 부분 있다. 매니지먼트, 스트레티지, 마케팅, 어카운팅 프로세스, 어프로치 매니지먼트 등인데, 내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줄 알았는데 실제 공부해보니 아니더라. 어떤 부분은 공부가 좀 됐는데 다른 부분은 기대 이하였다. 그래도 싫지 않은 게, 내가 그러면 다른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겠다, 다른 이들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지난해 연말부터 대학에서 요청을 많이 받았다. 작년부터 인터뷰할 때 CLO 하겠다는 얘길 많이 했다. Chief Learning Officer(최고 교육 책임자).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목표가 무엇인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 진단해주고 조언해주는 역할을 CLO로 정의했다.

어떤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일 자체이지 그 사람의 감투가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 자체의 규정이 CLO였다. 그 역할을 위한 감투가 대학교수가 될 수도 있고, 벤처기업 CLO 담당임원이 될 수도 있고 교육센터 소장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여러 대학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고민하다가 카이스트 제안을 받아들여 풀타임 정교수로 일하기로 했다. 테뉴어(정년 보장) 받았으니 자유롭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 안철수연구소나 벤처기업을 도와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3년 정도 해왔고, 하고자 하는 일들이다.

오늘 ‘실리콘밸리의 경쟁력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기조연설을 준비하면서, 몇 년간 한국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 한번 보고 싶어서 순위를 찾아봤다. 1천만 명 넘게 본 영화도 많더라. 내가 무서운 영화를 싫어하는데 <괴물>은 너무 무서울 것 같고 <실미도>도 디프레싱할 것 같고 해서 <웰컴 투 동막골>을 봤다. 줄거리 자체가 국군과 공산군 패잔병이 동막골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 미군과 싸우는 것이다. 옛 이데올로기 하에선 충격적인 스토리다. 800만 명이나 봤다는 건 그만큼 거기에 공감을 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몇 년 전부터 제가 주장해온 게, 21세기를 움직이는 키워드를 하나만 고르라면 ‘탈권위주의’를 꼽고 싶다고 말해왔다. 예전에는 권력이나 지식을 일부 계층만 소유했지만 이제는 일반 대중이 권력과 지식을 갖고 액티브하게 움직인다. 21세기를 움직이는 키워드가 탈권위주의인데 정치, 문화, 사회, 기술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는 키워드다.

기술을 사회, 문화와 동떨어진 걸로 보는데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여기 모인 사람들도 잘 알 것이다. 기술 자체가 사회 발전과 동떨어져 변화하는 건 아니다. 탈권위주의 관점에선 <웰컴 투 동막골>이 이해가 된다. 이데올로기보다는 개인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 지금 얘기하는 보수, 진보도 개인 가치에 비하면 덧없는 거다.

앞으로 사회는 예전 패러다임에서 못 벗어나는 정치, 문화, 사회, 기술은 퇴보할 것이다. 패러다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만 살아남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 공부하면서 부러웠던 게, 지금도 새 벤처가 생겨나고 있고 20대 CEO가 <비즈니스위크>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끊임없이 스타가 탄생하고 있다. 그건 산업이 잘 되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 중에서 스타가 탄생하는 것이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보더라도 한 사람의 천재가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람 중 하나가 영웅이 된다.

한국엔 스타가 없다. 3년 전과 지금과 산업을 이끄는 영웅이 다를 바 없다. 위험한 징조다. 국내만 보면 5년 전에는 번창하던 새싹들이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5년 후 번창할 새싹은 굉장히 적다. 우리 앞날을 암울하게 만드는 징조다. 우리나라만 그렇다. 미국은 지금도 잘 되고 있다.

왜 이렇게 잘 안 될까. 그걸 알려면 실리콘밸리가 왜 잘 되는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 실리콘밸리 잘 되는 이유는 수백 가지인데, 세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전문성이다. 벤처캐피털이 잘 되고 정부규제가 없고 스탠포드대학이 잘 되고 등등 얘기가 많지만 핵심은 전문성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것이다. 그게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이다. 대개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있는 창업자가 창업을 하는데, 대부분 초보 CEO다. 아이디어만 좋으면 좋은 팀을 만들 수 있다. 각 분야에서 전문성과 경험이 있는 좋은 팀이 구성된다. 초보 CEO는 늘상 실수를 하게 마련인데, 실수를 해도 다른 분야에서 시행착오를 안 하니 받쳐주는 것이다. 그런 인력들의 전문성이 첫째 이유다.

둘째, 기업이 성장하기까지 혼자 성장하는 게 아니다. 기업을 지원하는 인프라가 있다. 대표적으로 인력을 제공하는 대학이 중요한 인프라다. 다음으로 능동적인 투자다. 수동적 투자는 돈만 투자하고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조언도 안 하고 가만 있는다. 능동적 투자는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데, 간섭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인재를 채워주고 컨택포인트를 연결해주고 신용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벤처캐피털, 자금을 대주는 금융권, 각 분야 전문성 있는 아웃소싱 업체(PR, 콜센터 등)가 있으면 벤처는 경영에 집중할 수 있다. 정부 지원도 조화롭게 짜여 있다. 기업이 핵심역량에 집중하도록 불편함이 없다.

셋째,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거래관행이다. 미국 대기업은 한국보다 규모가 더 크다. 대기업만 살아남을 것 같지만 사실은 대기업 우산 아래 굉장히 많은 벤처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대기업이 자선사업 하는 게 아닌데도 그 속에서 자라난 벤처들로부터 혁신적 아이디어를 얻는다. 전세계 통계를 보면, 90% 이상이 벤처에서 혁신적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통계가 있다. 혁신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인수합병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그 세 가지가 어떨까.

우선 전문성 면에서 살펴보면, 이 곳에 계신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문성이 떨어진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열심히 안 해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책을 통해 배우는 건 한계가 있다. 프로그래머를 보면 아키텍트가 되기 위해 교육으로 배우는 건 한계가 있다. 예전에 보면 정통부에서 아키텍트 양성하는 계획을 내놓았는데 보니까 기가 막혔다. 아키텍트는 교육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하면서 양성된다. 전문성도 배우기만 해선 안 되고 실제로 일하면서 선배, 사람으로부터 배운다. 교육 시스템과 인력 시스템이 필수인데 중소기업은 그런 게 안 갖춰져 있다. 다들 열심히 살았지만 누구 잘못이랄 것도 없이 실력이 일천해졌다. 같이 실수하게 된다. 실리콘밸리에선 CEO만 실수하지만, 여기선 다같이 실수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뭘 실수했는지도 모르게 된다. 자기가 모르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인프라스트럭처인 대학에서 과연 중소 벤처에 필요한 인력을 잘 제공해주는가? 취약하다. 벤처캐피털들이 능동적 투자를 하는가? 미흡하다. 금융권에서 대출을 잘 해주는 것도 아니다. 대출은 해주지만 대표이사 연대보증을 한다. 그러면 벤처는 굉장히 힘들어진다. 벤처기업 설립자들은 거의 100% 경험했을 거다. 어떤 기업이 생기면 잘 될 지 접을 지 가장 잘 판단하는 게 CEO다. 미국은 CEO가 지금 접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면 주주를 소집한다. 주주들은 CEO가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도 안 됐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합의해서 접는다. 투자자는 투자금 일부라도 회수하고 CEO는 다른 기업을 창업할 때 이전 실수는 절대 반복 안 한다. 그래서 성공확률이 높아진다.

한국은 어떤가. 금융권에서 자금을 빌려줄 때 위험 측정과 관리가 최우선이다. 이 사람이 얼마나 리스크를 안고 있는 지 따져서 이자율을 매긴다. 한국은 위험 측정과 관리가 매우 허약하다. 그래서 대표이사 연대보증을 한다. 리스크 측정이 어려우니 돈을 빌려주고 나중에 대표이사가 다 지불하라는 식이다. 금융권이 실력이 부실한 것을 기업가에게 전가한다. 그러면 일하기는 쉽다.

나중에 CEO가 기업을 접을 때 그 순간 회사빚이 몽땅 개인 빚이 된다. 그래서 적자날 줄 뻔히 알면서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기업을 경영하다보면 결국은 적자날 사업이지만 당장 현금이 생기는 사업을 하게 된다. 미국서 덤핑이라면 점유율 큰 업체가 작은 업체 죽일 때 한다. 한국은 형편 가장 나쁜 기업이 덤핑을 한다. 그러면 산업 전체가 망하게 된다. 건실한 업체도 흔들린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게 소위 눈먼 돈이다. 그게 연명을 더 시킨다. 산업 전체는 황폐화되고 그 기업은 죽는다. 대표이사는 금융사범이 돼 다시는 재기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대중소기업 거래관행을 보자.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을 단기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다보니 이익을 빼앗아간다. 벤처기업을 처음 만들 땐 독특한 기술 있는데 이를 유지하려면 연구개발하고 사람 뽑아서 계속해야 하는데 대기업에서 이익 후려치는 식으로만 나가면 대기업 하청업체밖에 안 된다. 대기업 임원이 ‘연말에 자장면이라도 사먹게 해줄게’ 하면 옆에서 벤처기업 사장이 ‘곱배기라도 먹게 해주십시오’ 하는 게 실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해당 중소기업은 결국 죽게 되는데, 불나방처럼 또다른 기업이 나와서 똑같은 과정을 거쳐 죽는다. 결국 국내에 일 맡길 중소기업이 없어지만 글로벌 아웃소싱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바뀌었나. 예전에는 대기업 거래상대가 모두 국내 중소기업이라 국내 정책상 대기업을 밀어주면 전부 잘 됐다. IMF 이전이라 사람도 많이 뽑았다. 고용창출도 됐다. 정부 돈으로 환율 방어하고 특소세를 인하하면 그 이익이 국내로 전부 돌아왔다. 지금은 아니다. 60~70%가 글로벌 아웃소싱이다. 주주도 상당수가 외국인이다. 이젠 똑같은 정책을 써도 60~70%가 외국으로 새 나간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이 있다. 베트남전에서 포로가 된 미군 최고위 장군이다. 월맹과 협상해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 포로들 상당수를 집으로 돌아보낸 전쟁영웅이다. 그가 풀려난 뒤 기자가 ‘어떤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냐’고 물었을 때, ‘낙관주의자들은 다 죽어버리고 현실주의자와 비관론자만 살아남았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낙관주의자들은 예컨대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주위에도 그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에 나갈 것이라고 스스로 희망을 불어넣으면서 지낸다. 그러다보면 점차 절망감이 생기고 결국 실수해서 죽는다. 현실주의자들은 전쟁이 오래갈 것이란 걸 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죽지 않고 언젠가 고향 돌아갈 것이라 믿는다.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는다. 살아남는 자의 특성은 냉혹한 현실에 대해 인식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면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뜨거운 머리,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막연한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차가운 가슴, 믿음이 없고 열정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제대로 극복하기 힘들다. 냉철한 현실인식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 패러독스라 해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라 한다.

지금 현실이 이렇다. 현실은 그렇지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전문성은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몰라서 전문성이 높아지지 않는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최소한 전문성이라도 사람들이 기르도록 돕자. 적어도 10년 정도 일하면 사람들의 전문성이 올라가지 않을까. 그게 카이스트 교수로 가게 된 근본적인 이유다.

인프라는 어떨까. 10년쯤 지나면 대학도 바뀔 것 같다. 금융권은 쉽게는 바뀔 것 같지 않은데, 이면을 뒤집어보면 미국은 90%가 투자고 10%가 대출이다. 한국은 반대다. 90%가 대출이고 10%가 투자다. 그것만 바뀌면 대표이사 연대보증은 바뀔 것 같다.

대중소기업 거래관행도 그렇다. 가까운 일본과 굉장히 비교된다.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몇 가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공정위에서 지금껏 한 일 자체가 고발권 행사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감시를 하고 고발은 했지만. 그 부분이 개선되면 좀 더 나아질 여지는 있다. 상생에 대해 얘기는 하지만 잘 안되는 이유가 실제 업무하는 사람들 평가 기준이 상생 구조로 안 바뀌어서 그렇다. 단기적 이윤을 중심으로 대기업이 평가하니까 아무리 상생을 외쳐도 내년에 그 자리에 없을 지도 모르니 상생을 안 한다. 정부나 언론이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바뀔 여지 있다. 가장 많은 오해가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가격을 후려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후가 문제다. 계약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계약서 외에 더 많은 걸 요구하거나 소프트웨어에서 스펙을 더 요구하는 게 벤처를 힘들게 한다. 그런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면 할 수 있는 게 많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벤처기업이 어려운 거 다들 알고 시작했다. 누굴 탓할 일은 아니다. 치열하게 전략을 세우고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머지 인프라나 대기업과의 관계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풀어나가야만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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