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스]’디커플링’ 응답한 포스코그룹, ‘철강’서 ‘모빌리티 소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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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테슬라의 모델3.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완성차 시장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 위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사진=테슬라

“고객 중심으로 가치사슬을 해체하라”

올해 경영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경영전략서 ‘디커플링'(탈레스 S 테이셰이라 지음, 김인수 옮김)의 중심이 된 대목입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성숙기에 접어든 국내 제조업체에 적잖은 울림을 던집니다.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첫째, 시장을 바꾸는 건 기술이 아닌 고객이라는 점. 둘째, 고객의 소비 활동 사이 연결고리를 파악해 장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테이셰이라 교수는 초고화질의 디지털 카메라를 시장에 내놓아도 고객의 수요가 디지털 카메라에서 스마트폰으로 옮겨간 이상 시장 지배자는 삼성과 애플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고객을 읽지 못한 올림푸스와 코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렇듯 기업의 혁신이 성공하려면 중심에는 고객이 있어야 합니다. 이전의 많은 사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철강 전문 기업에서 전기차 부품과 소재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포스코의 담대한 도전은 눈여겨 볼만 합니다.

2018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공급사슬에 미묘하게 ‘디스럽션(disruption)’의 조짐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럽션은 업계 참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갑작스러운 시장 점유율 변화를 말합니다. 조짐은 2018년 12월 포스코그룹의 음극재 제조사인 포스코켐텍과 양극재 제조사인 포스코ESM의 합병 결정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양극재와 음극재는 2차전지의 4대 핵심 소재로 전기차 배터리 소재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양극재가 배터리의 약 30%를, 음극재가 20% 가량을 차지합니다. 해외에는 양극재를 생산하는 유미코아, 음극재 제조업체 미쓰비시 등이 있고, 국내에는 에코프로비엠과 엘앤에프 등 양극재 업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극재와 음극재를 모두 생산하는 업체는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포스코의 두 계열회사가 합쳐지면서 탄생했습니다.

포스코그룹이 2차전지 소재업을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포스코는 정준양 전 회장 임기(2009년~2014년) 때 2010년 LS전선의 음극재 사업부(옛 카보닉스)를 인수했습니다. 인수가는 65억원으로 이촌동 LG한강자이 2채 가격에 음극재 사업에 진출했습니다. 포스코는 2012년 휘닉스소재와 함께 50:50의 지분으로 양극재 생산을 위해 포스코ESM을 설립했습니다. 정준양 전 회장은 포스코가 2차전지 소재 사업을 하는데 ‘산파’ 역할을 했지만, 이 사업은 이후에도 수 년 동안 방치 상태로 뒀습니다.

포스코ESM의 양극재 부문 매출은 2017년까지 300억원에 그쳤고, 포스코켐텍의 음극재 매출도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이 예상되면서 포스코그룹은 2017년 전기차 소재 육성 계획을 밝힙니다. 권오준 포스코 전 회장은 2017년 4월 “전기차 등 중대형 2차전지 수요가 급속히 확대돼 투자를 통해 2차전지 음극재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후에도 배터리 소재 육성 계획은 큰 진전이 없었고, 최정우 회장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구체화됐습니다.

최정우 회장의 ‘디스럽션 플랜’은 2019년 11월 발표한 ‘POSCO Group Corporate Day’ 발표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자료에는 포스코그룹이 비철강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작성한 비전들이 담겨있습니다. 총 40페이지로 작성된 이 자료에는 포스코를 비롯해 △포스코케미칼 △포스코인터내셔널 △포스코건설 등 8개 계열사의 성장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포스코가 2019년 발표한 ‘Group Corporate Day’ 자료./사진=포스코

포스코그룹은 총 10페이지(25%)를 할애해 그룹이 친환경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모빌리티 산업 위주로 공급사슬을 장악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포스코그룹은 ‘뉴 모빌리티 시대를 이끄는 종합소재기업으로, 다양한 사업포트폴리오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대응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글로벌 5위(조강생산량 기준) 수준에 올라선 철강재가 아닌 모빌리티 소재를 중심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정한 것입니다.

포스코는 고강도 경량화의 자동차 소재(차체, 클로저, 샤시, 시트)를 만들고, 포스코에너지는 연료전지와 스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포스코케미칼은 2차전지 소재를,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모터코어 등을 제조합니다. 전기차와 수소차 등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들을 포스코그룹이 주요하게 생산해 ‘모빌리티 소재 기업’으로 강화하는 비전입니다.

포스코케미칼 2020년 상반기 실적./자료-포스코케미칼

이중 포스코케미칼의 성장이 돋보입니다. 2019년 포스코케미칼의 양극재 매출은 1258억원, 음극재 매출은 1206억원을 기록했습니다. 2017년 양극재와 음극재 매출이 각각 300억원에 불과했는데 4배 가량 증가했습니다. 성과는 지난해부터 나왔습니다. 전기차 소재의 비중은 지난해 처음으로 40%를 돌파했습니다. 과거 포스코케미칼의 양극재는 노트북과 스마트폰 등 소형전지의 비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2018년 4분기 소형기기용 양극재의 비중이 80%, 전기차용은 20%에 불과했는데, 1년 만에 전기차 비중이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올해 2분기 전기차용 양극재의 비중이 85%를 기록했습니다. 사업구조가 소형기기 위주에서 전기차로 탈바꿈했습니다. 올해 상반기 양극재와 음극재 매출은 1815억원을 기록했습니다.

포스코케미칼은 양극재와 음극재 분야의 캐파를 늘리기 위해 막대한 투자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양극재 부문에 5291억원을, 음극재 부문에 5148억원을 투자해 캐파(생산능력)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2019년 양극재 캐파는 1만5000톤이었는데, 올해 4만톤으로 확대됐습니다. 2022년 7만톤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음극재는 올해 5만톤으로 캐파가 늘어나고, 2022년 9만톤까지 확대합니다.

포스코케미칼이 배터리 소재에 투자를 집중하는 이유는 전기차 수요 때문입니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연평균 19%씩 성장해 2025년 2200만대가 팔릴 전망입니다. 밀려드는 전기차 수요에 맞춰 배터리 소재를 공급하려면 투자에 집중해야 합니다.

포스코의 고객사들은 내연기관 중심에서 전기차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부품은 조선용 후판이나 건축자재와 비교해 수익성이 월등히 높습니다. 납품 관계를 맺게 되면 장기간 막대한 양의 제품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이는 포스코가 고객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바꾸고, 모빌리티 분야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포스코가 이미 철강재 위주로 주력 제품을 육성했다면 ‘모빌리티’ 시장에서는 도태됐을 수도 있죠. 배터리 소재는 해외 유미코아와 미쓰비시, 에코프로비엠만의 ‘리그’로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사진=포스코

최정우 회장은 전임 회장의 ‘유산’을 이어받아 모빌리티 소재 기업으로 그룹을 탈바꿈시켰습니다. 경쟁력이 없는 사업은 과감하게 접고, 사업성 위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습니다. ‘숫자’와 ‘실적’ 위주로 사고하는 재무통의 경영 스타일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최정우 회장 임기 동안 포스코의 신사업이 없는 점은 다소 아쉽습니다. 포스코는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지만 권오준 전 회장과 최정우 회장 임기 동안 대형 M&A에 한건도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시장에는 경쟁력있는 기업들이 매물로 나왔었죠.

최 회장은 미얀마 가스전을 추가로 개발하고, 팜 농장을 추가로 인수해 곡물 트레이딩 사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전임 회장들이 사업을 시작해 일정 수준에 올려놓은 사업들입니다. 포스텍의 기술력을 활용해 바이오 사업에 뛰어들려고 했지만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약 1조원(벤처펀드 8000억원)을 투자해 벤처 생태계를 활성화하고 스타트업 육성을 지원하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재무통의 스타일이 엿보입니다.

최정우 회장의 포스코는 글로벌 철강회사에서 글로벌 인프라 회사로 변모했습니다. 앞으로의 포스코는 어떤 모습일까요. 창립 52돌을 맞은 중년의 포스코가 어떻게 바뀔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