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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IN] 첫 단추 꿴 ‘플랫폼 노동’ 논의

2020.10.14

올해 1월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선 AB5(Assembly Bill 5) 법안이 시행됐다. 이 법은 계약직·임시직 종사자가 다음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경우 고용된 직원으로 분류하도록 하고 있다. ①일을 할 때 사용자의 지휘·감독으로부터 자유롭고 ②회사의 통상적인 업무를 수행하지 않으며 ③해당 사업에서 별도의 독립된 사업·직업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게 조건이다. ‘사장님’ 신분이지만 실상은 근로자와 차이 없이 일하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임시직 경제)’ 종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이다. AB5의 등장으로 임시직 종사자를 사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플랫폼 업계는 직격탄을 맞게 됐다.

당장 우버·리프트 등이 발칵 뒤집혔다. “우버 운전기사(드라이버)들은 우버의 직원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다라 코스로샤히 우버 최고경영자(CEO)는 캘리포니아주가 플랫폼 노동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동시에 운전기사들을 독립계약자로도, 직원으로도 분류하지 않는 ‘제3의 길’을 제안했다. 긱(Gig) 회사들이 기금을 모아, 각 플랫폼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의 복지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도 폈다.

샌프란시스코 법원은 “(우버·리프트) 일부 운전자들에겐 AB5법이 인기가 없을 수도 있으나 이는 인기 테스트가 아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지만, 정기적·고정적 근무를 원치 않기 때문에 플랫폼 노동에 뛰어든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사장님이 되거나 직원이 되거나. 꼭 둘 중 하나여야만 하는 걸까.

라이더는 ‘사장님’?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보다는 속도가 더디지만, 국내서도 플랫폼 노동은 조용히 덩치를 불려가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플랫폼 경제 종사자 규모 추정과 특성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10월 기준 국내 플랫폼 노동자 규모는 최대 54만명으로 추산된다. 전체 취업자 중 2.0%에 해당하는 수치다. 업계 안팎에서는 코로나 이후 그 규모가 더 커졌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법·제도적 안전망의 공백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정기적·고정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를 뜻한다. 근로자성을 인정 받아야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데, 플랫폼 노동자는 독립사업자로 계약을 맺는 데다가 예전처럼 고정된 작업장을 중심을 일을 하지도 않는다. 로그인하면 출근, 로그아웃하면 퇴근이다.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얻기 때문에 사용자를 가려내기도 모호하다. 지휘·감독은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메시지를 보내 업무를 독려하는 식이다.

라이더는 대표적인 플랫폼 노동자로 꼽힌다. 이들은 근로계약 대신 위탁·용역 계약을 맺고 배달 건당 수수료를 받는다. 고수익을 위해 여러 배달대행업체에서 동시에 일하기도 한다. 자영업자의 지위에 놓이는 근거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할 땐 업체의 지휘·감독을 받는 경우가 많다. 출퇴근 시간이나 휴식·휴무 등을 보고해야 하고 배달업무를 ‘강제 배정’ 받기도 한다.

라이더유니온 박정훈 위원장은 지난해 <블로터>와의 인터뷰(“배달라이더, ‘플랫폼 노동’ 아니라 ‘디지털 특고'”)에서 “해외에서 말하는 플랫폼 노동은 중간관리자나 출퇴근이 따로 없어 AI 알고리즘의 사용자성 여부와 같은 고차원적인 논의를 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배달대행업체가 플랫폼 기업과 위탁계약을 맺고 지휘·감독을 대신해준다”며 “개인사업자로 계약을 했으면 개인사업자처럼 일해야 한다. 지금은 기업의 위장 도급 ‘꼼수’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전통적인 노동과 알맹이는 동일한데도 껍데기(계약관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제도권 바깥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라이더만의 일은 아니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발표한 ‘한국의 플랫폼 노동과 사회보장’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플랫폼 노동자 가운데 일하는 방법, 노동시간·장소 등에 대한 지시나 규율을 받는 이들은 53.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무늬만 사장님’으로 불리는 특수고용노동자(특고)를 둘러싼 논쟁과 닮아 있는 대목이다. 플랫폼 노동이 국내서 디지털 특고로도 불리는 이유다.

플랫폼 노동 논의, 첫 발 뗐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제3의 길에 대한 가능성이 제시됐다. 배달업계 노사가 플랫폼을 통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임시직 종사자(이하 플랫폼 노동자)를 사실상 근로자처럼 보호하기 위한 자율협약을 처음으로 체결한 것이다. 지난 4월부터 노조·기업·전문가가 자발적으로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지난 6일 ‘플랫폼 노동 대안 마련을 위한 사회적 대화 포럼’은 서울 중구 YWCA회관에서 1기 배달 서비스 관련 협약식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사측에선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 요기요(딜리버리히어로코리아)와 배달대행 스타트업 스파이더크래프트가, 노동계에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서비스연맹과 라이더유니온이 협약 주체로 참여했다. 7만5000여명에 달하는 프리랜서 배달기사(라이더)들이 협약을 적용 받게 될 예정이다.

‘빠른배달’ 압박 금지…’노조’ 만들어도 OK

노사는 합의문에 라이더를 사실상 근로자 지위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라이더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 기업은 노조가 활동할 권리를 보장하고, 단체교섭 주체로 존중하기로 했다. 단 노조는 플랫폼의 순기능과 기업의 경영상 권한을 존중해야 한다.

노사는 ▲공정한 계약 ▲작업조건과 보상 ▲안전과 보건 등에 대해서도 약속했다. 우선 라이더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라이더는 스스로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기업은 작업조건과 보수·경력·지역 등 차이에 따라 업무를 달리 제시할 경우 기준을 밝혀야 한다. 라이더의 규칙 위반 시, 기업은 그 제재 근거와 절차를 명확히 하기로 했다.

안전에 대한 내용도 들어갔다. 심야, 혹한·혹서기, 우천·설천·강풍·노면 결빙 등 악천후와 감염병 위기 발효 시 기업은 안전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라이더는 ‘돌발적인 위험’이 생기면 이미 수락한 배달이라 해도 가지 않을 수 있다. 위험을 사후 입증하는 건 라이더의 몫이지만, 입증만 되면 기업은 이에 대한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빠른 배달을 압박하거나 라이더의 귀책이 없는 배달시간 지연을 이유로 제재하지도 않기로 했다. 또, 위험한 속도경쟁을 유발할 수 있는 정책도 시행하지 않을 예정이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강규혁 위원장은 “한국에서 최초로 노사가 자율적으로 맺은 협약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배달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제도 개선을 담았다. 끊임없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가 상생하는 첫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더유니온은 성명을 통해 “알고리즘을 통한 업무 배분의 문제, 안전배달료, 모든 라이더의 노조할 권리 등 유니온이 주장했던 내용이 합의문에 담겼다”며 “원칙적인 수준이지만 노사 간 공식 의제로 확정됐다는 점에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법 테두리 바깥의 약속

이번 합의는 제도의 공백을 노사가 알아서 메우고자 시도한 사례다. 현재까지 정부 주도로 진행되던 국내 노사협약과는 달리 민간이 주도적으로 구성, 참여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 정미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실장은 “이는 플랫폼 노동과 관련한 국내 최초의 합의”라며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보호와 더불어 질 좋은 일자리를 위한 첫 단추를 노사가 자율적으로 낀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못 풀던 특고 문제를 풀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의미 있는 움직임이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민간 주도로 이루어진 자율협약이라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등 관련법 개정이 뒷받침돼야 하는 이유다.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점도 지적된다. 협의에 참여하지 않은 쿠팡이츠와 생각대로·바로고·부릉 등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 합의문을 지킬 의무가 없어서다.

김범준 우아한형제들 대표는 “민간에서 처음으로 노사가 자발적인 협약을 마련했다는 점이 뜻 깊다”며 “한 기업이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장의 목소리가 실효성 있는 정책에 반영돼 노동자분들의 안전과 권익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협약에 참여한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져선 안 된다”고 강조하며, “상생하려는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라이더유니온 측도 “아직 참여하지 않은 기업들도 추가로 참여해야 플랫폼 업계 전체 생태계가 발전한다”고 당부했다.

이들은 합의문 이행을 위해 포럼 1기를 상설협의기구로 전환할 방침이다. 정부에는 ▲배달서비스업 관련 법률 제정 ▲보험료·배달료 등 노동자 권익 증진 정책 ▲고용보험·산재보험 확대 등 사회안전망 체계 개편 ▲플랫폼 노동자 직업훈련 등 제도적 지원 등 현장의 당면과제를 건의하기로 했다. 특히 사회보험 가입·징수·보장 체계 정비를 위한 방안으로는 ‘온앤오프 방식’을 제안할 예정이다.

정 정책실장은 “산재는 종속성 기준이 있기 때문에 안전 사각지대가 생겨나게 된다. 아침엔 배민에서, 오후엔 쿠팡에서 일하면 산재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라며 “온앤오프 방식은 쿠팡 앱을 켜고 일했으면 쿠팡이, 배민 앱을 켰으면 배민이 산재 처리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종속성이 있는 특고라 해도 기업이 산재보험료를 내겠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기업이 이를 찬성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라이더 7만5000명이 적은 숫자는 아니다. 협약에 강제성은 없으나 현행법보다 더 큰 보호를 약속하고 이를 명시한 것”이라며 “누구든 민노총에 연락해 (노동조건을) 해결해달라고 하면 언제든 기업에게 얘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거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막 첫 발을 뗀 만큼 갈 길이 멀다. 이날 포럼을 이끈 이병훈 위원장은 “협약을 통해 상생의 규범과 문화를 이뤄 나가길 기대한다. 배달에서 시작해 다른 업종까지 큰 물결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협약식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위원장인 박홍근 의원은 “본 협약은 역사의 징표를 남겼다. 향후 다른 플랫폼 분야로의 확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법과 제도로 안착될 수 있도록 국회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 임서정 차관 역시 “본 협약은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 있는 시도”라며 “포럼이 제안한 정책과제를 적극 검토하고 전국민고용보험과 산재보험도 고민하겠다. 다른 분야도 이러한 대화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