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생애 ②취임 후~중년기

가 +
가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은 그는 삼성그룹의 ‘반도체 왕조’를 이끌었고, 1993년 이래 단 한 차례도 메모리 반도체 왕좌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재계의 ‘거목’이자 한국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그의 생애를 사진과 함께 풀어봤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의 혁신을 부르짖는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유명한 말이 나온 ‘신경영선언’이 바로 그것이다./사진=삼성전자

이 회장이 취임한 직후 삼성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대중에게도 익히 알려진 ‘신경영 선언’이다. 그가 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무려 3개월 간 임원들과 350시간 토론을 벌이며 혁신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만든 삼성이었지만 이건희는 고민이 컸다. 1993년 2월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현지비교 평가회의 기간 현지 매장을 탐방하던 그는 통탄을 금치 못했다. 기라성 같은 브랜드들에 밀려 삼성 제품이 매장 한 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있던 것이다. 당시 이건희는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라며 성토의 목소리를 냈다.

신경영선언이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선 세탁기 조립라인 직원들이 규격에 맞지 않는 세탁기 덮개를 그 자리에서 칼로 깎아 조립하는 모습이 담긴 품질고발 사내 방송을 보며 격노했다.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기내에 동승했던 사장단과 삼성의 상품기획, 생산기술이 가진 약점을 한참 토론한 직후 그 같은 영상을 봤으니 답답했을 법 하다.

그가 생각한 삼성의 문제는 ‘타성’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경영진이 제품의 질적 개선에 노력하지 않은 채 생산량이나 판매량 같은 양적 성장에만 몰두했고, 이에 체질 개선이나 관행 탈피에는 안중에도 없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자만심에 눈이 가려져 위기를 진정 위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 등허리에 식은 땀이 난다.” 신경영 선언이 나온 이유였다.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 삼성이 반도체에 두각을 드러내자 외신들도 주목했다. 왼쪽은 1993년 포춘지 인터뷰에서 애견을 품에 안고 사진을 찍은 이건희, 오른쪽은 비즈니스 위크 표지 기사로 등장한 이건희./사진=삼성전자

삼성이 ‘라인스톱 제도’를 도입한 게 이 선언 직후였다. 생산 라인에서 불량이 나왔을 경우 즉시 해당 라인의 가동을 중단한 뒤 문제점을 해소하는 방식이었다. 라인을 중단한다는 것 자체가 회사에는 엄청난 손실이고 담당자들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1993년 제도 적용 이후 전자제품의 불량률이 30~50%가량 줄어든 것이다. 1995년 불량 무선전화기를 모아 ‘화형식’을 벌인 것도 단순한 퍼포먼스를 넘어 삼성의 변화를 보여주려는 이건희의 의지였다.

뼈를 깎는 혁신에 외신들도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보냈다. 비즈니스위크(Business Week)는 1994년 ‘SAMSUNG-A MANAGEMENT REVOLUTION(경영 혁신)’이라는 제목의 표지 기사로 기업 문화를 바꾸는 이건희를 다뤘다. 1993년 격주간 CEO 전문지 포춘(Fortune)과도 인터뷰를 했고,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도 이건희 시대 삼성이 세계 10대 기업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장문의 기사를 냈었다. 이후에도 외신들은 그를 세계적으로 중요한 경영인으로서 주목했다.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점검하기 위해 방진복을 입은 이건희 회장./사진=삼성전자

이건희를 말하는 데 있어 단연코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반도체다. 1974년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사비를 털어 살 당시부터 그는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경영 실패로 회사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로 흡수된 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작고하기까지 철저히 경영자 수업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룹 반도체 관련 중요한 의사결정은 모두 그를 거쳐 탄생했다. 삼성그룹 총수로서 이건희의 처음과 끝에는 늘 반도체가 있었다.

삼성은 1983년 미국·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했고, 이듬해 256K D램, 1986년 1M D램을 만들었다. D램 개발이 기술적으로 어려워졌을 당시 반도체를 위로 쌓는 ‘스택’ 방식과 아래로 파는 ‘트랜치’ 방식 중 스택 방식을 차용하며 4M D램 개발에 성공한 것도 이건희 회장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만들며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삼성은 2000년대 초 ‘메모리반도체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D램 의존도를 줄이면서 낸드플래시 시장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이어 나노 기술을 상용화하는 게 주된 골자였다. 플래시 메모리가 하드디스크나 플로피 디스크, CD롬를 종식시킬 것이란 판단은 당시엔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삼성은 과감하게 플래시메모리에 투자했고, 오늘날 이 분야 세계 1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이건희(왼쪽 두 번째) 회장이 2010년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여해 첫 삽을 푸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왼쪽 네 번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보인다./사진=삼성전자

삼성의 상징과도 같은 용어, ‘초격차’라는 말도 반도체로부터 비롯됐다. 남들보다 더 빨리 신기술을 만들어 상품을 내놓고, 많은 양을 팔아 투자 비용을 회수한 뒤 경쟁사가 제품을 생산할 땐 가격을 낮추는 것. 삼성이 1993년 전세계 반도체 패권을 잡은 이래 단 한 번도 그 지위를 놓치지 않은 건 이건희의 반도체에 대한 막대한 투자와 경영 합리화가 뒷받침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2010년대 들어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내세워 우리나라를 추격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전문가들은 이미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선 우리나라와 중국 기술 격차가 5년 이상 벌어져있어 사실상 따라잡기 어려운 상태라 강조한다. 그리고 그 중심엔 삼성이 있다. 종합 반도체 회사로서 ‘세계 1위’ ‘세계 일류’를 내세우는 삼성은 이제 2025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세계 1위가 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이건희(가운데) 회장이 2011년 7월 6일 남아프리카공아국 더반에서 열린 123차 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선정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사진=삼성전자

이건희의 독특한 이력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직이다. 어렸을 때부터 레슬링을 사랑해 직접 선수로 뛰기도 했던 그는 회장으로 오른 뒤에도 지속적으로 스포츠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며 출근도 하지 않은 채 한남동 거처 인근 집무실 ‘승지원’에서 미래 경영 방향에 골몰했던 그이지만, 글로벌한 스포츠 관련 이벤트에는 그의 얼굴이 자주 등장한다.

과거 이건희 관련 보도를 보면 그가 IOC 위원이 되기 위해 삼성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삼성으로서도 IOC 위원 선임은 상징적인 일이지만, 그만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오르는 것인 만큼 그룹 차원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스포츠 선진국으로서 입지를 높이고, 나아가 2018년 한국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하게 된 데는 그의 기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삼성 측은 “이 회장은 IOC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국제교류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촉매제로 인식하고 1997년부터 올림픽 톱 스폰서로 활동하는 등 세계 스포츠 발전에 힘을 보탰다”라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꾸준히 스포츠 외교활동을 펼쳐 아시아 최초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1988년7월 23일 정계 최고 경영자 전지 세미나에서 발언하는 이건희 회장./사진=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삼성은 반도체를 필두로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1987년 10조원이었던 자산은 2018년 878조원으로, 매출은 9조9000억원에서 386조6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그 이면엔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늘 혁신을 추구하는 이건희의 경영 철학이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그는 2014년 쓰러진 뒤 6년 간 일어나지 못했고, 삼성이 지배구조 문제로 격랑으로 휘말리는 사이 그는 영원히 눈을 감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