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스]삼성물산에 물린 KCC…있어도 활용못하는 1.9조 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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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지난 25일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와 함께 향후 삼성의 지배구조 변화에 대한 전망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이 회장이 보유한 18조원 규모의 주식을 상속 받으려면 11조원으로 추산되는 천문학적 상속세를 마련해야 하는데, 아무리 국내 재계 1위 가문이라 할지라도 11조원의 현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죠. 총수 일가들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 매각 등 다양한 추측들이 나오고 있어 삼성의 지배구조는 향후 소폭이든 대폭이든 변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은 사실 오랜 기간 지속돼 온 이슈입니다. 2010년대 초반부터 계열사 간 합병, 자사주 매각, 지주사 전환 검토 등 온갖 방법들이 활용됐고 또 그 가운데 다른 그룹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삼성에 도움을 준 주인공은 바로 KCC입니다. 두 차례나 백기사를 자청하며 삼성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했죠. 구체적으로는 삼성 계열사 지분을 인수해 우호세력으로 활약했습니다.

9년간 이어져 온 동맹관계

삼성과 KCC의 동맹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습니다. 가장 처음 KCC와 삼성이 손을 잡았던 시기는 바로 2011년 12월로 약 9년 전입니다. 당시 KCC는 삼성에버랜드(현 삼성물산)의 지분 17%를 총 7739억원에 인수하며 단숨에 2대주주로 올라섰죠. 국내 대기업그룹 계열사가 다른 그룹 계열사의 2대주주 지위에 오르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물론 이 투자는 KCC 입장에서 전혀 나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잭팟’이라고 표현할 수 있죠. 삼성에버랜드가 KCC에 지분을 매각한 이후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바꾸고 상장을 했는데, 상장과 함께 삼성에버랜드의 지분가치가 뛰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부 지분을 매각해 1200억원의 차익도 실현했으니 아주 좋은 투자였던 셈이죠.

그렇다면 삼성은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왜 팔았을까요? 결과적으로 삼성에버랜드를 상장했으니 가만히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만 해도 괜찮았을 텐데요. 여기에는 2007년 개정·시행된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이 작용했습니다. 금산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은 동일계열 회사의 주식을 5%까지만 보유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한 마디로 삼성카드는 지분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KCC는 이를 돈까지 빌려오며 사준 것입니다.

삼성물산 5% 이상 주주 현황. / 자료=사업보고서

KCC는 약 3년 뒤인 2015년 삼성의 지배구조 이슈와 관련해 또 한 차례 등장합니다. KCC는 2015년 6월 블록딜 형식으로 삼성물산이 보유한 자사주 899만557주 전량(5.76%)을 6743억원에 사들였습니다. 당시 삼성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Elliott Management)가 합병안에 반대했고, 이에 따라 KCC가 삼성의 우호세력으로 나선 것이죠.

현재 KCC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의 가치는 1조9000억원에 달합니다. 올 상반기 기준 KCC는 삼성물산 주식 1700만9518주를 갖고 있고, 28일 기준 삼성물산의 주가는 11만3000원에 마감했습니다. 주식 수와 주가를 곱하면 1조9136억원으로 계산됩니다.

있어도 활용 못 하는 1.9조 주식?

그런데 KCC는 과연 이 삼성물산 지분을 매각해 현금화할 수 있을까요? 과거 교환사채(EB) 발행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과적으로 자산 유동화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올 2분기 기준 삼성물산의 주주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보통주 기준 17.33%의 지분을 보유해 최대주주로 있구요, 그 다음이 9.10%의 지분을 소유한 KCC입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각각 소유한 지분율은 5.6% 수준입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KCC가 외부에 지분을 모두 매각할 경우 삼성의 지배구조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인 거죠. 한 마디로 KCC에게 1조9000억원 규모의 삼성물산 지분은 ‘여우와 두루미’ 이솝우화에 나오는 호리병에 담긴 음식인 셈입니다. 물론 지분 일부만 매각하거나 삼성이 지분을 되사가는 방법들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삼성의 지배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KCC 독단적으로 삼성물산 지분을 매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만약 KCC의 영업활동도 순조롭고 자금상황도 여유롭다면 굳이 삼성물산 지분 매각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KCC의 상황은 딱히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위기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죠.

KCC 실적추이. / 자료=사업보고서 등.

한 번 2010년부터 2019년까지 과거 10년치 KCC의 영업실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매출을 보면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3조원 이상을 뽑아냈습니다. 2017년에는 규모가 4조원에 가까운 3조9000억원에 달하기도 했죠. 2019년에 3조3000억원 수준으로 다시 줄어들긴 했지만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수익성 악화는 매출감소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한창 실적이 좋았던 2015~2017년에는 3년 연속 영업이익이 3000억원을 웃돌았었는데요. 2018년에는 2400억원으로 줄어들더니 2019년에는 1400억원으로 또 한 차례 급감했습니다. KCC가 지난 10년 간 100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것은 2011년 1200억원 이래로 처음입니다. 이에 따라 한 때 9%를 넘었던 영업이익률도 4% 대로 떨어졌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과연 올해는 어떨까요. KCC는 올 상반기 기준 매출액 2조5000억원, 영업이익 635억원을 거뒀습니다. 매출 급증은 2019년 인수한 미국 모멘티브퍼포먼스머티리얼스(Momentive Performance Materials)가 2020년부터 연결 실적에 포함됐기 때문이지 자체적인 실적 호전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멘티브퍼포먼스머티리얼스(이하 모멘티브)가 연결실적에 포함되며 수익성은 더 나빠졌습니다. 영업이익률은 2.5%입니다.

실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재무상태 또한 좋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2010년부터 KCC의 총차입금은 점진적으로 증가해왔습니다. 2014년 처음으로 총차입금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섰고, 2년 뒤인 2016년에는 2조원을 초과했습니다. 기업의 재무상태 주요지표 중 하나인 부채비율은 2019년 110.7%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100%를 넘었습니다.

KCC 재무지표 추이. / 자료=사업보고서 등.

눈에 띄는 것은 올해입니다. 각종 지표가 갑자기 나빠졌죠. 차입금 규모가 5조원을 초과하고 부채비율은 150%로 치솟았습니다. 역시 KCC가 사운을 걸고 투자를 단행한 미국 모멘티브 때문입니다. KCC가 2019년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한 모멘티브는 그동안 관계기업으로 설정돼 있었으나 올 초 종속회사로 신분이 바뀌며 모멘티브의 재무상태가 KCC의 재무제표에 실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거액을 주고 인수한 모멘티브가 아직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데 있습니다. KCC의 2020년 반기보고서 내 연결재무제표 주석에는 모멘티브의 요약 재무정보가 나와 있습니다. ‘MOM Holding Company와 그 종속기업’이라고 표시돼 있는데요, 자본총계가 4800억원인데 부채총계가 3조45000억원에 달합니다. 부채비율로 따지면 700%가 넘는 수준이죠. 그렇다고 영업실적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매출규모는 1조2300억원으로 상당하지만 순손익은 1000억원의 적자를 냈습니다.

모멘티브 2020년 상반기 요약 재무제표. / 출처=반기보고서.

물론 KCC가 모멘티브를 인수한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건자재와 도료 사업의 성장 한계가 보이는 상황에서 첨단소재업체로의 변신을 위한 실리콘 사업 확장은 오히려 좋은 선택이죠. 다만 현재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것일 뿐입니다.

최근에는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모멘티브가 지난 8월 북미 지역의 실란트 사업을 독일 헹켈에 약 2400억원에 매각했습니다. 같은 달 서울 서초구 잠원동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을 KCC건설에 1600억원을 받고 팔기도 했구요.

이렇다 보니 KCC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 활용법이 제한적인 게 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삼성물산 지분을 현금화해 1조9000억원을 확보할 수 있다면 자산을 매각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물론 KCC가 삼성물산 보유 주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다 추측일 뿐이죠. 어쩌면 초장기 ‘존버’를 통해 엄청난 차익실현을 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