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와 죽은 인문학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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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지시간으로 2011년 3월2일, 샌프란시스코 어바부에센터에서 애플의 제품발표회가 열렸다. 이 곳에서 병가로 잠시 회사를 떠났던 잡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건재했다. 그곳에 시한부 인생 따윈 없었다. 잡스는 특유의 자신감과 독설을 가지고 더 빠르고, 더 가볍고, 더 매혹적인 아이패드2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의 71분 발표는 국내에서도 자주 소개되는 ‘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을 강조할 때 절정으로 빛났다.

잡스의 신화는 그 발표로 끝나지 않았다. 잡스의 발표가 끝남과 동시에 국내 온라인 생태계 곳곳에서 잡스와 잡스의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회자됐다. 그렇게 보면, 잡스의 왕의 귀환은 애플만 살리지 않았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잡스 만큼 인문학을 마케팅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잡스가 정말 우리 인문학의 구세주인가?

먼저 잡스의 인문학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잡스가 말하는 인문학은 정확히 말하면 반드시 인문학은 아니다. 인문학은 영어로 휴머너티스(humanities)다. 그러나 잡스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할 때 종종 연관을 짓는 문사철(文史哲)과 직접 대응하지 않는다.

이 잡스의 리버럴 아츠를 진정 이해하려면 2005년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만 기억하면 부족하다. 그가 리드 대학에서 배운 동양 서예를 살려 우아한 폰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다. 그같은 접근법이 옳다면, 우리도 무언가 인문학적인 소재를 탐구하게 되면 잡스처럼 시대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연히 아니다. 그것이 길이라면, 이미 전세계 수많은 잡스의 추종자들 중에서 수많은 잡스의 2세들이 나와야 한다. 잡스를 잡스일 수 있게 만들었던 인문학은 인문학적인 소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보자. 산업 시대는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대에 어떻게 잡스는 정부나 회사의 지하실에 잠들어 있던 컴퓨터를 개인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컴퓨터를 계산기가 아니라 개인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일반적 목적을 가진 기계로 볼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그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다시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질문이 그의 인문학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것은 기계를 생명체로 보았던 초기 인공지능의 아버지 마빈 민스키나, 컴퓨터가 인간의 숨겨진 가능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로 보았던 앨런 케이 같은 인물들이 품었던 열정이고 야심이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가 얼마나 더 인간적이고 얼마나 더 개인적일 수 있느냐 하는 호기심이다. 그것이 잡스를 잡스일 수 있게 만들었던 인문학, 혹은 그의 리버럴 아츠이다.

이 잡스의 인문학의 정수, 이 질문이 시작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리버럴 아츠가 태동한 서양 근대의 계몽주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 시대에 리버럴이라는 말은 개혁적 성향을 뜻했다. 신적인 권위(교리)와 인간적인 권위(왕권)에 대한 급진적 작별을 의미했다. 아츠는 기술, 예술을 뜻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 말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을 그 과거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그리고 자연을, 사회를 개선하고 개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물론, 이 계몽주의의 사상과 열기는 광기에 치달린 프랑스 혁명의 이슬로 일찍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명맥은 오늘날까지도, 스티브 잡스에게까지도 이어진다.

그 이유를 우리 시대의 혁명가 잡스에 견줄 수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에게서 찾아보자.

그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계몽주의의 막을 연 프랜시스 베이컨은 잡스가 엔지니어 출신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수학적 재능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뉴미디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산문(콘텐츠)과 인쇄술(플랫폼)의 결합이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지 알았다. 잡스가 기술과 디자인의 융합이 만들어 낼 마력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시대, 베이컨 역시 그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비전을 발견했다.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학의 갈 길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과학은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과학과 다르다. 그 과학은 이학, 공학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을 포괄한다. 모든 지식이 하나의 공통된 원리로 설명된다고 본 그에게 학문간 구별은 없었다. 그는 이 과학을, 리버럴 아츠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잡스가 컴퓨터와 디자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처럼, 이 과학을 통해 인간이 이성과 실험으로 무장해 새로운 지식의 지평을 개척할 수 있다고 봤다.

사실, 잡스 만큼이나 베이컨도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 새롭게 개척되는 지식의 지평선이 곧 돈이, 힘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천문학을 포함한 새로운 과학의 발전은 항해술을 급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잡스가 손수 애플 제국을 건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이컨의 영국은 대항해시대를 통해 팍스 브리태니카에 등극했다. 그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힘은 은유로 그치지 않았다. 역시 잡스의 리버럴 아츠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스티브 잡스의 리버럴 아츠는 우연도, 행운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필연이며, 시대의 반복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필요를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프랜시스 베이컨,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인문학을 이 시대 최고의 인문학 대변가인 잡스가 기사회생시킬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위에서 보다시피 잡스의 리버럴 아츠와 문사철이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꼭 문학을 읽고, 철학을 탐구하고, 역사를 꿰뚫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수학으로도, 생물학으로도 그같은 접근법은 터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목적지인, 대담한 질문을 정확하게 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더 근본적이다.

잡스의 인문학이 우리 인문학을 살리지 못할 까닭은 많은 경우 현재 인문학의 위기의 본질적 원인은 대학이 상업화되어서도, 신입생들이 다른 단과대학에 비해서 인문대학을 외면해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잡스라는 최고의 모객꾼이 있어야 인문학이 흥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 변해야 인문학이 살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리버럴 아츠라 부를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있다.

인문학이 현재의 신세가 된 까닭 중 하나는 인문학이 그 동안 수 없는 사회 변화에도 지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만 봐도 30년 전, 아니 10년 전 강의안과 교수법이 오늘날과 비교해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 학생들은 그러한 강의들을 통해서 자기 주변의 변화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얼마나 넓게, 그리고 얼마나 대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

물론 경영이나 공학과는 달리 최신의 사례나 이론, 기술이 인문학에서 그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최신 장비나 교수 기법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도 변해야 될 것은 있다. 그것은 비록 텍스트인 고전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한 질문은 계속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고전을 지금 왜 여기에서 읽어야 하냐는 질문의 배경이 되는 문제 의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현실과 그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 무심해서는 나오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 컴퓨팅, 소셜 네트워크라는 최근 ICT 생태계의 3대 트렌드를 인문사회적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해석하는 강의가 우리 대학에서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 혹은 좀 더 사회적 측면에서 지식의 공유가 시대적 흐름인 시대에 인문학은 이같은 흐름을 주도하는 데 얼마나 앞장서고 있는가? 상업화되어 가는 디지털 환경에 맞서 우리 대학들은 공공 지식을 확대하는 공익적 목적에 대해서 얼마나 기여하고 있으며, 그 일을 위해 인문학은 어떠한 사명과 역할을 말하고 있는가?

역설적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보면 잡스의 인문학은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잡스의 인문학은 우리의 인문학이 오히려 놓치고 있던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문학의 가장 큰 역할과 소명이다. 인문학이 할 일은 그들이 질문하지 않을 질문에 대해서, 그들의 상식으로는 존재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이다. 그 것은 각종 다른 학문들이 전통적으로 인문학이 했던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 가운데 인문학이 져야 할 책임이다. 우리의 인문학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향해 질문을 하고 있는가.

따라서 한국의 인문학이 살아나려면, 이 죽은 인문학의 사회가 부활하려면, 우리에게도 스티브 잡스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은 모객꾼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극장이 아니다. 상영 시간을 채우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객에게 감동과 전율을 줄 수 있는 콘텐츠다. 그리고 시대를 통찰하고 인도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이 만든 것이다. 그 위기를 해결할 열쇠도 인문학 안에 있다. 이제 디지털 시대가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인문학이 답하라.

(사진 : 위키피디아. CC BY-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