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성숙한 e토론문화, 한국은 왜 못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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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중국 고사성어다. 같은 사물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새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9월30일 열린 ‘제9회 정보문화포럼’이 새삼 가르쳐준 교훈이다.

정보문화진흥원 주최로 이날 열린 정보문화포럼은 올해 상반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집회를 다뤘다. ‘성숙한 인터넷 토론문화, 어떻게 가꿀 것인가’. 제목대로 100여일에 걸친 촛불집회 기간동안 온라인 게시판의 토론문화를 분석하며, 성숙하고 믿음직한 온라인 토론 방식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정보문화포럼

기조 발제를 맡은 조화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촛불집회 기간 토론과 논쟁이 활발했던 주요 인터넷 사이트의 글들을 분석한 결과를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조 교수는 4월18일부터 6월30일까지 자료들을 토대로 다음 아고라 정치토론방, 82쿡닷컴, 다음 카페 ‘엽기 혹은 진실‘ 등 3곳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조화순 교수는 “정보제공의 개방성, 다양성, 상호작용성 등 3가지 관점에서 이들 사이트를 분석한 결과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온라인 토론을 통한 숙의민주주의는 이뤄졌다고 보지만 개방성과 다양성 측면에선 아직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촛불시위 기간동안 집단지성에 의해 잘못된 정보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율적으로 수정되거나 보강되고 ▲수평적 네트워크에 의한 정보소통이 확산된 점 등을 긍정적 변화로 꼽았다. 하지만 동시에 ▲잘못된 정보가 제어 없이 유통되는 현상이 나타나거나 ▲같은 의견을 지닌 또래 집단끼리 단결하는 경향이 나타난 점 등을 들어 아직까지 상호작용성 면에선 부족하다고 조화순 교수는 지적했다.

민주주의2.0 ‘굿~’, 청와대 게시판 ‘갓!’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윤성이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성숙한 온라인 토론문화를 위한 조건을 다양한 사례를 곁들여 발표했다.

윤성이 교수는 “우리 사회는 일방적인 정책결정이나 통보를 넘어 다양한 온라인 여론을 수용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책임 있는 온라인 정치참여 기회나 훈련이 우리에겐 한 번도 주어지지 않고 방치돼 왔다”며 “지금과 같은 혼란은 애당초 불가피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온라인 숙의민주주의를 갖추기 위해선 단순히 네티켓이나 시민의식에 기댈 것이 아니라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윤성이 교수는 제도 운영자 또는 정책당국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다음을 꼽았다. 운영자가 ▲온라인 토론을 위한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고 ▲쟁점을 쉽게 정리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누리꾼 질문에 응답하고 토론에 적극 참여하고 ▲토론 결과를 정리해 정책에 반영하고 ▲결과를 반드시 공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윤성이 교수는 이같은 요건을 제대로 갖춘 성공적인 국내 온라인 토론 사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9월 중순 개통한 ‘민주주의2.0‘과 ‘구로구청‘ 사이트를 꼽은 반면, 가장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곳으로 청와대 자유게시판을 꼽아 눈길을 끌었다.

예컨대 청와대 자유게시판은 사회자나 편집자 없이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는 공간으로, 올바른 토론을 위한 조건이나 장치를 갖춰놓고 있지 않다는 것이 윤성이 교수의 지적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2.0은 발제자를 따로 두고 관련 자료를 제공하며 ‘발제’, ‘질문’, ‘반론’처럼 글의 성격을 머릿말 형태로 밝히고, 토론 과정에서 관리자가 중간 정리도 올리는 식의 장치를 갖췄다.

구로구청 또한 운영자가 구민로부터 미리 제안을 받아 토론 주제를 정하고, 관련 참고자료와 전문가 의견을 제공해 토론을 돕는다. 토론이 끝나면 운영자는 토론 결과와 요약본을 웹사이트에 게시하고, 관련 부서에 의견을 전달하고 조치결과도 공개한다. 이같은 식으로 토론 참여부터 정책반영까지 투명하고 합리적 절차로 이뤄지는 것이 이상적인 온라인 토론 제도란 것이 윤성이 교수의 설명이다. 이 밖에 미국환경보호청(EPA)이나 온라인 토론 사이트 슬래시닷 같은 해외 모범 사례도 곁들여 소개했다.

“전세계 성공 모델 많은데, 왜 정부는 시도 못하나”

온라인 토론문화를 둘러싼 연구와 토론은 PC통신 시절이던 90년대 중반부터 활발히 진행돼 왔지만, 그 효용성을 놓고는 지금까지 간극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발표에 이은 패널토론은 성숙한 온라인 토론문화와 방식에 대한 온도차를 그대로 드러낸 자리였다.

토론자로 나선 강태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성숙한 토론을 위해선 토론 발언자를 한 사람의 정당한 발언자로 인정하고, 형식과 절차를 수용하며, 주장은 근거를 통해 입증하고, 승패는 토론을 지켜본 수용자들이 결정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며 “정부는 촛불집회 기간동안 촛불배후론 등을 들먹이며 인터넷 토론자들의 자격을 박탈했다”고 인터넷을 대하는 정부 태도를 비판했다.

강태완 교수는 “인터넷 토론은 찬반 구조를 명확히 갖고 있다는 점에서 토론 형식상은 걸맞는 논의의 장”이라며 “조화순 교수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보면, 촛불집회 기간동안 온라인 토론의 방식은 나름의 논증 형식을 갖췄다”고 온라인 토론의 효용성을 비중 있게 바라봤다.

이항우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인터넷 공간에 대한 현 정부의 ‘역주행’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항우 교수는 “세계 각국의 전자민주주의 혹은 온라인 숙의 실험은 대체로 좋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다양한 실험과 시도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갖췄다”며 “문제는, 왜 그런 훌륭한 모델들이 우리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있지 않는가를 분석하는 일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이항우 교수는 “인터넷 실명제 강화, 사이버 모욕죄 도입, 게시글 삭제 등 공론장을 위축시킬 수 있는 정책들이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며 “이는 하버마스가 말한 숙의의 규범적 조건들 중 하나인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들”이라고 정부의 그릇된 정책 방향을 비판했다.

이같은 입장엔 이원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도 대체로 동의했다. 이원태 책임연구원은 “우리나라는 물질적·법적 규범을 강조하는 로마식 모델을 대체로 강조하는 편인데, 열린 광장에서 표현을 강조하는 그리스식 시민 모델이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민주주의 확장을 위해 필요하다”고 열린 공간의 힘과 가능성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제도의 빈곤을 고민하기에 앞서,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함께 자리한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도 “성숙한 토론을 통해 숙의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이 비단 인터넷만의 문제인가”라고 되물으며 “문제는 국민과 적극 소통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에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 없고 이슈도 조작…권력에 맞는 책임과 규제 부여해야”

반면, 온라인 토론의 역기능과 부작용을 성토한 목소리도 있었다. 변희재 인터넷미디어협회 정책위원장은 “수많은 웹사이트에서 저마다 다른 토론이 수없이 이뤄지는데, ‘인터넷 여론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웹사이트의 어떤 여론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라고 되물으며 “인터넷 토론이나 인터넷 여론이란 말을 쓰지 말자”고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변희재 정책위원장은 특히 포털의 역기능을 집중 지적했다. 그는 “PC통신 시절 사설 BBS들이 그나마 객관적 토론장이었는데, 2002년부터 포털이 여론을 독점하면서 다양한 토론방이 사라지고 포털 게시판으로 집중됐다”고 분석하며 “다음 아고라는 편집진이 어떤 이슈를 상단에 올리느냐에 따라 여론이 좌지우지되는 만큼, 토론방이라기보다는 정치 웹진에 가깝다”고 다음커뮤니케이션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변 정책위원장은 “지금처럼 정부 조치가 없을 때도 인터넷엔 자본이나 권력이 수없이 개입했다”며 “법치로 다스리지 않을 땐 오히려 인터넷이 자본 권력에 더 좌우된다”는 색다른 논리를 펼쳐 시선을 모았다.

이택 전자신문 논설실장도 거들었다. 이택 논설실장은 “우리나라 사이버 토론은 감정의 유치를 위한 욕설이나 비방, 과도한 인신공격 등으로 틀림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존재하며, 여기엔 포털 책임도 있다”며 “포털이 사실상의 언론 권한을 가진 만큼, 책임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규제 틀을 갖춰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참석한 최성진 다음커뮤니케이션 대외협력실장은 “다음 아고라는 누리꾼이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며 “메인 페이지에 찬반 의견을 양쪽에 게재하는 등 나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최성진 실장은 “아고라는 의견 표출 공간이지 특정 의견이 장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며, 특정 의견을 가진 사람은 커뮤니티나 개인 블로그를 통해 표출할 것”이라고 ‘편집진 의도대로 이슈가 조장된다’는 변희재 정책위원장의 주장을 반박했다.

김혜영 행정안전부 정보문화과장은 “성숙한 온라인 토론문화를 위해 가치규범을 확산하거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정부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민간부문의 노력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며 “온라인 정보문화의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시민단체나 블로그 네트워크 등 민간이 주도하는 정보문화가 조성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정부의 노력을 설명했다.

귤화위지. 아무리 좋은 제도도 누가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지금 정부는 춘추전국시대의 해묵은 이 교훈과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