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무풍지대’ IT업계에 부는 가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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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온라인 게임업체에서 일하던 A씨는 지난 달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면과 달리 게임 업체들의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 이 업체의 경우도 한 달에 많게는 수십 명 이상 인원변동이 있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시도하던 A씨는 어느날 해고통보를 받은 것이다.

전체 직원이 10여명 정도인 한 소규모 교육 컨텐츠 업체에 다니는 B씨는 요즘 직장 내에서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한 상태다. 사장은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는 듯 1년마다 거의 모든 직원들을 갈아치웠고 B씨의 경우처럼 연봉 1000만원에 불과한 병역특례자는 3개월 안에 새로운 직장을 찾지 못하면 군에 입대해야 하는 상황때문에 더 많은 야근과 휴일근무를 강요당했다. 현재 B씨는 한 노동단체의 도움을 받아 계속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퇴사했다. 출근을 해도 업무가 주어지지 않고 새로 충원된 직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따돌림을 받고 있다.

IT 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비판과 함께 노동조합 운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지난 2000년 민주노총이 테헤란밸리에 대한 전략적인 조직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후 6년만이다.

그동안 거대 통신 업체들을 중심으로 일부 IT 노조들이 활동해 왔으나 100인 이하 종업원으로 구성된, 전체 기업의 90%가 넘는 대다수 IT 기업들의 노조 결성 움직임은 실패를 거듭해 왔다. 한글과컴퓨터, 알라딘, 나모인터랙티브 등에서 한 때 노조가 결성되기도 했지만, 노조 활동은 경영권 분쟁 등 극한 상황에서 잠시 반짝하다가, 경영권 안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수그러들곤 했다. 이는 IT업계 노동자들의 개인주의적인 성향과, IT업종이 전략 산업으로 육성되는 과정에서 IT 기업들이 제도적인 혜택을 받아온 것 등이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A, B씨의 사례처럼 IT업계 노동 환경이 6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은 없다. 경영자들과 기업 오너들의 반노조 정서도 여전하다. 일부 노조 관계자들은 대형 IT기업들의 경우, 노조 활동 전력자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직을 한 경우에도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가운데 IT 업계, 특히 노조의 사각지대에 머물러있던 소프트웨어 업계 종사자들이 중심이 돼서 산별노조 형태의 노조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바로 IT산업노조(it.nodong.net)다. 지난 2000년의 움직임이 외부의 지원과 개입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SW 업계 종사자들 스스로가 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내부에서 먼저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별화된다.

도매업으로 등록한 IT 인력 파견업체들도 많아

사실 국내 SW 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유명하다. 야근과 철야, 휴일근무가 일상화됐고 중소 SW 업체들의 경우 임금체불도 만연해 있다. 온라인 게임 업체의 24시간 모니터링 요원처럼 박봉과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다단계 하도급 관행이 일반화되면서 도매업으로 등록하고 개발자를 대여섯 명 고용해 인력을 파견하는 업체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발주처와 고용처가 다르다는 이유로 협상의 주체가 분산돼 있다. 지난 달 포스코 사태와 똑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현장 개발자들은 하도급 시스템의 문제가 원청 SI 업체의 횡포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본래 하도급이란 일정한 업무를 일정한 기간 안에 정해진 품질에 맞춰 납품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SW 부문에 관한한 이것은 전혀 별개의 개념이다. 일단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1~2개월 후 새로운 요구사항이 늘어나기 일쑤다. 중소 SW 업체들은 차후 다른 프로젝트에 악영향이 끼칠까 발을 빼지 못하는데 그 사이 점점 요구분석이 바뀌고 보수작업이 많아지면서 전체 프로젝트 일정이 늘어난다.

중간 진행과정이 이러다 보니 프로젝트가 끝한 후 시스템 안정화 기간도 당연히 늘어난다. 하지만 프로젝트 비용이 재산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올해 9년차 개발자인 김 모씨는 "얼마 전 금융권 프로젝트에 투입됐는데 회사 앞에 여관을 잡아놓고 거의 6개월 가까이 숙식했다. 야근과 철야, 휴일근무는 예사였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는데 벽에 붙어있는 초등학생 아이의 그림 속에는 내 모습이 없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노조가 설립되지 못하는 데는 IT SW 업계만의 특성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간접고용 형태의 노동형태가 보편화되면서 단위 기업별로 노조를 설립하기 힘든 상황이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SW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1.8년이다. 비정규직이 평균 2년을 근속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고용이 얼마나 불안한가를 알 수 있다.

IT산업노조 이민영 정책부장은 "벤처나 중소 SI기업 대부분은 대기업을 상대로 한 간접고용이다. 4대보험이 지원되니 자신은 정규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주로 파견을 통해 노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비정규직이나 다를 바 없다. 아웃소싱이 보편화되면 사실상 파견근무 시스템이 합법화돼 프리랜서의 인건비까지 크게 떨어질 것이다"고 말했다.

IT 업계에는 왜 노조가 없을까

SW 노동자 스스로 갖고 있는 기술력에 대한 환상도 ‘노조  무풍지대’의 배경으로 꼽힌다. 벤처붐 시기 일부 성공신화가 마치 IT 노동자 누구나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영 정책부장은 "SW 제품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면서 원천 기술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키는 대신 ‘하나만 걸리면 된다’는 식의 투자가 여전하다"며 "더 이상의 벤처 신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원천 기술에 대해 꾸준하게 투자해 온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제품군을 무분별하게 늘리는데 치중하는가 하면 심지어 IT 부문의 수익을 부동산을 비롯해 전혀 다른 분야에 투자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현실은 SW 업체들이 수익을 낸다고 해서 노동자들에게 더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 기술력에 대한 믿음과 노동자의 권리찾기는 별개라는 것이다. 이것은 SW 업계에서 노조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이다. 적어도 합리적인 수준의 근무환경을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 노동조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SW 업계에 만연돼 있는 각종 철야와 야근, 휴일 근무는 대부분의 경우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위법이다. 근로계약을 맺을 때 야근 수당을 포함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해도 무효다. 법원 판례에 따르면, 노조를 통해 별도 문서로 합의하거나 혹은 노동자 전원이 모인 회의를 통해 회사측과 별도의 문서로 합의를 해야 한다. 한국HP의 문제남 노조위원장은 "이것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다. 올바른 절차에 따라 협상하고 파업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IT 지원 정책이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데는 소홀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통부의 대표적인 IT839 정책도 그 핵심은 유비쿼터스 환경을 조기 구축하기 위해 임베디드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기존 시장을 이에 맞게 인위적으로 재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IT산업노조 이민영 정책부장은 "국내 개발 인력은 세계 수준으로 봐도 매우 뛰어나지만 이를 자산으로 축적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UI와 업무 프로세스 중심의 프로젝트만 하다보니 SI는 상대적으로 많이 발전했지만 기반 기술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가 유비쿼터스를 조기 안착시키려고 하니 대다수 SW 개발자들이 몰려있는 중소 SI나 중소 시스템 관리 업체들은 솎아내고 임베디드 업체들을 중심으로 임의로 시장을 재편할 궁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그나마 SW 개발업체들을 겨냥한 정책들은 대부분 거래 관행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힘의 역학관계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실효성이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IT 경영자들의 반노조 정서도 여전

IT 업계 전반에 걸친 반노조 정서도 여전하다.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일하던 C씨는 2003년 IT산업노동조합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할 만큼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회사 측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가지 압력을 받았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현재는 일본으로 이직을 한 상태다. 

해외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외국계 IT기업에서 임금투쟁에 초점을 둔 노조 설립 시도가 있었으나, 회사측이 더 높은 임금 인상률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노조 무력화에 나서면서 지금은 사실상 노사위원회 수준의 유명무실한 상태가 됐다. 현장 노조 경험자들은 앞으로도 이 회사에서 노조가 조직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오랜 노조 활동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은 노조를 결정하는 문제가 결국은 구성원들의 자기 희생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한국HP 문제남 노조위원장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그렇게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인데 당장 불이익을 당할까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근로기준법은 어느 사업장이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반노조 정서가 더 강한 외국계 기업 경영자들도 꾸준하게 대화하고 논의하면서 현재는 서로 윈윈하는 관계를 만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정당하게 요구하고 합리적으로 협상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도급별 노동조건 만족도>

그러나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해도 현재까지 괄목할 만한 성과는 거의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IT산업노조의 경우에도 재작년까지 대형 업체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인력도 부족하고 20여명 안팎의 오프라인 활동가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에 따라 IT산업노동조합은 올해부터 정부와 원청업체를 겨냥해 다양한 이슈와 대안을 마련하는 한편 SW 뿐만 아니라 IT 부문의 사무직 직원들과 경영지원 팀을 조직화하기 위한 노력에 나섰다. 법무사를 통해 노동 상담이나 지난 2004년 이후 IT 산업에 대한 새로운 실태보고서를 준비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방향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들이다. 정당이나 단체에 있는 선진 활동가들도 조직해 볼 예정이다.

이민영 정책부장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IT 노동자 자신이다. 사실 IT 혁명이 마치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우리 생활이 이렇게 급속하게 변화된 이후에도 실제로 IT 노동자들의 삶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우리는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일 뿐이다. 기술과 성공신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버리고 지금부터라도 위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IT업계는 ‘노조’에 대해 경영자나 노동자 모두,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인식이 팽배하다. 오히려 ‘노조는 IT업계의 생리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다. 과연, 이러한 인식들이 옳은 것일까. IT업계는 ‘노조’가 필요없을 만큼, 노사 관계가 원만한 것일까. 아니면, 노조 문제보다 더 절박하고 중요한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2006년 가을 문턱에도 여전히 IT업계 노동 환경은 ‘첨단’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