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T산업 경쟁력 8위’ 주장의 배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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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연구개발(R&D) 환경이나 인적 자원 확보 면에서 세계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적재산권 보호나 공정 정책을 펼치려는 정부 노력은 미흡한 편입니다. IT산업을 지금보다 더욱 발전시키려면 정부 차원에서 특정 기술이나 기업을 지원하지 않고 중립적 차원에서 지원책을 마련하고,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기틀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제프리 하디 BSA 글로벌 부사장의 말에 문득 기시감을 느낀다. ‘한국은 지적재산권 보호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을 지적재산권 감시대상국(Watch List)으로 지정하며 늘 덧붙이는 ‘충고’다. 2004년에는 중국과 더불어 지적재산권 보호 수준이 가장 낮은 ‘우선감시대상국'(Priority Watch List)에 지정되기도 했다. 미국 무역대표부 자료는 다른 나라와 통상교섭을 벌일 때 압력수단으로 종종 활용돼 왔다.

사무용소프트웨어연합(BSA·Business Software Alliance). 글로벌 SW기업들의 협력체로, 세계 주요 국가들을 대상으로 SW산업과 소속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다. 어도비시스템즈, 애플, 오토데스크, CA, 시스코시스템즈, 델, HP, 인텔, IBM, 마이크로소프트, 시만텍 등 내로라하는 공룡 기업들이 회원사로 등록돼 있다.

BSA는 해마다 전문 조사기관에 의뢰해 주요 OECD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SW 불법복제율을 조사·발표해 왔다. 대개는 나라별로 SW 불법복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회원사 지적재산권 보호를 에둘러 촉구하는 데 활용됐다. 지난해부터는 SW 불법복제율 뿐 아니라 다양한 지표들을 분석해 ‘전세계 IT산업 경쟁력 보고서’란 이름의 종합 보고서로 확대 발표하고 있다.

BSA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 9월 두 번째 ‘전세계 IT 경쟁력 보고서’를 내놓았다. 한국은 IT 경쟁력 지수에서 64.1점을 기록하며 조사대상 66개국 가운데 8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3위에 비해 5단계 떨어진 성적표다. 아태지역 가운데서는 대만(전체 2위), 호주(전체 7위)에 이어 3등으로 대체로 선방했다.

종합순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뒤에 숨은 ‘데이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BSA 보고서는 OECD 주요 가입국들이 IT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환경을 갖춰야 할 지 제안해주는 참고자료다. 각 나라별로 ▲전반적인 비즈니스 환경(10%) ▲IT 인프라(20%) ▲인적 자원(20%) ▲법적 환경(10%) ▲R&D 환경(25%) ▲IT산업 개발 지원도(15%) 등 6개 부문을 기준으로 모두 25개 평가항목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전문조사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조사를 맡아 진행한다.

겉보기에 한국은 올해 꽤나 불만족스런 결과다. 지난해 3위에서 올해 8위로 5계단이나 미끄러졌다. 하지만 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난해와 올해 조사 기준이 조금씩 바뀌면서 순위 변동에 영향을 미친 탓이다. 예컨대 전체 평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R&D 환경’ 부문을 보자. 세부 항목별로 보면 ‘R&D 환경’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특허수’다. 그런데 지난해까지만 해도 산업 전반 특허수를 측정해 점수에 반영했는데, 올해는 IT산업에만 국한시켜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면서 대만이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었고 한국이 뒤로 밀렸다. 그럼에도 한국은 ‘R&D 환경’ 부문에서 종합 2위를 기록했다.

요컨대, 한국 IT산업 수준이 떨어졌다기보다는, 측정 방식에 따라 순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전반적으로 한국은 올해도 좋은 성적표를 거뒀다. 미래 IT산업 발전을 가늠하는 주요 지표인 ‘인적 자원 확보’ 면에서도 전체 조사대상 국가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광대역망이 잘 보급돼 있어 혁신적인 서비스와 제품을 공급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췄으며, 좋은 인재들도 많다”며 조사를 진행한 BSA쪽도 한국 IT산업 전망을 장밋빛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문제점’도 여전히 반복되는 모양새다. BSA는 한국에 취약한 환경으로 ‘지적재산권 보호’와 ‘공정 정책’을 꼽았다. 지적재산권 보호 수준을 가늠하는 ‘법적 환경’ 항목에서 한국은 67점을 얻어 전체 34위를 기록했다. 이 둘을 보고서는 한국내 SW 불법복제율을 43%로 추정했다. 정부가 얼마나 공정한 정책을 펼치는 지 따져보는 항목에서도 한국은 지난해 70점에서 올해 50점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IT산업 개발 지원도’ 항목에서 한국이 24위로 처진 주된 이유란 것이 BSA쪽 설명이다.

다 좋다. 한국 IT산업 전망이 여전히 밝은 편이란 점도 기분좋은 일이고,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노력을 더해야 한다는 지적도 겸허히 받아들일 만 하다. 하지만 이같은 지적을 국가간 통상교섭시 압력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정치쟁점화하려는 목소리는 경계해야 한다.

기우가 아니다. 당장 BSA 보고서를 놓고 “한미FTA를 체결하면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기틀도 함께 갖춰질 것”이란 목소리가 고개를 쳐든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자동차산업 부문에서 특히 IT 환경 개선이 기대된다”는 제프리 하디 BSA 부사장의 발표에도 한미FTA 풍경이 야릇하게 겹쳐진다. 자동차산업은 한미FTA 체결시 최대 수혜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부문이다.

‘공정 정책’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부가 나서서 특정 기술이나 표준을 우대하지 말라’는 주장은 글로벌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쪽에서 흔히 내세우는 논리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보고서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다. 회원사인 글로벌 SW업체들의 한국 시장 확대를 염두에 둔 지원사격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벤처 생태계 육성’ 주문과 관련한 지적에는 귀 기울일 만 하다. “한국은 연구개발 활동이 ‘재벌’로 불리는 일부 대기업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으며, 신생 벤처기업의 등장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것도 문제점”이라는 제프리 하디 부사장의 지적은 오롯이 옳다.

‘전세계 IT산업 경쟁력 보고서’는 똑같은 기준을 놓고 나라별로 IT산업 발전을 위한 강점과 보완점이 무엇인지 비교하는 자료로 가치 있다. BSA쪽도 보고서 제작 배경을 밝히고 있지 않은가. “이 보고서는 나라별로 IT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 요인을 살펴보는 보고서로, 나라별로 IT 전략을 수립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제작의도를 넘어선 불순한 ‘배후’는 경계해야 한다.

b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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