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기업 운명 가르는 ‘파괴적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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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명실공히 전세계 1등 반도체 생산국가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의 2011년 D램 시장 분석 자료를 보면, 전세계에 공급되는 D램 중 무려 42%를 삼성전자가 담당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독주는 지난 20년간 이어져 왔다. 국내외 2위 업체 하이닉스도 22.6%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국내 업체가 전세계 D램 시장에서 64%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이 하루아침에 반도체 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 한국 이전에 일본이 있었다. 일본은 한때 히타치를 선두로 전세계 반도체 시장의 80%를 차지했던 나라다. 일본은 왜 삼성전자에, 한국에 반도체 시장을 내줬을까. ‘일본 반도체 패전’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흥망성쇠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저자의 자기반성이 묻어나는 책이다.

왜 우리가 일본 반도체 산업이 고꾸라진 이유를 읽어야 할까. 남 얘기로 치부하기엔 너무 쓰리기 때문이다. 어디 반도체 산업뿐이랴. 흥망성쇠의 역사는 대개 비슷하지 않던가.

일본 반도체 산업이 몰락한 과정은 메인 프레임 컴퓨터용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가 몰락한 모습과 일치한다. 70년대 후반, HDD 제조업체는 메인 프레임 컴퓨터에 들어갈 14인치 HDD를 주력으로 생산했다. 이 때 개발된 작고 가격이 싼 8인치 HDD는 찬밥 신세였다. 메인 프레임 컴퓨터에 쓰기에는 용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메인 프레임에서 개인용 PC로 시대가 옮겨갈 때도 HDD 제조업체는 14인치 HDD 생산에 주력했다. 결국, 8인치 HDD를 못 본 체 했던 HDD 업체는 도산을 맞았다. 개인용 PC에 14인치 고용량 HDD는 쓸모없었다. 기술 과잉인 셈이다. 역사는 반복됐다. 현재 전세계 PC에 들어가는 HDD는 3.5인치와 2.5인치 제품이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어떨까.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체 역시 메인 프레임 컴퓨터에 들어갈 우수한 품질의 D램을 주력으로 생산했다. HDD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도 대형 컴퓨터용 고품질 D램 생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컴퓨터 시대가 개인용 PC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에도 일본 반도체 업체는 개인용 PC에 대형 컴퓨터에 들어가는 D램을 공급하려 했다. 성능은 우수하지만, 가격이 비싼 D램이 개인용 PC 시장에 먹혀들 리 없었다. 낮은 비용으로 적당한 품질의 D램을 생산한 우리나라 기업에 반도체 시장을 뺏긴 결정적인 이유다.

‘일본 반도체 패전’의 저자는 이 같은 현상을 ‘파괴적 혁신’이라고 이름 붙였다. 파괴적 혁신은 기술 혁신과 다르다. 기술 혁신은 기술에서 앞서겠다는 의지인 반면, 파괴적 혁신은 생산 과정부터 제품이 탑재될 최종 완성품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비즈니스 마인드가 첨가되는 셈이다. 이 같은 파괴적 혁신은 지속 가능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본 반도체 산업에 내려진 실패의 결과는 매서웠다. 지금 일본에 남아 있는 반도체 업체는 엘피다 뿐이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현재 전세계에 불고 있는 모바일 기기 열풍도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 스마트폰 이전 전세계 휴대폰 시장을 점령했던 노키아가 빈사 상태로 전락했고, 국내 LG전자도 스마트폰 대응에 실패했다. 이와 달리, 2007년 처음으로 스마트폰 시장에 발을 뻗은 애플은 2011년 봄,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모바일 기기 제조업체로 올라섰다.

애플을 오늘로 이끈 동력이 과연 기술 혁신일까. 애플은 소비형 콘텐츠를 두텁게 쌓아올렸다. 기술과는 거리가 먼 파괴적이고 지속 가능한 혁신이다. 혁신의 모습이 기술에서 다른 방향으로 다변화될 때, 업체의 경쟁력은 제품을 넘어선다.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한 이후 선보인 아이패드 역시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 좋은 사례다.

기술을 최우선시하는 기술 혁신이냐, 아니면 지속적으로 비즈니스를 이끌 수 있는 혁신이냐. 혁신의 모습에 업체의 운명이 갈린다. ‘일본 반도체 패전’의 저자 유노가미 다카시는 “과거의 성공 경험이 미래의 성장을 방해한다”라며 “‘하던 대로 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질책이 제법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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