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①] "기술표준? 한국정부는 발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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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 김 대리는 출근 전부터 바쁘다. 12살 생일을 맞은 딸 보람이의 선물을 고르는 걸 깜박했기 때문. 고민 끝에 보람이를 위해 모바일게임을 무선인터넷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휴대폰을 열고 한참을 고른 끝에 게임을 찾았는데… 아뿔싸! 전송이 안 된다. 보람이의 최신 휴대폰이 김 대리의 구형 휴대폰과 호환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최신 휴대폰은 죄다 미국기술을 갖다 쓴다고 한다. 10여년 전 정통부가 만들어놓은 표준 플랫폼 ‘위피’는 이제 김 대리처럼 옛날 게임을 좋아하는 일부 마니아들의 휴대폰에만 남아 있다. 5년전 미국 버라이즌이 퀄컴과 손잡고 한국에 들어올 때 예상했던 일이다. 버라이즌코리아의 이동통신 가입자수는 2500만명을 넘어섰단다. 김 대리의 머릿속에는 홀로 고군분투하던 국내 이통사가 끝내 최종 부도를 냈다는 어제 9시 뉴스가 스쳐지나갔다. 오늘따라 칼로스 밥맛이 유달리 쓰다. 

한미FTA 체결 몇 년 뒤 보게 될 지도 모를 풍경이다. 한미FTA 협상이 세 고개를 넘어섰다. 미국의 요구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 통신시장을 겨냥한 이들의 요구는 위험수위를 넘어서 실질적인 위협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통신부문 핵심 현안인 ‘기술표준 선택 자율성’ 문제를 짚어보자. 

지금까지 미국과 FTA를 맺은 나라는 10여곳. 이들과의 협상문을 보면 통신기술에 관한 미국의 일관된 통상정책이 보인다. 민간 기업끼리 사업을 하면서 어떤 기술을 채택하든 민간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기술선택의 자율성 보장’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한미FTA에서도 중요한 통신부문 쟁점이다. 미국쪽 주장을 요약하면 ‘양국 통신사업자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어떤 기술을 선택하든 국가에서 간섭하지 말라’는 얘기다. 점잖게 표현하면 ‘시장의 결정에 맡겨라’는 훈계인 셈이다.

지난 8월 21일 KISDI 주최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미 FTA IT 협상 대비 3차 토론회'. 미국이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게 된 데는 한국과 관련된 두 번의 씁쓸한 기억이 작용했다. ‘위피’(WIPI)와 ‘와이브로’(WiBro) 두 사례다. 한국은 이동통신 3사마다 제각각 다르게 쓰고 있는 휴대폰 플랫폼을 통합하기 위해 2002년 위피를 표준 플랫폼으로 내놓았다. 2005년 4월 이후 출시되는 모든 휴대폰은 의무적으로 위피를 탑재하도록 했다. ‘브루’란 CDMA 플랫폼으로 전세계 휴대폰 시장을 장악하려던 미국 퀄컴의 시도는 제동이 걸렸다. 와이브로라 불리는 휴대인터넷 서비스 또한 국내에서 2.3GHz의 단일 주파수 대역을 지정하고 사업 허가권을 주는 과정에서 미국과 통상마찰을 겪은 바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이참에 자신들의 국익에 맞게 기술표준 문제를 협상 문건으로 못박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표준’을 둘러싼 두 나라의 시각차도 존재한다. 이한영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 기술표준을 정하는 문제가 모든 나라에 합법적 권한으로 허용된 것이므로 협정에서 논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기술표준 자체가 과도한 무역장벽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보기에 따라 정당한 권한일 수도, 시장경제를 거스르는 간섭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역장벽’ 운운하는 건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하다. 통신산업은 네트워크가 곧 경쟁력이다. 이용자는 서비스 지역이 넓고 통화품질이 좋은 업체에 몰리게 마련이다. 요금이 저렴하다면 금상첨화다. 이용자가 몰리는 곳에는 장비업체도 몰린다. 따라서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을 벌인다면 전세계적 네트워크와 막강한 자본을 지닌 기업이 유리하다는 건 뻔한 이치다. 달리 말하면, 소규모 사업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그만큼 좁은 시장이라는 얘기다.

이동통신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 미국의 주장대로 기술선택의 자율성이 보장되면, 이동통신 3사는 저마다 자신에 맞는 기술과 서비스를 골라 쓸 수 있다. A사는 CDMA 방식을, B사는 GSM 방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경우 각 서비스업체별로 제공하는 휴대폰도 제각각이고, 통신망도 각자 깔아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는 중복투자이고, 이용자 입장에선 불편하다. 따라서 서비스업체로선 투자나 실패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대형 사업자의 기술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앞의 무선인터넷 플랫폼 사례를 다시 들어보자. 이같은 무한경쟁 체제에서 한국의 SK텔레콤이나 KTF, LG텔레콤이 위피를 지원하는 게임이나 서비스를 들고 미국 시장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되레 국내 시장마저 미국의 글로벌 통신서비스와 기술표준에 장악당하는 결과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박재운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 하다. “삼성전자가 아무리 크다 해도 아직은 국내에서 잘 나갈 뿐입니다. 표준은 결국 네트워크 사업자가 좌우하는데요. 삼성전자가 휴대폰을 들고 세계 무대에 나가보면 글로벌 이동통신사가 인텔이나 퀄컴과 같은 칩 생산자와 손잡고 기술표준을 좌우합니다. 결국 이들 사업자에 종속되지 않은 기업은 도태되거나 비싼 로열티를 물고 기술을 빌려 써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입니다.”

정부에 기술선택의 개입 권한을 주는 것은 이와 같은 극단적 기술종속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핀이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가능성의 확보”라며 “정부가 기술선택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면 최소한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날아간다”고 꼬집었다.

물론 협상 과정에서 둘을 적절히 병행하는 방식으로 합의가 이뤄질 수도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FTA IT협상추진단장을 맡고 있는 염용섭 연구위원은 “기술선택의 자율성이 시장에 맡기냐 정부가 표준을 정해주느냐의 이분법은 아니다”라며 “기본적으로 사업자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기술을 선택하도록 하되, 정부가 경우에 따라 적절한 규제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위피 탑재가 의무화된 지 1년만인 지난 3월, 국내 위피폰 출하대수가 1천만대를 넘어섰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 기술표준의 갈 길은 멀다. 기술 진척도는 더디고 수출은 요원하다. 일찌감치 자유경쟁의 정글로 내몰렸다면 이미 시장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빈 자리는 글로벌 기업의 기술의 차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싹’을 틔우는 일이다. 온실을 만들어 들짐승의 발굽으로부터 보호하지는 못할 망정, 정부가 나서서 기술독립의 싹을 스스로 잘라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