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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loter.net &#187; 비전 디자이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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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트위터 검열 정책 논란의 교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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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30 Jan 2012 06:12:24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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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인터넷의 역사는 공유 놀이의 역사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창조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위 웹 2.0 트렌드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1969년에 인터넷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돼왔던 현상이었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e메일부터 월드와이드웹까지 인터넷의 주요 혁신들은 모두 어떤 정부나 기업의 작품이 아니다. 개인이 자기가 필요해서 만든 후에 같은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인터넷의 역사는 공유 놀이의 역사 </strong></p>
<p>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창조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위 웹 2.0 트렌드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1969년에 인터넷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돼왔던 현상이었다.</p>
<p>간단히 생각해보자. e메일부터 월드와이드웹까지 인터넷의 주요 혁신들은 모두 어떤 정부나 기업의 작품이 아니다. 개인이 자기가 필요해서 만든 후에 같은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아무 금전적 대가도 없이 제작해 공개하고 공유한 결과물이다. 이 같은 인터넷 전통은 초기 개발자 커뮤니티에 적용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늘날의 아파치 웹 서버, 리눅스 운영체제와 같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부터 위키피디아 같은 협업 생산 통한 무료 전자백과의 성공까지 이 같은 즐거운 공유의 정신은 배후의 힘으로 크게 작용했다.</p>
<p>얼핏 생각하면 기이한 현상일 수도 있는 이 인터넷 발전사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명백하다. 일만 하며 살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의 ‘드라이브’에 의하면 사람은 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무언가 하기 좋아한다. 또한, 사람은 나누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일만으로는 살지 못하며 놀기도 해야 하고, 그리고 기왕 노는 거면 혼자 노는 것보다 같이 노는 것이 훨씬 즐겁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터넷의 비결이다. 인터넷이 지난 역사에서 다른 대자본을 가진 미디어들을 제치고 급부상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인터넷이 전세계인의 사소한 창의성을 모아 위대한 놀이를 할 수 있는 훌륭한 놀이터였기 때문이다.</p>
<p><strong>웹 2.0 이후, 상업화, 독점화된 인터넷 </strong></p>
<p>그 점에서 봤을 때 트위터, 페이스북은 어떨까. 얼핏 보면 이들은 인터넷의 창조와 공유 정신을 잇고 있는 것 같다. 트위터, 페이스북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 수 있는 훌륭한 놀이터다. 140자의 언어 마술은 사람들의 정보 교환을 획기적으로 단순화시켰고, 담벼락 글장난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벽을 헐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이들은 인터넷이 발전해온 기본 맥락과 다른 부분이 있다.</p>
<p>첫째, 이들은 모두 회사다. 즉,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업이 운영하는 서비스란 뜻이다. 서비스이기 때문에 품질 개선을 위해 노력할 테고, 갖은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려 들겠지만, 동시에 걸려 있는 이윤 때문에 표현의 자유나 프라이버시와 같은 사회적 가치들을 양보할 때도 있다.</p>
<p>물론, 기업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는 간다. 개인 정보를 이용하는 게 회사에 돈이 될 경우도 있을 것이고, 나아가 정부 눈치를 봐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후자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회사는 정부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법인체로서 정부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나아가, 회사 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계약법이란 정부가 뒤에 서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법적 상거래를 차단하거나 다른 각종 이유로 정부의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p>
<p>그러나 이들은 그냥 회사가 아니다. 사실상 전세계 온라인 소통을 독과점해가고 있는 회사다. 7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페이스북은 사실상 단일 서비스, 웹사이트를 넘어섰다. 페이스북상에서 이용자들의 체류 시간도 길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를 생산하고 소통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젠 월드 와이드 웹이 아니라 월드 와이드 페이스북의 시대가 왔다.</p>
<p>이 같은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인터넷 소통은 사실상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회사의 정책이 어떻게 바뀌는 지에 따라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난 1월26일에 트위터가 밝힌 ‘국가마다 금지된 내용을 포함한 트윗은 해당 나라에서는 접근을 제한한다’는 정책이 불편했던 까닭일 것이다.</p>
<p><strong>무조건 검열과 무조건 검열 반대의 극단을 모두 피해야 </strong></p>
<p>그러나 그 우려가 얼마나 타당한 지를 따지려면 좀 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p>
<p>먼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온라인 소통의 서비스가 아니라 플랫폼이 돼 가는 트위터·페이스북의 상업적·독점적 성격을 생각했을 때 이 같은 검열 정책이 반갑게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트위터·페이스북 같은 서비스를 아예 차단하고 바이두(百度), 시아오네이망(校内网) 같은 대체제를 공급하는 중국 같은 나라도 있고, 민주국가에서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윤리적 기준에 따라 정당하게 검열을 하는 경우도 있다.</p>
<p>이미 인터넷은 완전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 아니라 일정 부분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곳이다. 따라서 검열한다고만 해서 무조건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는 의견이며, 핵심은 그 제한이 어느 수준까지 이뤄지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락에서 무조건 검열과 무조건 검열 반대는 이 생산적 대안을 찾기 위한 합리적 토론을 막는 위험이 있다.</p>
<p><strong>트위터 검열 정책이 표현의 자유를 돕는다 </strong></p>
<p>실제로 기술사회학자인 제이넵 터프키는 트위터의 검열 정책을 충분히 검토해본 뒤, 이 정책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울 수도 있다는 결론을 <a href="http://technosociology.org/?p=678">자신의 블로그 글</a>로 올렸다. 가장 큰 이유는 투명성이다.</p>
<p>트위터가 인터넷 검열을 하는 기준은 회사가 임의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의 사회적 합의에 따른다. 그리고 그 결과는 <a href="트위터 검열 정책 논란의 교훈 ">칠링이펙트</a>와 같은 관련 웹사이트를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나아가, 예전에는 정부 요청으로 차단된 트윗은 아예 글로벌 트위터에서 사라졌지만, 이제는 해당 국가에서만 접근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트위터 계정에서 국가 설정을 바꾸면 그 트윗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동시에, 토르(Tor) 같은 우회 기술을 통해서 트위터의 방어벽을 뚫고 해당 트윗에 접근하는 것도 여전히 가능하다.</p>
<p>요약하면, 터프키는 트위터의 이번 검열 정책은 한 국가의 검열 효과가 국경을 넘는 것을 차단하고, 국경 내에서도 여전히 그 트윗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주고 있으며, 나아가 그 기준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돕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개별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며 자사의 운영을 원활히 하면서도 이용자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선을 분명히 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이 같은 터프키의 옹호 주장 역시 일리가 있다. 적어도 트위터는 투명성은 지켰다.</p>
<p><strong>우리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무엇인가</strong></p>
<p>그렇다면 과연 트위터의 이번 검열 정책이 우리의 표현의 자유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번 트위터 검열 정책은 표현의 자유에 우려한 것만큼은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작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국가별 검열 기준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독일, 프랑스 같은 곳에선 친나치적인 트윗은 규제가 된다. 미국은 테러에 협조하는 트윗은 안 된다. 전자는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위반되는 것이고, 후자는 국가 안보상의 이유다.</p>
<p>그러나 우리의 경우엔 SNS상의 위법적 표현의 자유의 정의에 대한 명백한 합의가 무엇인가. 선거법과 SNS의 충돌은 결국 헌법재판소까지 갔고, 방통심의위원회의 SNS 규제는 큰 사회적 진통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가 무원칙이다라고 욕할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적 원칙이 무엇일 지에 대해 각 이해집단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 제시를 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조건 검열과 무조건 검열 반대의 극단을 피한, 어설픈 중간이 아니라 그 사이의 적절한 중심이어야 한다.</p>
<p>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그의 역저 ‘자유론’에서 절대적인 권력은 없으며 절대적인 권리만 있다고 했다. 그 권력이 기업이든, 정부이든, 혹은 대중이든, 그것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근거가 필요하다. 그것은 SNS가 아니라 다른 어떤 뉴미디어의 제한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며, 그것이 장기적으로 기술 발전이 더 많은 통제가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주는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앞으로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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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PA 반대 &#8220;우리가 인터넷이다&#822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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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Jan 2012 05:40:42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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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지난 2011년 2월 22일, 문화체육관광부의 저작권 정책 분야 대국민 현장 업무 보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적이 있다. 토론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20명이 넘는 정책 고객 중 대학생에 불과한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그럴듯한 협회의 대표님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토론자들의 말씀을 듣는 동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날 저작권의 문제를 따지고 방향을 잡기 위해 모인 그 자리에서 나온 가장 큰 목소리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난 2011년 2월 22일, 문화체육관광부의 저작권 정책 분야 대국민 현장 업무 보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적이 있다. 토론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20명이 넘는 정책 고객 중 대학생에 불과한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그럴듯한 협회의 대표님들이었다.</p>
<p>그러나 다른 토론자들의 말씀을 듣는 동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날 저작권의 문제를 따지고 방향을 잡기 위해 모인 그 자리에서 나온 가장 큰 목소리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불법 공유가 악의 축’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디지털 기기를 많이 다루는 우리 아이들이 저작권 지식이 없거나 있어도 미흡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됐다.</p>
<p>그들이 그리는 저작권 타락상의 그림은 이러했다. 아이들은 창작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창작자의 권리를 훔친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의 이 같은 해적질 행위를 막는 해결책은 저작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불법을 저지르면 어떤 기술과 제도를 통해서든 잡고, 잡으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p>
<p><strong> 불법 공유의 진실 </strong></p>
<p>얼핏 보면 다 타당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저작권 침해 사례가 늘어난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국민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아이들의 양심이 타락해서인가, 아니면 기술이 발전해서인가.</p>
<p>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후반에는 카세트 테이프에 좋아하는 음악을 담아서 짝사랑하던 여자애에게 전해주려면 밤을 꼬박 새야 했다. 그러나 요즘엔 MP3 파일을 담아서 클라우드 서버를 통해 친구와 공유를 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즉, 이것은 도덕의 문제보다 기술의 문제다. 그 기술을 통해서 ‘복사를 하는 비용’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달리 말하면, 위기의 본상은 저작권이 아니다. 권리상의 위기가 아니라 이윤상의 위기다. 복사 비용 감소가 복사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던 산업이 위기다.</p>
<p>이렇게 논의를 전개하면, 저작권 관련 논쟁을 소위 저작권 옹호(Copyright)와 저작권 배제(Copyleft)의 이분법으로 보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주장을 사유 재산을 무시하는 급진적이고, 이른바 좌파적인 주장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사실은 전통과 역사에 기초한 보수적이고, 자본주의를 위한 주장을 한다고 생각한다.</p>
<p><strong> 저작권은 이윤 보전이 아니라 문화 발전 위한 것</strong></p>
<p><strong></strong>먼저 저작권이 법적 ‘권리’로서 원래 가지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p>
<p>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국가인 미국의 헌법에는 헌법사상 드물게 저작권 조항(copyright clause)이 실려 있다. 건국의 설계자 중 찰스 피크니와 제임스 메디슨이 넣은 그 조항에 저작권의 목적은 ‘그 저작권에 관련된 산업의 이윤’이 아니라 ‘과학의 진보와 유용한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했다. 비교적 신생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저작권법에 봐도 제1창 총칙의 제1조에 저작권법의 목적은 ‘문화의 향상 발전’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것이 명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저작권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지적재산권의 배타적 보호를 넘어서 과학의 진보와 유용한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p>
<p>더 중요한 것이 있다. 미국 헌법에서나 한국 저작권법에서나 저작권법은 제한적인 배타적 권리로 인정된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근대를 개막했다고 극찬한 만유인력의 뉴턴은 자신의 발견을 그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 거인은 지식의 공유다. 전시대의 지적 재산에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 거리가 차단되서는 새로운 창작과 발견이 나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지적 재산은 개인의 사유 재산이 아니다. 임시적으로 한 사회가 인정되는 배타적 권리에 불과하다.</p>
<p><strong> 파괴적 혁신을 죽이는 것이 자본주의적인가 </strong></p>
<p>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온라인 해적들에 대한 대테러 작업을 위해서 유례없이 수차례 개정된 저작권법은 이 같은 저작권의 목적과 역할을 왜곡해 왔다. 대표적 예가 1998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 법안(DMCA)이다. 이 법안은 흔히 미키마우스 악법이라 불린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무수한 지난 세대의 공유 지식을 통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든 디즈니가 정작 자신의 저작물은 보호 기간이 끝날 때마다 연장될 수 있도록 꼼수를 부린 것이다.</p>
<p>자본주의가 친기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업에 좋은 것이 사회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은 친기업적인 것이 아니라 친경쟁적인 것이다. 음악 산업, 영화 산업의 쇠퇴가 의미하는 것은 음악과 영화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복사를 기반으로 운영해온 비즈니스 모델이 퇴색하는 것이다. 오히려 진정 자본주의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경고한 것처럼, 모이기를 꺼려하지만, 모이면 담합하고자 하는 독점 사업가들을 걱정해야 한다.</p>
<p><strong> 미키마우스 악법 이래 최대 인터넷 악법, PIPA와 SOPA </strong></p>
<p>1998년 미키마우스 악법 이래 최대의 인터넷 악법이 등장했다. 그것이 지금 미국 상원에 입안된 지적재산권 보호 법안(PIPA)과 하원에 입안된 온라인 해적행위 방지 법안(SOPA)이다. 법안의 취지 자체는 저작권 위반 콘텐츠의 유포를 최대한 차단하자는 일차적으로는 긍정적인 내용이지만, 그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이 법안이 통과될 때 미국 인터넷이 중국 인터넷의 폐쇄성을 닮아가고, 그 미국 인터넷을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전세계가 닮아간다.</p>
<p>MIT 미디어랩 디렉터이자 영향력 있는 디지털 활동가인 조이 이토가 <a href="http://joi.ito.com/weblog/2012/01/15/why-we-need-to.html">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a>을 보면 그 구체적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DMCA의 면책 조항이 사라져 서비스 사업자의 저작권 위반 콘텐츠 관리 부담이 크게 증가한다. 이는 기존 사업자는 물론이고, 스타트업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비용 증가다. 저작권 위반 콘텐츠가 포함된 사이트는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에 의해 인터넷 주소(DNS) 차원에서 차단될 수 있다. 저작권 위반 콘텐츠가 포함된 사이트는 검색에서 제외될 수 있고, 저작권 위반 콘텐츠가 포함된 서비스는 거래가 중단될 위기에 처할 수 있다.</p>
<p>인터넷 자유를 위한 시민단체 중 하나인 <a href="http://www.publicknowledge.org/blog/managers-amendment-sopa-doesnt-fix-whats-aili">퍼블릭 놀리지(Public Knowledge)가 지적한 것처럼</a>, 많이 논의되지 않았지만 독소조항 중 하나인 것은 이들 법안에 포함된 ‘자경단 조항’(vigilante clause)이다. 이 조항은 적극적으로 저작권 위반 콘텐츠를 검열하는 업체에 면책 특권을 부여한다. 자발적으로 저작권 위반 콘텐츠를 적발하는 것을 독려하겠다는 것이지만, 이 조항은 악용될 여지가 있다. 저작권 위반을 명목으로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가 DNA 차원에서 경쟁 서비스를 차단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기 때문이다.</p>
<p>이는 달리 말하면 할리우드를 비롯한 기존 산업 세력이 로비를 통해 의회를 움직여, 시장의 경쟁이 아니라 제도의 포획을 통해 자신들의 경쟁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정적은 인터넷이다. 지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른 그 어느 산업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끝없이 혁신과 창조를 거듭해왔던 인터넷이다. 기존 산업이 슘페터적인 파괴적 혁신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변화를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택하는 것은 두 번째다.</p>
<p><strong> 왜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인가 </strong></p>
<p>그리고 이것은 따지고 보면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기업만의, 지난 1월18일 하룻동안 웹사이트 불을 끄는 ‘블랙아웃’ 운동을 진행한 위키피디아, 모질라재단, 워드프레스과 같은 웹서비스만의 문제도 아니다.</p>
<p>정치적인 각도에서 봐도 이것은 문제다. 글로벌 시민언론 네트워크인 글로벌 보이스의 창립자 레베카 메키농이 <a href="http://www.nytimes.com/2011/11/16/opinion/firewall-law-could-infringe-on-free-speech.html">뉴욕 타임즈에서 지적한 것처럼</a>, PIPA와 SOPA에는 우회 기술 개발 제한 조항(anti-circumvention clause)이 포함되어 있다. 이 조항은 작년 아랍 혁명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터넷 검열 국가들의 장벽을 시민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던 칼과 창을 무력화시킨다. 중국이나 이란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나 환영할 만한 법안이다. 이 법안의 통과는 표현의 자유와 그에 기초한 전세계의 언론, 민주주의 발전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p>
<p>따라서 우리 역시 미국 인터넷기업과 시민단체가 목소리를 높이는 이 문제를 방관할 수 없다. 문화 발전을 위한 저작권의 본의와 파괴적 혁신, 언론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지지하고 지키는 것은 우리의 문제기도 하다. 이 법안의 통과가 전세계 인터넷이 자유보다는 통제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결과를 가진다면, 우리도 반대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p>
<p>더군다나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미국법이 단순한 남의 나라 법이 아니다. 좋든 싫든 이것은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터넷의 자유를 지키는 이 싸움은 우리 모두의 싸움이다. 이것이 내가 SOPA에 반대하는 이유다.</p>
<p><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2/01/protect_the_internet.jpg" rel="lightbox[92636]" title="protect_the_internet"><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92660" title="protect_the_internet" src="http://www.bloter.net/files/2012/01/protect_the_internet.jpg" alt="" width="500" height="385"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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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저작권법부터 의회까지, 로렌스 레식의 개혁</title>
		<link>http://www.bloter.net/archives/9227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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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Jan 2012 02:38:09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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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로렌스 레식은 저작권법이 새로운 기술의 발전부터 쇠퇴하는 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균형을 잃었다고 지적하는 가장 주목받는 목소리 중 하나다. 현재 하버드 로스쿨 교수로 있는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2001년 ‘미래의 아이디어들’(The Future of Ideas)이란 책을 썼다. ‘연결된 세상의 공유지의 운명에 관하여’(the fate of commons in a connected world)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물과 공기처럼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로렌스 레식은 저작권법이 새로운 기술의 발전부터 쇠퇴하는 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균형을 잃었다고 지적하는 가장 주목받는 목소리 중 하나다. 현재 하버드 로스쿨 교수로 있는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2001년 ‘미래의 아이디어들’(The Future of Ideas)이란 책을 썼다. ‘연결된 세상의 공유지의 운명에 관하여’(the fate of commons in a connected world)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물과 공기처럼 우리가 자유롭게 나누고 함께 발전시키던 문화가 ‘지적 재산’이란 명분하에 그 문화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문화산업에 의해 구속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p>
<p><strong>잭 발렌티와의 논쟁 &#8220;저작권 확대는 헌법과 일치하는가&#8221;</strong></p>
<p>레식이 이 책을 쓰기 1년 전 미국 영화산업을 대변하는 로비스트 잭 발렌티와 하버드 로스쿨에서 했던 논쟁은 그가 결국 무엇을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는지 잘 드러내준다.</p>
<p>이 논쟁에서 발렌티는 저작권은 창작자의 영구적 권리이며 따라서 창작자의 권리 확대를 위해 저작권은 확대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식은 그것이 미국 헌법의 전통에 일치하는지 묻는다. 그 이유는 독립혁명으로 공화국을 건설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세계 역사에 드물게 헌법에 저작권 조항을 넣었기 때문이다. 찰스 피크니, 제임스 메디슨이 입안한 저작권 조항은 과학의 진보와 유용한 기술의 발전을 위하여 작가와 창안자는 그들 작품과 발견에 대해 일정 기간동안 배타적 권리를 보호받는다고 규정한다.</p>
<p>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제정된 헌법은 저작권을 정부가 허락한 ‘제한된 배타적’ 권리로 보았다는 것이다. 미국 독립혁명이 대표 없는 조세를 강요하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면, 건국의 설계자들의 어떤 형태이든 독점 권력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하다. 그리고 레식이 지적한 것은 발렌티가 말한 것과 같은 문화에 대해서 독과점 산업의 과다한 지배력 주장은 이 헌법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점이다.</p>
<p><strong>미국의 제도적 타락, 근원은 의회의 부패다</strong></p>
<p>10년이 지난 후 레식은 ‘잃어버린 공화국’(Republic, Lost)이란 밀턴의 &#8216;실락원&#8217;(Paradise, Lost)을 패러디한 제목의 책을 썼다. 지금껏 그의 책들이 사이버 공간의 법리상의 문제였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같은 주제는 의외다. 그러나 앞서 레식이 발렌티에게 질문했던 맥락을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놀랍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그의 저작권법 개혁이 1998년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 법안(DMCA) 등을 통해 좌초된 역사와 오늘날에도 많은 인터넷 업계와 시민단체에서 비난 받는 온라인 해적행위 방지 법안(SOPA)이 미국 하원에 입안되는 현실은 그에게 지속적으로 그가 지키고자 하는 미국 헌법의 공화국 정신을 붕괴시키는 원인인지 숙고하게 했기 때문이다.</p>
<p>존슨 대통령 이후 20세기 후반 미국 정치는 양당제의 균형이 무너졌고, 정치 변동성은 커졌다. 선거 비용은 급격히 증가했고, 이에 따라 정치인들이 막대한 선거 자금을 감당하기 위해 로비에 의존하는 정도도 심해졌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인들이 특별히 부도덕하고 불성실하기 때문이 아니다. 선량한 개인도 이 의회란 머니 머신에 들어온 이상 부패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다. 정치인이 자신의 이념과 선거구에 상관 없이 자신에게 돈을 대주는 산업의 이해관계를 위해 법을 만들고 통과시키게 되는 구조가 문제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오직 그 합리적 결과인 의회가 국민을 대표해야 할 국회가 이익 단체를 대표하는 기관이 된 것 뿐이다.</p>
<p>이에 ‘잃어버린 공화국’에서 레식은 강조한다. 이는 정부 지출을 통해 복지사회를 꿈꾸는 진보든, 정부 간섭을 배제해 시장의 자유를 확대하고자 하는 보수 어느 쪽의 이상도 아니라고. 그것은 정부가 지출을 하더라도 그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지 않는다면, 정부 간섭이 배제되더라도 그 결과가 독과점에 의한 경쟁의 죽음이라면, 그것은 좌우 양쪽이 원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p>
<p>예를 들어 노벨경제학자 스티글러는 전체 평균으로 보면 유전공학이나 정보산업보다 금융산업 종사자들의 수익이 지난 반세기에 급격히 높아졌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회에 기여한 바가 더 커서가 아니라 로비의 결과로 해당 산업이 받는 규제 혜택이 다른 산업보다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좌우의 어느 이념으로도 정당화될 일이 아니다.</p>
<p>이 같은 의회의 시스템적 부패에 대한 레식의 해결책은 인터넷을 통한 시민 참여를 바탕으로 단기적으론 이익 단체에 의존하지 않는 의원과 대통령 후보자를 지원하고, 장기적으론 미국 헌법 5조를 통해 국민 의회를 열어 정치 개혁을 위한 헌법 개정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레식 특유의 비관적 세계관에 기초한 참여적 해결안이 빛난다.</p>
<p>그가 설명한 세계의 암울함에 비해선 다소 낙관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지난 레식의 삶을 생각하면 이 주장이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연구만 하는 학자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가 믿는 변화를 위해 싸워왔다.</p>
<p>레식은 2001년에 ‘미래의 아이디어들’을 쓸 때 그 책의 결론으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 자조적 고백은 그의 일종의 양심선언이었다. 레식은 그 뒤 저작권법 안에서 그가 뜻한 대로 창작자에게 공유 영역에 있어서 더 많은 권리를 설정해주기 위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를 창안하는 등 새로운 시도와 노력을 했다. 지금도 그는 그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의회 개혁을 위해서 맵라이트(<a href="http://maplight.org/">MapLight</a>) 같은 시민단체에서 이사진으로 봉사하며 자기 몫을 감당한다.</p>
<p>이 레식의 ‘잃어버린 공화국’의 결론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야기로 끝난다. 헌법 제정 당시 최고령이었던 프랭클린은 그 결과를 묻는 한 여인의 질문에 ‘사모님, 당신이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공화국일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공화국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애쓰는 시민을 통해서만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같은 결말을 쓴 것이다.</p>
<p><strong> 레식의 개혁 오딧세이가주는 교훈</strong></p>
<p>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가 미국과 분명히 다른 역사적 배경, 정치적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을 넘어서 우리도 새겨볼 만한 교훈이 있다. 진보와 보수의 집권을 거치면서도 복지도, 고용도 무엇 하나 번듯하게 이루어내지 못한 대한민국 역시 이 레식의 오딧세이를 통해서 생각해볼 만한 주제가 있다.</p>
<p>그것은 첫째, 개혁은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체계적 분석과 대안이 있어야 한다. 막스 베버는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각이 없으면 그 인간은 단지 낭만적 감흥에 취한 허풍쟁이에 불과하다고 했다. 소명을 띤 사람은 이 세상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알고도 좌절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념은 오직 책임과 결합됐을 때 가치있으며, 그 책임이란 냉철한 현실에 대한 이해와 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노력을 뜻한다.</p>
<p>둘째, 개혁은 사람을 바꾸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리더십이 바뀌는 것은 큰 변화이지만 워싱턴을 바꾸겠다는 슬로건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도 난항을 거듭하는 오바마의 사례에서 보듯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관료적 품성을 가진 사람들은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보다 상급자의 명령에 혹은 주어진 현실의 이해관계에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것 역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감안한다면, 개혁은 그 현실의 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더 낫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p>
<p>이것이 저작권 개혁부터 의회 개혁까지 이어지는 레식의 10년 넘는 싸움이 태평양 건너 우리에게도 울림이 있는 까닭이다.</p>
<p><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32584" title="lessig_by_ito" src="http://www.bloter.net/files/2010/06/lessig_by_ito.jpg" alt="" /></p>
<p style="text-align: center">▲사진 : 조이 이토(<a href="http://www.flickr.com/photos/joi/4670740052/in/set-72157624195597940/" target="_blank">http://www.flickr.com/photos/joi/4670740052/in/set-72157624195597940</a>) <a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deed.ko" target="_blank">CC BY</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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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식을 지키는 싸움, 오픈 액세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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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1 Jan 2012 07:11:22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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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2008년에 제정된 미국국립보건원(NIH)의 공공 접근 정책(Public Access Policy)은 세금으로 시행한 과학 연구 결과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NIH가 재정을 지원한 연구 결과면 1년 내에 학회 심사를 거친 연구물 검색을 위한 포탈격인 퍼브메드 센트럴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다. 과학에 흥미가 있는 고등학생부터 암환자들에 이르기까지 첨단 과학의 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2008년에 제정된 미국국립보건원(NIH)의 공공 접근 정책(Public Access Policy)은 세금으로 시행한 과학 연구 결과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NIH가 재정을 지원한 연구 결과면 1년 내에 학회 심사를 거친 연구물 검색을 위한 포탈격인 퍼브메드 센트럴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다. 과학에 흥미가 있는 고등학생부터 암환자들에 이르기까지 첨단 과학의 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한 이 법안은 납세자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p>
<p>국내에서도 이 같은 학술 정보의 공유를 목적으로 하는 오픈 액세스 운동이 있으며, 그 대표적 예로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의에서 운영하는 &#8216;<a href="http://synapse.koreamed.org/" target="_blank">코리아메드 시냅스</a>&#8216;라는 학술지가 있다. 저작권자인 학술지 편집인이 주도해 1990년대에 시작한 이 오픈 액세스 학술지는 이후 서울대 의과대학 서정욱 교수 등의 노력으로 2010년 아태지역의 의학정보를 취합·공유하는 <a href="http://www.wprim.org/" target="_blank">서태평양지역 의학정보 인덱스</a>(WPRIM)로 발전했다.</p>
<p>그러나 이 같은 정책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 것은 아니다. 이 법을 통해 시민들은 정보 접근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었고, 연구자들은 더 나은 연구를 더 적은 비용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됐지만, 연구 결과물에 대한 배타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엘세비어(Elsevier)와 같은 소수의 거대 출판사들에게는 자신들의 독점 이윤을 감소시키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이들 출판사의 불만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출판사에게 좋은 것이, 문화 발전을 위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에게 좋은 것은 출판사가 가지고 있는 지적 재산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다.</p>
<p>물론, 지난 역사는 그에 대한 반증도 제공해주고 있다. 패션 산업은 저작권이나 특허권 없이 상표권만 가지고도 지난 수세기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아파치 웹서버와 리눅스 운영체제에서 보듯이 배타적 저작권에 기대지 않고도 성장했다. 최근 삼성과 애플의 특허 전쟁은 공격적 지적재산권의 관리가 그들 기업의 혁신의 원천이 아니란 점을 확인해준다. 그것은 필요한 경우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나의 경쟁력을 보수하기 위한 방어막이다. 달리 말해 사랑과 함께 나누면 나질수록 커지는, 경제학 용어로 비경합적 재화인 &#8216;지식&#8217;에 배타적 권한을 허용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장기적 사회 발전과 단기적 산업 발전간의 균형점을 찾는 상식이 요구된다. NIH의 공공 접근 정책은 바로 그 같은 균형감을 갖춘 드문 예였다.</p>
<p>출판사들에 다행인 점은 &#8216;국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가정되는&#8217; 의회에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2011년 12월16일, 미국 하원의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의원 대럴 아이자와 뉴욕주 민주당 의원 캐롤린 멜로니가 &#8216;연구 결과 법안&#8217;(The Research Works Act)을 상정했다. 이 연구 결과 법안의 주목적은 공공 접근 정책의 효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총 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법안의 핵심은 두 번째 조항으로, 1년이 지난 연구 결과물이라 할 지라도 출판사의 동의가 없이는 네트워크를 통해 일반에 공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p>
<p>산업과 의회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있다. 로비에 의한 미국 의회 부패 감시를 주요 목적으로 하는 시민단체 <a href="http://www.maplight.org" target="_blank">맵라이트</a>에 따르면 네덜란드계 대형 출판사인 엘세비어와 이 회사 고위 경영진은 2011년 의회에 31번 정치 지원금을 냈는데, 그 중에 12번의 정치 지원금이 멜로니 의원에게 갔다. 다시말해 멜라니 의원이 의원직을 유지하고 이후 유력한 로비스트로 전업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주는 곳이 출판업계란 뜻이다. 이것은 왜 그녀가 적극적으로 출판산업의 이익을 위해, 국민 기본권과 과학 발전을 저해하는 법안 통과를 위해 노력하는 지에 대한 단서를 보여준다.</p>
<p>사실 이 같은 로비의 성실함은 달력을 조금만 뒤로 넘기기만 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009년에도 비록 불발로 끝나긴 했으나 비슷한 출판산업의 로비가 있었다. &#8216;연구 결과의 공평한 저작권을 위한 법안&#8217;(Fair Copyright in Research Works Act)도 NIH의 공공 접근 정책을 제한한다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맵라이트와 역시 의회 개혁을 위해 일하는 다른 시민단체인 <a href="http://www.opensecrets.org/" target="_blank">책임있는 정치를 위한 센터</a>에 의하면, 이 법안을 지지하는 5명의 의원 모두 출판산업으로부터 평균 5150달러의 정치 지원금을 받았다.</p>
<p>물론, 이 같은 돈과 권력의 상관 관계가 인과 관계를 필연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정 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어도 그 산업의 이해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의정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로렌스 레식이 2011년에 발표한 ‘잃어버린 공화국’(Republic, Lost)에서 지적하듯, 돈을 받은 의원은 그 산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을 내릴 때 균형감을 잃기 쉽다. 따라서 신뢰하기가 어렵다. 정치 지원금을 받는 변명이 얼마나 근사하며 혹은 합법적이든, 의회가 이익단체에 대한 도덕적 부채감을 갖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도덕적 해이가, 부패가 뿌리내린다.</p>
<p>태평양 너머 나라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세계화 시대를 산다는 건, 더 이상 남의 집 불구경을 하는 사치와 안일을 피울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뜻한다. 첫째, 자기 성찰보다는 모방을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는 우리 정부의 근성상, 미국에서 도입된 정책은 그 배경과 관계 없이 비슷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도 등장할 수 있다. 둘째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다. 한미 FTA이후 그리고 그 전의 자유 무역 조항에 의해 미국과 우리의 정책 조정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이상, 미국의 법제 변화를 우리가 무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이야기다.</p>
<p>뉴턴이 만유인력 같은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배후에는 ‘지식의 공유’라는 거인이 있었다. 우리가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거인의 어깨에 올라설 수 있는 권리가 어떤 시대, 누구에게든 보존되어야 한다. 출판산업이 자신의 이윤을 위하여 미국 의회를 움직이고 그 의회의 움직임이 전세계 학술 생태계의 공공성에 영향을 미치는 이 순간, 우리는 그 원칙을 기억하고 지켜야 할 것이다. 지식경제 사회에서의 ‘자유’를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접근과 활용에 있어서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p>
<p>그러므로 이것은 시장과 정부를 통한 해결책의 우선순위로,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문제다. 미래가 특정 산업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혁신과 창조를 위한 모두의 자유를 위해 개방되어야 한다는 상식의 문제다.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한 우리 모두의 싸움은 진행중이다.</p>
<p><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2/01/open_access.jpg" rel="lightbox[91395]" title="open_access"><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91450" title="open_access" src="http://www.bloter.net/files/2012/01/open_access.jpg" alt="" width="500" height="375"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a href="http://www.flickr.com/photos/pugno_muliebriter/4037088957/">http://www.flickr.com/photos/pugno_muliebriter/4037088957</a>. CC BY)</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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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터넷을 인터넷답게 하기 위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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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30 Dec 2011 02:15:10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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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2011년이 끝나간다. 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아랍의 자스민 혁명부터 SNS가 승세를 정했다는 10.26 서울 시장 보궐 선거까지, 인터넷은 이 한해 동안의 국내외 주요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아주 쉽고 당연한 설명은 스마트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마찬가지로 스마트 혁명은 SNS와 모바일의 결합을 통해 시민의 사회 참여의 역량을 강화시켰고, 그들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2011년이 끝나간다. 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아랍의 자스민 혁명부터 SNS가 승세를 정했다는 10.26 서울 시장 보궐 선거까지, 인터넷은 이 한해 동안의 국내외 주요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아주 쉽고 당연한 설명은 스마트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마찬가지로 스마트 혁명은 SNS와 모바일의 결합을 통해 시민의 사회 참여의 역량을 강화시켰고, 그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새로운 판을 만들어 주었다.</p>
<p>낭만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조선말 민중의 항거를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적 질서의 붕괴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듯,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의 그림처럼,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아수라장이다.</p>
<p>왜 그 같이 모두 함께 뒹구는 진흙탕이 되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혁신은 과거의 체제 아래에서 번성하던 모든 이들을 원수로 만든다고 했다. 1979년 개혁개방 이래 지속 발전해온 중국이 전세계에, 특별히 강대국들에게 위협과 불안의 심정을 주었듯, 지난 1969년 개발 이래 유례없이 급속도로 발전해온 인터넷은 정보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기존 질서를 흔들었다. 음악과 영화를 비롯한 콘텐츠를 복사·판매해 수익을 창출하던 음반사와 영화사는 파일 공유 사이트(P2P)와 경쟁하게 됐다.</p>
<p>정보 생산과 분배에 관련된 다른 산업도 예외 없다. 신문사들은 매출 감소에 시달리다가 그나마 상황이 나아보이는 방송에서 호기를 찾아 종합편성채널이라는 이름 아래 방송 산업에 뛰어들었다. 방송은 방송대로 새로운 판로를 찾기 위해 스마트 기기를 통한 유통에 관심을 들이고 있다. 이 바닥의 전통의 강자인 통신사는 인터넷의 DNA라 할 수 있는 네트워크 설계와 관련된 망 중립성 이슈로 인터넷 업체, 콘텐츠 제공자와 첨예한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양상은 다양하지만 모두 스마트 혁명의 그림자다. 적게는 산업 내에서 생존, 크게는 독점을 위해 활동하는 기업의 생리를 반영한다.</p>
<p>물론, 경쟁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 경쟁의 룰이 공정한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결혼은 성스러운 것이지만, 타인의 강제에 의해 이뤄지는 결혼이 행복할 것이라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p>
<p>인터넷 시장 전체로 보면 분명 인터넷이 도발적 성장을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개별 기업의 관점에서 보면 상황이 다르다. 인터넷 기업 중에도 물론 대형 기업도 있다. 그러나 통신사와 방송사는 전파의 희소성을 이유로 국가의 허가 산업으로 운영된다. 신문사, 영화사, 음반사는 초기에 많은 자본 투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모두 인터넷의 성격이 아니다. 인터넷을 인터넷답게,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보고로 만든 것은 누구에게도 허가 받을 필요 없는 경쟁 시장과 그리고 자기 집 창고에서도 창업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진입 비용이다.</p>
<p>따라서 인터넷과 경쟁하는 다른 산업들은 잘 알고 있다. 그 인터넷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인터넷의 혁신을 자신들의 허락 아래 이뤄지게 하거나 아니면 그 혁신 자체를 하기 어렵게 하면 된다는 것을 말이다.</p>
<p>할리우드의 인터넷과 전쟁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그들은 1998년 소위 미키마우스 악법이라 불리는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를 통과시켜 저작권 보호 시효를 획기적으로 늘렸고, 최근에는 미국 상원에는 지재권 보호법안(Protect IP), 하원에는 온라인 해적 행위 금지법안(SOPA)를 내놓고 열렬한 로비 중이다.</p>
<p>이 법안이 통과되게 되면, 면책 조항이 삭제되어 인터넷 업체들의 콘텐츠 관리 비용은 증가한다. 나아가, 디지털 콘텐츠 보호를 명목으로 우회 접근 기술의 개발이 제한된다. 이들 기술은 아랍의 자스민 혁명에서 정부의 검열과 감시를 피하기 위한 필수적 기술이었다. 인터넷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언론인이자 학자인 레베카 멕키농이 지적한 것처럼, 정보 자유화를 명목으로 중국과 중동 등 권위주의 국가를 압박하던 미국이 그들의 전철을 밟는 꼴이다.</p>
<p>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정부의 중립적 균형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가 장기적 사회의 발전과 단기적 산업의 이익 간에 균형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인터넷은 시장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규제에 의해서 독점에 의해서 그 원동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지난 2011년 동안 정부가 써온 스마트 생태계, 상생, 모두 그 말은 거룩하지만 공맹의 도를 따르면 외적이 침입해도 국가가 평안할 것이란 말과 같이 실체가 없다.</p>
<p>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는 정의란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라 했다.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은 안 되고, 힘으로 사랑을 얻는 것도 안 된다.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정부가 공정 사회를 추구하며, 그 기조를 인터넷에도 적용하고자 한다면 다음을 제안한다. 2011년을 돌아보고 2012년을 맞이하는 가운데 사회 변화의 한 축이 되어 가고 있는 인터넷을 창조와 혁신의 생태계로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인터넷의 것은 인터넷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허가 없이’ 개방돼 있는, 그리고 ‘저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을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다.</p>
<p>지적 재산은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 자원은 공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같은 바탕 하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존의 법과 규제의 틀을 넓혀주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제한은 투명하고 일관된 원칙과 분명하게 공유된 가치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p>
<p>같은 맥락에서 시민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처럼 인터넷과 관련된 문제를 고민하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힘들고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싶을 수 있다. 개인과 시민이 다른 점은 개인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지만, 시민은 공공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며 공동체를 지키고 발전시킨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예방접종을 하지 않으면 위험한 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 때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관찰하고 그것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과는 다른 인터넷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들의 인터넷은 창조와 혁신의 생태계라기 보단 통제와 억압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일 수 있다.</p>
<p>문화적 관점에서 이용자가 디지털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는 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한 미국 남가주대학 애넌버그 대학원의 헨리 젠킨스 교수가 말한 것처럼, 기술적인 문제에만 집중한다면 시민적 디지털 문화를 만드는 싸움은 이미 지고 만 것이다. 우리가 그 같은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 지 결정하는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인 규약들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개선할 때 바람직한 미래가 다가올 수 있다.</p>
<p><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1/12/stop_sopa.jpg" rel="lightbox[89905]" title="stop_sopa"><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89930" title="stop_sopa" src="http://www.bloter.net/files/2011/12/stop_sopa.jpg" alt="" width="500" height="547" /></a></p>
<p style="text-align: center">▲사진 : <a href="http://www.flickr.com/photos/notbrucelee/6527247253/" target="_blank">justgrimes</a>. CC <a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2.0/deed.ko" target="_blank">BY-SA</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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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 인터넷 규제의 성실함에 관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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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6 Dec 2011 04:27:17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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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SNS 검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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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한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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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사랑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정책이 근거가 빈약한 것은 위험하다. 잘못하면 애매한 기준으로, 애매하지 않은 개인의 정당한 권리가 국가 권력에 의해 침해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심의위’)가 SNS, 앱 심의 전담조직 신설을 강행했다가 일으킨 논란이 그 명백한 예다. 누구의 트윗을 누구의 기준으로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문제되는 SNS를 규제한다는 말은 간단하지만 이렇게 그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사랑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정책이 근거가 빈약한 것은 위험하다. 잘못하면 애매한 기준으로, 애매하지 않은 개인의 정당한 권리가 국가 권력에 의해 침해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심의위’)가 SNS, 앱 심의 전담조직 신설을 강행했다가 일으킨 논란이 그 명백한 예다. 누구의 트윗을 누구의 기준으로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문제되는 SNS를 규제한다는 말은 간단하지만 이렇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단순하지 않다.</p>
<p>그러나 여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같은 부실한 규제의 성실함이다. 불법적 개인정보 공개의 근원으로 지적되어 온 인터넷 실명제(정식 명칭은 ‘제한적 본인확인제’), 국내 게임산업에 대한 역차별 문제와 청소년 인권 침해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게임 셧다운제, 그리고 위에 소개한 최근의 SNS 검열 시도까지 한국 정부의 일관된 원칙 아닌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편향된 근거와 무리한 규제다. 그렇다면 이 같은 문제의 시발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p>
<p>그 뿌리를 찾기 위해 잠시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버드 로스쿨의 조나단 지트레인 교수와 존 폴프리 교수가 2011년 12월에 &#8216;사이언스&#8217;에 &#8216;더 나은 인터넷을 위한 더 나은 데이터&#8217;(Better Data for a Better Internet)란 논문을 기고하면서,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통신 수단인 인터넷이 지속적으로 정부와 상업 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논문 제목에서 보듯, 그들이 통렬히 지적한 것은 브로드밴드 관련 정책은 통신사 자료에, 청소년 개인정보 보호 관련 법안은 인터넷 콘텐츠의 청소년 유해성을 주장하는 단체의 자료에 근거하는 인터넷 정책 결정의 편향성이다. 단적으로, 2011년 12월 5일 &#8216;하버드 크림슨&#8217;과 한 인터뷰에서 폴프리 교수는 현재 인터넷 정책은 너무나 부족한 데이터에 근거하고 있다고, 지트레인 교수는 사람들은 인터넷 정책을 자신의 이념적 신념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p>
<p>재미있는 것은 이들 교수들의 주장이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어만 바꿔놓으면 더 절실하게 한국 이야기다. 익명으로 타인을 함부로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실명제를 해야 하고, 게임으로 중독 되는 아이들이 있으니 셧다운을 해야 하고, SNS 여론이 문제가 되니 검열을 한다는 논리는 첫째 그 지적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입장만 대변해 왔다. 둘째, 그 규제를 실시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그 같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피해의 원인 제공과는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어떤 다른 피해를 입을 지에 대한 고민은 고려되지 않았다.</p>
<p>이 같은 인터넷 실명제, 게임 셧다운제, 그리고 SNS 검열이 조금 식상하다면, 정부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선한 예도 있다. 지난 2011년 12월14일 경실련과 진보넷은 방통위의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이 이통사의 합리적 망관리 명목으로 마이피플과 같은 mVoIP를 차단할 수도 있다면서 의견서를 제출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자료 편향’의 논리에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제점이 불거진 것은 놀랍지 않다. 망 중립성 정책 결정의 상당 부분이 통신사의 자료에 의존하고 있고, 특별히 망 관리 항목이 그러하다면, 관련 정책이 왜곡될 여지는 충분하다.</p>
<p>결론적으로 이 같은 부실한 규제의 성실함은 정보통신부 이래 우리 정부가 내세운 IT 강국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담당자들이 인터넷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지만 더 뿌리 깊은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경제 발전의 수준이 높고 민주주의가 보장돼 있어도 실질적으로 국민이 자기 권리 행사를 할 수 없는 나라는 개인에게 있어서 좋은 나라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IT 인프라를 구축하고 우수한 콘텐츠가 보급돼 있어도 실질적으로 국민이 그것을 안전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쪽뿐인 IT 강국이다. 진정한 IT 강국은 산업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관련된 국민의 기본권 보호도 강해지는 것이다.</p>
<p>그리고 사실 그것이 역으로, 진정으로 IT 산업이 강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IT는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우리도 스티브 잡스와 마크 쥬커버그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해법은 지금껏 보여온 성실함을 다른 방향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편향되지 않은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자료에 의거해 정책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산업의 발전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실시하면 된다. 그와 같은 인터넷 정책의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이 뿌리를 내릴 때, IT가 강할 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한 대한민국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개혁은 더욱 가치가 있다.</p>
<p><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1/12/keyboard_work.jpg" rel="lightbox[88039]" title="keyboard_work"><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86164" title="keyboard_work" src="http://www.bloter.net/files/2011/12/keyboard_work.jpg" alt="" width="500" height="333"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a href="http://www.flickr.com/photos/winstonavich/189032152" target="_blank">http://www.flickr.com/photos/winstonavich/189032152</a>. CC BY.</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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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종대왕, FTA 괴담 그리고 접근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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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2 Nov 2011 06:10:14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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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괴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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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뿌리깊은 나무’가 화제다. 가장 큰 인기 요인 중 하나는 아버지의 패도정치를 넘어 왕도정치를 펼치고자 고뇌하는, 대왕이기 이전의 인간 이도로서 세종의 모습을 부각시킨 한석규의 호연이다. 여기에 조선 건국의 실질적 아버지인 삼봉 정도전의 재상 중심 국가 제도를 지지하는 가공의 결사 조직 밀본과 ‘훈민정음 창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종의 정치적 개혁이 맞부딪치는 장면이 매회 대두되며 드라마의 시청률은 고공행진 중이다.
물론,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뿌리깊은 나무’가 화제다. 가장 큰 인기 요인 중 하나는 아버지의 패도정치를 넘어 왕도정치를 펼치고자 고뇌하는, 대왕이기 이전의 인간 이도로서 세종의 모습을 부각시킨 한석규의 호연이다. 여기에 조선 건국의 실질적 아버지인 삼봉 정도전의 재상 중심 국가 제도를 지지하는 가공의 결사 조직 밀본과 ‘훈민정음 창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종의 정치적 개혁이 맞부딪치는 장면이 매회 대두되며 드라마의 시청률은 고공행진 중이다.</p>
<p>물론, 이처럼 극적인 요소들로만 인해서 드라마 인기가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요인도 있다. 돌아온 세종의 뿌리 깊은 인기는 세종의 고담준론에 그치지 않고 민생의 발전을 위해 언행일치로 헌신하는 모습이 각종 국정 현안을 두고 기능을 상실한 대한민국 의회 정치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건국초 대국인 명의 지지가 필요한 줄 알면서도 백성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정치적 모험까지 감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우리도 위대한 지도자를 가졌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p>
<p>그러나 우리가 세종에게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표면적 카리스마만이 아니다. 과거를 살려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감동을 넘어서 그의 철학, 내적인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비록 시민이 다스린다는 &#8216;민치&#8217;의 개념은 없었으나, 세종은 권력의 근본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8216;민본&#8217;은 잘 이해했다. 백성의 삶이 나아지고 백성이 현명해야 나라가 부강해질 뿐 아니라, 덕과 질서가 바로 잡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그가 핵심적으로 추진했던 사업 중 하나가 바로 훈민정음이다. 국민의 ‘보편적’ 앎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문자인 한글을 만드는 것,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p>
<p>그렇다면 깨달은 바의 현실적 적용점을 찾기 위해 다음 질문을 생각해보자. 이 성군이 보았다면 21세기의 한국은 어떻게 비칠까. 예를 들어 FTA 괴담론, 한미 FTA에 관련된 공공요금, 의료비용 등에 관한 사항이 본래 협정문에서 결정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SNS를 통해 왜곡되어 전달되고 확대되고 있다는 설은 어떻게 평가될까.</p>
<p>이 같은 소위 트위터 여론의 문제에 대해 세종은 먼저 그들이 왜 그와 같은 의견을 분출하는지,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평소 매사 백성의 입장에 서서 사물의 이치를 따지고자 하는 성품을 생각할 때, 이 같은 사유의 궤적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는 흔히 괴담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역설하는 것처럼 그는 국민들이 ‘감성적이다’라는 것을 ‘비이성적이다’라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적이라 판정한다 할지라도, 그처럼 감성적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려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세종은 평균적인 국민의 이해력과 관련 문서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을 감안할 때, 정부에서 공개한 FTA 협정문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수고를 할 사람이 국민 중 과연 몇 %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을 것이다.</p>
<p>이것은 세종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현정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네르바를 구금하고 SNS를 심의한다고 해서 공론이 정상화되는 것은 아니란 것을 뜻한다. 괴담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에도, 그것은 순전히 국민들이 감성적이어서 괴담이 확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너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난해하고 방대한 자료를 손수 찾고, 보고, 알기엔 그들의 삶이 너무 고단하고 분주하기 때문이다.</p>
<p>달리 말하면, FTA 괴담 논의에서 과연 FTA 괴담인 존재하느냐, 거기에 SNS가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느냐만 핵심은 아니다. 그 같은 2차 정보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원자료가 얼마나 친절한지, 불친절한지가 중요하다. 만약 그 자료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은 해독 불가능한 암호문에 가깝다면 그들은 그 원자료의 정당한 해석이라 주장하는 각종 정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정보들이 편향되어 있다면 여론은 엄정한 사실을 떠나 산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p>
<p>정부 부처 중에 홈페이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한 발 더 나아가 SNS, 블로그 기자단까지 운영하는 곳도 많다. 소통의 시도는 좋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정부 홈페이지가 장관 인사와 그의 일정을 공시하기 위한 공간만은 아니란 점이다. 국민이 필요한 정보를 한 번에, 한 눈에, 쉽게 알기 위한 곳이 되어야지, 그런 의지를 처음부터 꺾는 곳이 되어선 안 된다. 공개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종이 한자가 어려운 국민들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것처럼, 무지하고 무력한 사람도 쉽게 국가 정보를 알고 현명하고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정보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p>
<p>‘정보 접근성’이라는 첫 단추부터 이제 제대로 달도록 해야 한다.</p>
<p><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1/11/bburi.jpg" rel="lightbox[84583]" title="bburi"><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84799" title="bburi" src="http://www.bloter.net/files/2011/11/bburi.jpg" alt="" width="500" height="331"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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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NS 차단법 논란 유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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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1 Nov 2011 01:12:11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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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SNS]]></category>
		<category><![CDATA[SNS 차단법]]></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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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지난 11월 9일 한나라당 장제원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소위 &#8216;SNS 차단법&#8217;)이 세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 의원의 개정안 내용이 온라인 시민 언론 차단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전기통신사업법 40조2 제3항 개정안에 기간통신망 사업자가 인터넷 접속 역무를 합리적 통신망 관리라는 명목으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합리적 통신망 관리의 근거로 포함된 &#8216;불법적인 통신&#8217;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rel="attachment wp-att-64150" href="http://www.bloter.net/archives/64147/164054-twitter_bird_follow_thumb_original"><img class="alignleft size-full wp-image-64150" style="border: 1px solid black;margin: 5px" title="164054-twitter_bird_follow_thumb_original"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6/164054-twitter_bird_follow_thumb_original.jpg" alt="" width="180" height="119" /></a>지난 11월 9일 한나라당 장제원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소위 &#8216;SNS 차단법&#8217;)이 세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 의원의 개정안 내용이 온라인 시민 언론 차단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전기통신사업법 40조2 제3항 개정안에 기간통신망 사업자가 인터넷 접속 역무를 합리적 통신망 관리라는 명목으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합리적 통신망 관리의 근거로 포함된 &#8216;불법적인 통신&#8217;이 자의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바, SNS 차단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정안에 40조2 제4항에 인터넷 접속 역무를 차단할 경우, 대통령령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방통위와 한나라당의 꼼수가 있다는 것이다.</p>
<p>이에 대해 현재 장제원 의원측에서는 본래 법안 발의의 취지는 거대 상업 자본으로부터 인터넷의 공공성을 보호하자는 망 중립성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었다면서, 해당 발의를 가장 먼저 보도한 경향신문의 기사를 악의적 보도로 주장하고 나아가 공동 발의한 의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법안 철회를 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SNS 서비스를 통해 수많은 문제제기가 있자 한발을빼는 모양세를 취했다. 원래 취지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p>
<p>논란이 일단락되는 듯 한 양상이지만 이제 흥분을 좀 가라 앉히고 냉정히 좀 따져보자.</p>
<p>먼저 분명한 것은 양측 다 과실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장의원측의 과실을 따져보면, 순수한 법안 발의의 의견이 어쨌든 그 같은 의도를 시민들이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한나라당이 지난 서울 시장 보궐 선거에서 젊은층 의견 수렴과 SNS 소통에 실패해 대패한 바, 시민들은 여당이 SNS를 통한 반대 여론 저지를 위해 자유로운 통신망 이용을 제한하는 규제 법안을 마련할 동기가 있다고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장의원 주장대로 발의의 본래 뜻이 통신망의 공공적 이용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법안을 발의하기 이전에 이 같은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 있는 시민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은 후에 발언하는 태도가 바람직했다.</p>
<p>그러나 개정안에 대해서 SNS차단의 혐의만을 문제 삼는 반대 여론도 문제다. 압축하면 &#8220;한나라당은 나쁘다. 그래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악법이다&#8221;라는 논리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인, 정부의 규제에 따라 인터넷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실질적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표현의 자유는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을 제한하는 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에 아무 규제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니다. 비록 장 의원의 발의는 과정도 내용도 일부 문제가 있었지만, 망 중립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공론을 해볼 필요가 있고, 입법할 필요도 있다.</p>
<p>이상적으로는 반대 여론이 말하는 바가 옳다는 점을 인정한다. 원칙적으로는 반대 여론이 말하는 대로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 논리에 따라 시민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말하게 하고, 사업자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을 하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상적이다. 그 같은 자연 상태가 반드시 합리적으로 긍정적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손을 떼는 순간 그 때는 권위주의적 정부가 아니라 거대 상업 자본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있다.</p>
<p>국가 기간 통신망을 쥐고 있는 KT, SKT, LG 유플러스와 같은 소수의 통신사 같은 경우 이전의 무료 모바일 메신저인 카카오톡의 일시 차단 시도 사례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기존 수익모델과 시장 지배력을 지키기 위해 시민의 공공 자산인 국가의 통신 인프라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이용할 권리를 차단할 동기가 있다. 스마트폰 이전의 피쳐폰 시대에 통신사가 사업자별로 전용단말기 유통을 독점해 콘텐츠 시장까지 그 독점력을 전이한 역사도 있다.</p>
<p>그러므로 그들의 인터넷 시장 천하 통일 야욕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모든 기업의 로망이 독점기업이고, 그것이 점점 더 상업화되고, 중앙 집권화되는 미디어의 역사라면, 국가가 그들을 견제하고, 그 견제를 위해 규제해야 할 이유는 있다. 따라서 SNS 차단법에 반대하며 내세웠어야 할 논리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정부의 억압과 시민의 통제로부터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규제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것이 어떤 규제인 지를 따지는 것이다.</p>
<p>더욱이, 이 같은 SNS 차단법 논란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전기통신사업법 시행규칙 제3조에 의하면 전신, 전화, 인터넷 접속, 주파수 할당, 전기통신회선설비임대 일체가, 심지어 같은 법 제16조에 따르면 최근 논란이 되었던 무료 통화 앱 같은 경우도 기간통신역무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기간통신역무는 전화, 우편과 같은 공공적 성격을 가지는 서비스를 가리킨다.</p>
<p>미국에서는 통신 사업자가 이 같은 기간 통신 사업자와 정보 서비스 사업자로 나뉘어 있어 망 중립성과 유사한 망 개방성 원칙 실행과 관련된 &#8216;브랜드 X&#8217;(Brand X)의 소송이 2005년 대법원 판결로 불발로 그치고 만 바 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을 자유롭게 연결하고 사용하는 권리는 공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로, 법이 인정하는 권리로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반대 여론이 봐야 할 더 큰 꼼수가 있다면 그것은 이처럼 현행 법령에 기간통신사업자로, 망사용의 공공성을 보장할 책임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끓임 없이 ‘한국형 망 중립성’ 이라는 애매한 원칙의 뒤에 그 같은 기간통신역무는 숨기려는 3대 통신사다.</p>
<p>나아가, 망 사용 관련 규제의 책임이 있는 방송통신위는 SNS 차단법에 대해서도 그리고 통신사가 기간통신역무의 책임을 져버리는 데에 대해서도 동조의 꼼수가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려면 한국형 망 중립성 원칙이 거대 자본의, 거대 자본에 의한, 거대 자본을 위한 원칙이 아니라 인터넷의 미래가 모두에게 열린 미래일 수 있도록 하는 혁신과 창의,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평등을 고려한 원칙이 되도록 방향키를 잘 잡아야 한다. 방송통신위는 ICT가 국가 산업일 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과 맞닿아 있음을 기억하고, 산업을 넘어 사회의 미래를 보고 관련 정책을 짜야 한다.</p>
<p>그리고 여당과 야권도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말로만 존중하고 지킬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연의 책임인 입법으로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강행해서도 통과시키려 하는 FTA 협정문의 &#8216;제 15.7조 전자상거래를 위한 인터넷 접근 및 이용에 관한 원칙&#8217;은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의 오픈 인터넷을 위한 망 중립성 고시와 거의 유사한 내용이다.</p>
<p>여당이 그렇게 FTA 협정문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망 중립성 관련 법안에 눈을 돌릴 이유는 없다. 지적 받은 부분은 고치고, 시민과 소통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 다시 발의하면 된다. 야권도 무조건 비판을 공공 선이라 생각하지 말고, 국가의 규제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인터넷의 미래가 밝을지, 시민의 자유가 커질 수 있을 지를 장기적으로 고심해야 한다. 어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비판만으로는 반보 부족하다.</p>
<p>무엇이 원칙이고 기준이어야 할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제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지속적 실천이 필요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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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마트 세대의 정치 참여는 스마트한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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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2 Nov 2011 05:20:02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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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0.26 서울시장 보궐 선거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 중 하나는 박원순 후보를 서울 시장으로 만든 젊은층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별히 이번 선거의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믿어지는 SNS 사용에 있어서 젊은 세대들이 상대적으로 앞서 있는 세대이므로, 이 스마트폰과 SNS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 스마트 세대가 앞으로 한국 정치의 지향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10.26 서울시장 보궐 선거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 중 하나는 박원순 후보를 서울 시장으로 만든 젊은층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별히 이번 선거의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믿어지는 SNS 사용에 있어서 젊은 세대들이 상대적으로 앞서 있는 세대이므로, 이 스마트폰과 SNS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 스마트 세대가 앞으로 한국 정치의 지향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지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p>
<p>이와 관련된 일단 부정적인 시각은, 스마트 세대는 경험이 일천하고 시류에 따라 감정에 치우치기 쉬워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 미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 비판자들은 스마트 세대가 정치적 공론화를 위해 사용하는 소통 수단도 문제삼고 있다. 예를 들어 SNS 같은 경우 140자의 문자 제한이 있는 트위터에서 보듯이 단문으로 인해 이성적 대화가 오가기 어렵고, 네거티브한 뉴스가 정확한 사실 확인 없이 확산되는 등의 문제가 많다고 이들은 비판한다.</p>
<p>비판 대상인 스마트 세대는 새로운 정치적 집단이고, 그들의 정치적 참여의 수단도 새로운 기술이지만, 이 비판은 사실 많은 부분에서 고전적인 주장이다. 소크라테스는 시민의 선택에 의하여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철학의 대중에 의한 죽음을 목격한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정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이성으로 감정을 지배할 수 있는 덕을 갖춘 철학자로 한정시켰다. 대중의 욕망이 이끄는 정치에서 철학을 보호하고, 이데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다.</p>
<p>플라톤에게 있어 정치란 엘리트의 몫이며,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 엘리트가 이끄는 정치적 질서와 안정에 혼란과 분열만 가져올 뿐이다. 이 같은 플라톤의 시각과 위의 스마트 세대의 정치 참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는 경험이 풍부하고 이성이 숙련된 기성 세대의 영역이다. 이성이 감성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격정에 눈이 멀기 쉬운 스마트 세대들은 공공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서는 안 된다.</p>
<p>이것은 달리 말하면, 플라톤적인 입장이 전적으로 타당해야만 스마트 세대의 정치 참여에 대한 비판도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근대를 거치면서 정치에 대한 플라톤적인 시각은 많은 부분 교정을 거쳤다. 철학이 정치를 통제하는 플라톤의 관점과 달리, 현대 정치는 권력이 법을 만들고 법이 윤리를 만든다. 정치 참여 역시 참여자의 전문성뿐 아니라 평등의 가치가 대두됐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할 때,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 구성원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
<p>이렇게 개인의 참여를 인정하고, 그 참여를 통해 권력을 만들며, 그 권력이 법과 윤리의 근간을 정하는 이상, 현대 민주주의는 이성 외에 감성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나아가 최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소통과 교감이 중시되는 것에서 보듯이 그 같은 감성적 요소도 정당한 통치의 근거로 인정받는 추세다. 따라서 스마트 세대가 설사 기성 세대에 비해 감성적 측면이 많다고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근거로 제시되기에는 부족하다. 만약 스마트 세대의 소통에 민감하고 능동적인 부분이 그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이성의 빈약이나 경험의 결핍이라기보다는 활자보다는 멀티미디어에, 일방향보다는 쌍방향 의사 소통에 더 친숙하게 자라온 그들 세대의 성격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p>
<p>한 걸음 더 나아가, &#8216;이성적&#8217;이란 말 자체가 명확한 실체가 없는 추상의 언어라는 것도 지적된다. 이 말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정부 보고서나 주요 일간지 신문 사설은 읽지 않으면서 소설가와 연예인의 트위터를 팔로우하면서 그들이 하는 말은 신뢰하는 스마트 세대가 기성 세대가 보기에는 비이성적일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 세대가 보기에는 정부의 발언이라고, 주요 일간지의 논설위원이 쓴 글이라고 맹신하는 기성 세대가 오히려 더 비이성적일 수 있다. 이렇게 이들의 ‘이성적’이란 개념이 서로 다른 것은 추상의 사닥다리를 내려가면 그 이성을 정의하는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성 세대는 6.25 전쟁과 경제 발전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마트 세대는 멀게는 광주의 봄에서부터 가깝게는 IMF를 기억하고 있다. 같은 말은 서로 다른 경험의 프리즘에 의하여 다른 빛을 드러내고, 이 두 세대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말로는 가깝지만, 마음으로는 멀다.</p>
<p>물론, 스마트 세대의 정치 참여는 그들의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성격과 정치 참여의 방법이 비이성적이란 평가에 의해 제한되지 않지만, 그들의 정치 참여 자체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권리 행사에는 책임이 수반된다. ‘나는 꼼수다’를 들으며 각하의 실정에 대해 공감하고, 새로운 정치 세력의 창출을 위해 투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일보 부족하다. 시대정신과 역사의 심판이라는, 또 하나의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는 언어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의 정당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지금의 스마트 세대 역시 멀지 않은 미래에 지금의 기성 세대를 대체하고, 또 다른 기성 세대가 될 것이다. 그 때 새로운 물결이 되어 밀려오는 세대에게 현실을 개선할 아무런 개혁의 밑그림도 남기지 않은 채 공허한 목소리만 높이다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자신이 무엇을, 왜 비판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개선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집단과도 공론하여 입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p>
<p>플라톤의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은 근대에 들어와서 비판적으로 재고됐다. 그러나 “너 자신을 알라”라며, 아테네 시민에게 “검증받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권고했던 소크라테스적인 삶의 태도는 서양 철학의 근간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성찰하는 시민 정신의 뿌리로 남아 있다. 스마트 세대는 새로운 정치적 집단이고 그들의 정치 참여의 수단도 새롭지만,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꽃이 바뀌었을 뿐 뿌리가 바뀐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범적 덕목은 바뀌지 않았다. 성찰하지 않으면 진보할 수 없다는 진리는 그들에게도 영원하다.</p>
<p>조지 오웰의 비판적 정치 철학을 계승한 영국의 정치이론가 버나드 크릭은 그의 역저 ‘정치의 변명’에서 “정치란 윤리를 공적인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같은 공공의 영역에서 어떤 판단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실천하는 행동을 경직된 이념이나 결정적인 기술에 종속시키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스마트 세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정치 참여가 정말 스마트하려면,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의 근원이 되려면, 이제 그들만큼은 비판에 그치지 않고, 변화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되고자 하는 태도를 갖춰야 할 것이다.</p>
<p><a rel="attachment wp-att-81938" href="http://www.bloter.net/archives/81910/wonsoon_youth"><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81938" title="wonsoon_youth" src="http://www.bloter.net/files/2011/11/wonsoon_youth.jpg" alt="" width="500" height="333"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a href="http://wonsoon.com" target="_blank">원순닷컴</a>)</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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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26 교훈, 소통의 힘이 정치를 바꾼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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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31 Oct 2011 06:22:37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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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지난 10월 26일 박원순 후보의 압도적 승리로 서울시장 선거가 끝났다. 그 후, 이 선거 결과에 SNS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분석과 논의가 분분하다. 대다수가 SNS의 파급 효과가 젊은 이들 사이에 컸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SNS가 과연 얼마만큼, 어떻게 선거 결과에 기여했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이 의문스럽다. 선거 관련 트윗이 20만건 이상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난 10월 26일 박원순 후보의 압도적 승리로 서울시장 선거가 끝났다. 그 후, 이 선거 결과에 SNS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분석과 논의가 분분하다. 대다수가 SNS의 파급 효과가 젊은 이들 사이에 컸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SNS가 과연 얼마만큼, 어떻게 선거 결과에 기여했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p>
<p>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이 의문스럽다. 선거 관련 트윗이 20만건 이상 오갔기 때문에 20·30·40대들이 투표장에 간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 현정권과 집권 여당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투표장에 간 것인지 그 인과 관계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원인인 것인지도 따지기 어렵다.</p>
<p>이러한 현상의 구조적 특징을 파악하려면 나무에서 잠시 떨어져서 숲 전체를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분명한 것은, 시민의 분노는 성실하게 쌓여 왔다는 점이다. 현정부 초기부터 쇠고기 사태, 촛불시위 진압, 미네르바 구속, 4대강 사업과 G20의 무리한 진행을 거치면서 시민의 스트레스는 상승해 왔다. 그 점에서 볼 때 젊은층 박원순 몰표의 직접적 원인은 역설적으로 현정부에 있다. 구조적으로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현정부의 소통 구조 탓에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소통 구조를 가진 트위터 등의 SNS가 시민들에게, 특별히 열린 소통에 대한 열망이 더 큰 젊은층에서 각광을 받은 것이다.</p>
<p>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소통의 구조 차이가 서울시장 선거에 미친 영향은 대한민국의 사회 변화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SNS를 넘어서 인터넷 혁명이라는 소통의 혁명이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여러 변화들의 구조적 배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p>
<p>예를 들어 인터넷 성장의 역사 자체가 오늘의 변화의 기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려준다. 인터넷은 원칙적으로는 누구의 소유도, 누구에게 통제받지도 않는 소통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누구든 자기의 필요와 선호에 따라 그 망 자원을 사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다.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인터넷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보인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이렇게 소통의 구조를 만들어 놓으면, 권력 구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질서는 없을 것이고, 이윤 구조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재화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p>
<p>그러나 인터넷은 이 모든 회의를 혁파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자율적 규제라는 나름의 질서를 발전시켜왔고, 상호 인정이라는 사회적 동기와 이용자의 자발적 협업이라는 기제를 통해서 리눅스, 위키피디아 등을 비롯한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보여왔다. 점점 더 중앙집권화되고 상업화되어 가는 시장 사회에 시민이, 개인이 이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왔다.</p>
<p>나아가 인터넷 혁명은 이제 온라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인터넷이 보여준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분산적인 소통은 새로운 사회적 변화가 탄생하는 기반이 됐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같은 새로운 서비스뿐만 아니라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와 같은 새로운 정치 권력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시대는 변화하고 있다. 뒤처지고 있는 것은 정치다.</p>
<p>기성 정치권에서도 나날이 떨어지는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SNS 전력을 강화하겠다는 발표가 잇따른다. 정치권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쇄신의 목소리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개혁과 쇄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입장에 서고,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려는 근본적 변화 없이는 모두 일패도지다. 생색내기 SNS 홍보는 역효과만 낸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들이 소통에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지를 드러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변화는 국민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이 국민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p>
<p>인터넷 혁명의 교훈은 이 소통의 힘 앞에 이제 정치도 예외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center"><a rel="attachment wp-att-81640" href="http://www.bloter.net/archives/81565/wonsoon"><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81640" title="wonsoon" src="http://www.bloter.net/files/2011/10/wonsoon.jpg" alt="" width="500" height="346" /></a></p>
<p style="text-align: center"><a rel="attachment wp-att-81640" href="http://www.bloter.net/archives/81565/wonsoon"></a><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a href="http://www.wonsoon.com/" target="_blank">원순닷컴</a>)</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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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통부 부활론 유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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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3 Aug 2011 02:09:49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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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진나라 말, 천하의 패자의 자리를 두고 승부를 겨루었던 항우와 유방,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8216;초한지&#8217;는 &#8216;삼국지&#8217;와 함께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항우는 명가의 후손으로 무거운 솥을 혼자 들 수 있을 만큼 괴력과 패기가 있었다. 반대로 유방은 상대적으로 혼미한 가문에 벼슬도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기 수하의 재능을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진나라 말, 천하의 패자의 자리를 두고 승부를 겨루었던 항우와 유방,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8216;초한지&#8217;는 &#8216;삼국지&#8217;와 함께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항우는 명가의 후손으로 무거운 솥을 혼자 들 수 있을 만큼 괴력과 패기가 있었다. 반대로 유방은 상대적으로 혼미한 가문에 벼슬도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기 수하의 재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유방은 벽지에 몰렸지만 사람들이 몰려 왔기 때문에 힘을 키울 수 있었다. 반대로 항우는 자신만 내세우다 보니 백성과 신하에게 모두 신망을 잃었다. 이 대조적인 두 인물의 싸움의 결과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로 남아 있다. 항우의 비참한 최후다.</p>
<p>역설이다. 결과적으로 항우의 재주가 유방보다 비상했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그 능력을 수용한다는 새로운 영역의 재능을 키울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항우는 더 많이 가지고도 다 잃었다.</p>
<p>한국 IT도 마찬가지다. 하드웨어면 모를까, 소프트웨어나 콘텐츠 영역에서 우리가 글로벌 강국인 적은 없다. 그래서 2011년 8월15일 구글이 모토로라를 125억달러에 인수한 이후 이건희 삼성 회장이 강조한 IT 권력 이동론이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던 미래가 더 명백한 현실로 다가왔을 뿐이고 재벌 총수의 입으로 발표됐을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정부는 또 다시 &#8216;전가의 보도&#8217;를 빼들었다. 2011년 8월22일 지식경제부는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대표 제조사와 함께 &#8216;한국판 안드로이드&#8217;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잃어버린 적도 없는 IT 강국 대한민국의 위치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부가 주도해 대기업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것이다.</p>
<p>무리다. 소프트웨어 시장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는 시장이다. 빠르고, 많은 실패를 지속적으로 감수해야 할 시장에 정부의 계획과 대기업의 투자가 중추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흔히 싸이월드와 페이스북의 성공이 비교가 된다. 왜 싸이월드가 국내에서 주춤하고 있을 때 페이스북은 전세계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페이스북 혼자만 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생태계다. 페이스북은 거의 3세대 소셜 네트워크에 가깝다. 1세대로 프렌드스터가, 2세대로 마이스페이스가 있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으로 소셜 네트워크 혁명이 그치지도 않았다. 그 뒤를 이어 포스퀘어 등 새로운 온·오프라인을 융합한 관계망의 형성이 확장되고 있다. 나아가 그 같은 소셜 플랫폼을 바탕한 게임 등 새로운 서비스도 거침없이 등장하고 있다.</p>
<p>한 기업의 성공 사례만으론 현재의 난국을 돌파할 답이 보이지 않는다. 전체 시장의 역동성을 볼 필요가 있다. 빠르고, 많은 실패를 지속적으로 감수할 수 있는 생태계가 나와야 한다. 그 불확실성은 정부가 계획하기에는 변수가 많다. 그 신속성은 대기업 투자로 경쟁하기엔 너무 더디다. 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번 한국판 안드로이드 제작안을 2005년 국산 모바일 무선 인터넷 플랫폼 &#8216;위피&#8217;(WIPI) 사례와 비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같은 더 값싸고, 더 빠른, 그리고 더 많은 실패를 지속적으로 감수할 수 있는 생태계 없이 운영체제(OS) 하나만 보고 달려드는 시도는 가뜩이나 뒤처진 한국의 소프트웨어, 콘텐츠 생태계를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안드로메다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p>
<p>그 와중에 다시 2008년 아이폰 쇼크 때의 악몽처럼 우리 하드웨어 경쟁력마저 한층 더 실추될 수 있다. 이것은 항우와 유방의 사례에서처럼 역설적으로 우리 정부와 대기업의 역할이 하드웨어에서는 상대적으로 훌륭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부가 지원하고 대기업이 투자해서 공급 논리 위주로 새로운 시장을 짜나가는 것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성공에 눈이 가려져 우리는 다른 영역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p>
<p>같은 입장에서 일부에서 제기되는 정부 지원론의 결정체인 정보통신부 부활론에 대해 유감이다. 컨트롤 타워가 부재해 우리 IT 경쟁력이 뒤처졌다는 논리는 첫째 한국 IT의 소프트웨어, 콘텐츠의 고질적 경쟁력이 왜 부족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원인 설명(벤처 투자 생태계, 소프트웨어의 합법적 이용 실태, 개발자의 개발 환경 등)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 둘째, 앞서 강조했던 저비용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생태계를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도 약화시킨다. 그 논리에 따르면 정보통신부가 부활하면 모두가 구원을 얻는다. 정부가 더 강력히 지원하면 대한민국 정부의 힘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처럼 애플도, 구글도,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만들 수 있다.</p>
<p>그렇다고 정부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정부에게 주어진 역할은 &#8216;계획&#8217;보다는 &#8216;규제&#8217;라는 것이다. 시장의 진화를 달성하는 몫이 정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민간 주도 창의성의 전제인 완전경쟁시장은 많은 경우 교과서에서나 존재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카카오톡과 통신사간의 신경전의 핵심은 일반적 기능은 망이, 특정한 애플리케이션 기능은 최상층의 호스트가 맡도록 분할한 망 중립성에 관한 것이었다. 정부가 과점 기업 역할을 제한해 지속적으로 시장이 경쟁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8216;경쟁을 위한 규제&#8217;를 해야 할 책임은 여전하다.</p>
<p>정부는 이제 조타수의 자리에서 내려와 심판의 자리에 서야 한다. 그 점에서 이번에는 정부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항우가 아니라 유방을 모델로 삼아야 했다. 이제 하드웨어 성공 기억은 잊고, 정부 주도의 신화도 잊자. 자신의 능력만 과신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자와 이용자 등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과 협력 관계를 맺자. 소프트웨어의 미래는 소프트웨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개발자가 돕고, 이용자가 써야 한다. 새로운 혁신의 파도를 만들 수 있는 그림, 한 번 더 실패하는 용기에 더 많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산업과 사회의 생태계가 지금 필요하다.</p>
<p><a rel="attachment wp-att-72834" href="http://www.bloter.net/archives/72799/shw_m210s"><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72834" title="shw_m210s"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8/shw_m210s.jpg" alt="" width="500" height="350"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바다OS 기반 삼성 &#8216;웨이브2&#8242;(SCH-M210S). 사진 : <a href="http://kr.samsungmobile.com/product/anycall/product/overview.do?pdModel=SHW-M210S&amp;pdGroup=100001" target="_blank">삼성모바일닷컴</a></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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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터넷 시대의 사회적 상상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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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8 Aug 2011 05:37:30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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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깊은 감동을 받았다. 던칸 와츠의 &#8216;상식의 배반&#8217;(Everything Is Obvious)을 읽고 든 생각이다. 그 이유는 첫째, 의외였기 때문이다. 저자 던칸 와츠는 물리학 학사, 코넬대 공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본래 콜럼비아대 사회학 교수로 있다가 야후의 수석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혁신적 사회학자다. 그러나 그가 복잡성의 시대에 사회과학의 역할과 비전에 대해 이 정도로 깊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줄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깊은 감동을 받았다. 던칸 와츠의 &#8216;상식의 배반&#8217;(Everything Is Obvious)을 읽고 든 생각이다. 그 이유는 첫째, 의외였기 때문이다. 저자 던칸 와츠는 물리학 학사, 코넬대 공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본래 콜럼비아대 사회학 교수로 있다가 야후의 수석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혁신적 사회학자다. 그러나 그가 복잡성의 시대에 사회과학의 역할과 비전에 대해 이 정도로 깊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p>
<p>좀 더 깊은 감동의 원인은 보다 개인적인 것이다. 그 &#8216;의외&#8217;라고 생각한 사실 자체가 나의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자연계 배경만 가지고 그의 사회과학에 대한 이해를 가늠하는 오류를 보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나의 무지를 넘는다. 그것은 그 무지의 뿌리인 &#8216;상식&#8217;이라는 이름의 교만이다.</p>
<p>같은 맥락에서 책의 수많은 예화 중 모나리자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모나리자가 서양 예술을 집약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모나리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당대에는 최고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빼어난 작품이고 훌륭한 화가였다. 그러나 서양 미술의 집대성 정도는 아니었다. 이 지위가 바뀌게 된 데에는 한 애국심 넘치는 이탈리아 도둑의 범행의 공이 컸다. 그에게 도난당한 모나리자는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국에서, 전세계에서 전폭적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p>
<p>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나리자 인기의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사회 현상에 대해 사고하는 법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나 다 빈치가 지금 그토록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가 훌륭한 작품이고 다 빈치가 위대한 작가이기 때문일까. 모나리자가 훌륭하고 다 빈치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러한 설명 자체가 가진 자기 예언적 속성에 현혹되는 것이다. 그것은 “A가 A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A이다”라고 말하는 순환논리다.</p>
<p>그렇다면 그 같은 상식의 이면에 존재하는 오류를 벗어나서 엄밀하고 검증된 사고를 전개하려면 우리는 어떠한 전환이 필요할까. 이 책은 그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책은 사회학이 무엇이냐,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의 답도 함께 찾아나간다.</p>
<p>사회학은 저자의 본래 학부 전공인 물리학 혁명에 영향을 받아 발흥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던 것처럼, 사회학의 아버지인 콩트, 뒤르켐은 사회현상을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증적 이론을 개발하고자 했다. 뉴턴의 우주는 개성 없는 원자들의 물리적 반응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속에서 일반적 공식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는 다르다. 개개인의 자유 의지와 개인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은 선형적 논리에 의한 설명과 예측의 설득력을 무력화시켰다. 자연과학에서처럼 하나의 개인을 중심으로 어떤 결과를 설명하고자 하면 그 개인이 사회적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을 배제하게 된다.</p>
<p>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성공 신화를 이끌었을까. 사회학의 대답은 그 상식적인 질문에 대해 &#8216;아니다&#8217;라고 말한다. 우리의 상식은 애플이 성공했기 때문에 잡스를 위대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희대의 CEO인 스티브 잡스에게 특별한 점은 있다. 그러나 애플이 만약 오늘날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잡스의 동일한 리더십이 또 다른 실패의 요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나아가 잡스 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질 말고도 당시의 시장 상황 등 외부 요인의 영향이 있었음을 배제하기도 어렵다. 즉, 똑같은 스티브 잡스라도 그 때 그 상황에서가 아니면 성공을 담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음을, 역사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이야기’에 가까움을 사회학은 주목한다.</p>
<p>상식의 배반이 우리에게 절망을 주지는 않는다. 물론, 인간의 심리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고 인간의 상호 작용은 아직도 복잡성의 우주다. 그러나 먼저 이 같은 무지를 깨닫는 것도 하나의 진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 뿐 아니라 모르는 것을 깨닫는 것도 지식이다. 동시에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사회학적 실험을 진행하기 위한 비용을 혁명적으로 낮춰 놓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인터넷은 디지털 정보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회 현상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을 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e메일부터 월드와이드웹(WWW)까지 저비용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혁신 플랫폼이 되어 온 인터넷은 정량적 데이터의 수집을 통해 상식의 영역 밖에 있는 인간의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 전에 없던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p>
<p>과거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인간에게 정복해야 할 지식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새로운 도전 영역은 우리가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그 중심축이 이동했다. 각종 정보와 이론의 범람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지 않음을 비판하고 검증하기 위해 사회학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고, 않을 것이다. 경제개발, 국제원조, 복지문제 등의 각종 사회 문제에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회학은 사회적 상상력의 뿌리인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고민과 함께 정보통신혁명 등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의 결론, 상식의 배반을 넘어선 상식의 도전, 인터넷 시대의 사회적 상상력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a rel="attachment wp-att-72299" href="http://www.bloter.net/archives/72256/mona_lisa_leonardo"><img class="size-full wp-image-72299 aligncenter" title="Mona_Lisa_leonardo"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8/Mona_Lisa_leonardo.jpg" alt="" width="500" height="379"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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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외규장각 도서 반환과 한국 인터넷의 미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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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7 Jul 2011 02:30:49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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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했을 때 약탈됐던 외규장각 도서가 지난 5월27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무려 145년, 그동안 고국은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었고, 광복과 한국전쟁, 숨가쁜 경제발전과 격렬한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까닭은 해방 직후 외규장각 도서들이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국력이 미약했던 탓에 관련된 협상을 진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식 반환 운동은 당시 서울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했을 때 약탈됐던 외규장각 도서가 지난 5월27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무려 145년, 그동안 고국은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었고, 광복과 한국전쟁, 숨가쁜 경제발전과 격렬한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다.</p>
<p>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까닭은 해방 직후 외규장각 도서들이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국력이 미약했던 탓에 관련된 협상을 진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식 반환 운동은 당시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역임했던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1991년 11월 시작했다. 그리고 약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그 결실이 맺어지게 된 것이다.</p>
<p>조선 중기인 1782년 정조가 설치한 외규장각은 일반에는 의궤(儀軌) 덕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의궤는 그림과 글을 통해 유교국가 조선의 사회적인 기틀을 마련하고 알리기 위한 기록물로, 조선시대 의식과 궤범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다. 의궤의 그림은 기록화로서 왕이 행차할 때 그것을 진행하는 사람들, 구경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 배경까지 면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의 광경을 화폭에 옮겨놓은 것이니 그때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며, 그 전통의 바탕아래 오늘의 현실을 재조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의궤는 탕평군주인 영·정조 시대를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중기의 개혁운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그것이 현대의 민주정체와 어떠한 연속성을 가지는지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p>
<p>한국미술사의 권위자로 꼽히는 한국학중앙연구소 이성미 교수에 따르면 이 같은 의궤는 다른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고유한 문화적 자산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의 특수성을 파헤치는 데도 많은 기여를 한다. 우스갯소리로 김영삼 대통령 당시 외규장각 도서 중 한 권이 시범적으로 반환이 되었을 때 그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났는데 국내의 많은 언론들이 이를 프랑스의 선진 보존 기술 덕분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보존상태의 비밀은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8216;주초지&#8217;라는 고급 종이 덕분이었다.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외규장각 도서의 일부도 같은 실에 있는 다른 기록물에 비해 뛰어난 보존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점을 통해서도 우리는 외규장각 도서가, 그리고 의궤가 우리 문화의 사회·기술적인 연속성과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p>
<p>시대는 흘러 의궤를 낳은 대한민국은 소위 IT 강국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디지털 접근성이 뛰어난 곳으로 꼽히는 이 나라에서 굳이 외규장각 도서와 의궤를 기념하는 것이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 이상의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영·정조 시대와 우리 시대의 사회적인 발달사의 연속성을 발견하는 것과 우리의 문화가 가지는 문화적, 기술적 특이성을 깨닫는 것 외에 어떠한 시사점이 있는 것일까.</p>
<p>선진 연구 사례에서 전통과 첨단이 어떻게 교직하고 있는지 보자. 프린스턴대학 사회학과의 폴 스타 교수는 두 번의 퓰리처상을 수상한 문필가다. 그의 작품 중 특별히 미국 미디어 산업을 다룬 &#8216;미디어의 창조&#8217;(The Creation of the Media)라는 책은 왜 식민지 시대부터 미국이 유럽 본토에 비해 미디어의 발전에서 앞서고 있었고, 그것이 대중매체의 진화를 거쳐 인터넷의 혁신까지 이어지는 지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스타 교수는 미국의 미디어 산업이 왜 유럽과 다른 발전 과정을 거쳤는지, 그것이 오늘날의 미국을 이해하는 데 어떠한 시사점을 두는 지를 파악하려 한 것이다.</p>
<p>다른 사례로 사이버 법률의 대가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포스트가 쓴 &#8216;제퍼슨의 큰 사슴을 찾아서&#8217;(In Search of Jefferson’s Moose)라는 책을 보면, 인터넷·미디어 산업을 통해 미국 사회의 뿌리를 이해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보인다. 하버드 로스쿨의 로렌스 레식과 함께 사이버 세계의 법리를 밝히는 데 많은 역할을 한 데이비드 포스트는 이 책을 통해 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제퍼슨의 경계가 없는 방대한 공유 자원의 관리에 대한 통찰력이 우리 시대의 인터넷을 경영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 그 의미를 밝히려 하고 있다. 비록 사회학과 법학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석학의 연구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왜 미국 사회가 건국 초기부터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회와 다른 특수성을 보이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원리로 운영되고 있는 것인지를 밝히려고 한 것이다.</p>
<p>그 같은 공통점이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외규장각, 의궤, 아니 우리 전통이 정보통신기술(ICT)로 촉발되는 최첨단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왜 문제가 되는가.</p>
<p>그것은 변화라고 하는 새로운 문법도 전통이라고 하는 사회적 틀 안에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많은 영향을 받는 기술의 역동성이란 흔히들 사회적인 배경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전 세기에 칼 폴라니가 그의 역저 &#8216;위대한 전환&#8217;에서 지적했 듯 사회와 무관한 자기 규율적 시장이란 오직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현실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 저편으로부터 이어진 과거로부터의 연속된 길 위를 구르고 있기 때문이다.</p>
<p>조선부터 오늘까지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우리 인터넷이, 우리의 정보화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가 하는 의문을 깨닫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의미를 넘어선다. 이것은 동시에 근대화를 넘어 후기 근대화 사회로, 정보화 사회로 넘어서고 있는 현시대의 인류 사회에도 기여하는 것이 된다.</p>
<p>예를 들어 2011년 키루스 파리바르에 의해 발표된 &#8216;세계 다른 곳의 인터넷&#8217;(The Internet of Elsewhere)이라는 책은 세네갈, 에스토니아, 이란의 인터넷 발전 사례와 함께 한국 인터넷의 발전 사례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미국 이외의 다른 땅에서 인터넷이 그 곳의 고유한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어떠한 역동적인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지 파헤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한국 &#8216;인터넷의 아버지&#8217; 카이스트 전남길 교수의 일본과 미국, 한국을 오가는 성장 과정과 현대 한국사, 한국의 인터넷의 발전이 어떻게 맞물리는 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근대화라는 것이,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것이 단 하나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정보화 사회의 진전도 각 사회의 서로 다른 특성에 따라 새로운 발전의 경로를 보여줄 수 있다. 그 점에서 한국은, 한국의 인터넷의 미래는 우리 한국인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류에게 열린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중요하다.</p>
<p>그 점에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의미는 단순한 전통의 복고, 잃어버린 유산의 회수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 정보화 사회의 미래를, 한국의 인터넷을 더 깊고 넓게 이해하는 새로운 도전의 과제가 함께 주어져 있다.</p>
<p><a rel="attachment wp-att-69480" href="http://www.bloter.net/archives/69470/euiguee"><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69480" title="euiguee"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7/euiguee.jpg" alt="" width="500" height="375"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국립중앙박물관)</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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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티브 잡스와 죽은 인문학의 사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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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4 Mar 2011 03:05:16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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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리버럴 아츠]]></category>
		<category><![CDATA[스티브 잡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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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미국 현지시간으로 2011년 3월2일, 샌프란시스코 어바부에센터에서 애플의 제품발표회가 열렸다. 이 곳에서 병가로 잠시 회사를 떠났던 잡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건재했다. 그곳에 시한부 인생 따윈 없었다. 잡스는 특유의 자신감과 독설을 가지고 더 빠르고, 더 가볍고, 더 매혹적인 아이패드2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의 71분 발표는 국내에서도 자주 소개되는 ‘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을 강조할 때 절정으로 빛났다.
잡스의 신화는 그 발표로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미국 현지시간으로 2011년 3월2일, 샌프란시스코 어바부에센터에서 애플의 제품발표회가 열렸다. 이 곳에서 병가로 잠시 회사를 떠났던 잡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건재했다. 그곳에 시한부 인생 따윈 없었다. 잡스는 특유의 자신감과 독설을 가지고 더 빠르고, 더 가볍고, 더 매혹적인 아이패드2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의 71분 발표는 국내에서도 자주 소개되는 ‘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을 강조할 때 절정으로 빛났다.</p>
<p>잡스의 신화는 그 발표로 끝나지 않았다. 잡스의 발표가 끝남과 동시에 국내 온라인 생태계 곳곳에서 잡스와 잡스의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회자됐다. 그렇게 보면, 잡스의 왕의 귀환은 애플만 살리지 않았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잡스 만큼 인문학을 마케팅해주는 사람이 없다.</p>
<p>그렇다면 잡스가 정말 우리 인문학의 구세주인가?</p>
<p>먼저 잡스의 인문학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잡스가 말하는 인문학은 정확히 말하면 반드시 인문학은 아니다. 인문학은 영어로 휴머너티스(humanities)다. 그러나 잡스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할 때 종종 연관을 짓는 문사철(文史哲)과 직접 대응하지 않는다.</p>
<p>이 잡스의 리버럴 아츠를 진정 이해하려면 <a href="http://www.youtube.com/watch?v=Hd_ptbiPoXM" target="_blank">2005년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a>만 기억하면 부족하다. 그가 리드 대학에서 배운 동양 서예를 살려 우아한 폰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다. 그같은 접근법이 옳다면, 우리도 무언가 인문학적인 소재를 탐구하게 되면 잡스처럼 시대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연히 아니다. 그것이 길이라면, 이미 전세계 수많은 잡스의 추종자들 중에서 수많은 잡스의 2세들이 나와야 한다. 잡스를 잡스일 수 있게 만들었던 인문학은 인문학적인 소재에 머무르지 않는다.</p>
<p>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보자. 산업 시대는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대에 어떻게 잡스는 정부나 회사의 지하실에 잠들어 있던 컴퓨터를 개인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컴퓨터를 계산기가 아니라 개인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일반적 목적을 가진 기계로 볼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그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다시 상상할 수 있었을까?</p>
<p>이질문이 그의 인문학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것은 기계를 생명체로 보았던 초기 인공지능의 아버지 마빈 민스키나, 컴퓨터가 인간의 숨겨진 가능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로 보았던 앨런 케이 같은 인물들이 품었던 열정이고 야심이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가 얼마나 더 인간적이고 얼마나 더 개인적일 수 있느냐 하는 호기심이다. 그것이 잡스를 잡스일 수 있게 만들었던 인문학, 혹은 그의 리버럴 아츠이다.</p>
<p>이 잡스의 인문학의 정수, 이 질문이 시작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리버럴 아츠가 태동한 서양 근대의 계몽주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 시대에 리버럴이라는 말은 개혁적 성향을 뜻했다. 신적인 권위(교리)와 인간적인 권위(왕권)에 대한 급진적 작별을 의미했다. 아츠는 기술, 예술을 뜻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 말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을 그 과거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그리고 자연을, 사회를 개선하고 개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물론, 이 계몽주의의 사상과 열기는 광기에 치달린 프랑스 혁명의 이슬로 일찍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명맥은 오늘날까지도, 스티브 잡스에게까지도 이어진다.</p>
<p>그 이유를 우리 시대의 혁명가 잡스에 견줄 수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에게서 찾아보자.</p>
<p>그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계몽주의의 막을 연 프랜시스 베이컨은 잡스가 엔지니어 출신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수학적 재능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뉴미디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산문(콘텐츠)과 인쇄술(플랫폼)의 결합이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지 알았다. 잡스가 기술과 디자인의 융합이 만들어 낼 마력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p>
<p>그리고 그 시대, 베이컨 역시 그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비전을 발견했다.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학의 갈 길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과학은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과학과 다르다. 그 과학은 이학, 공학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을 포괄한다. 모든 지식이 하나의 공통된 원리로 설명된다고 본 그에게 학문간 구별은 없었다. 그는 이 과학을, 리버럴 아츠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잡스가 컴퓨터와 디자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처럼, 이 과학을 통해 인간이 이성과 실험으로 무장해 새로운 지식의 지평을 개척할 수 있다고 봤다.</p>
<p>사실, 잡스 만큼이나 베이컨도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 새롭게 개척되는 지식의 지평선이 곧 돈이, 힘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천문학을 포함한 새로운 과학의 발전은 항해술을 급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잡스가 손수 애플 제국을 건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이컨의 영국은 대항해시대를 통해 팍스 브리태니카에 등극했다. 그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힘은 은유로 그치지 않았다. 역시 잡스의 리버럴 아츠가 그러했던 것처럼.</p>
<p>그러므로 스티브 잡스의 리버럴 아츠는 우연도, 행운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필연이며, 시대의 반복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필요를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프랜시스 베이컨,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들이었다.</p>
<p>여기서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인문학을 이 시대 최고의 인문학 대변가인 잡스가 기사회생시킬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p>
<p>그 이유는 간단하다.</p>
<p>첫째, 위에서 보다시피 잡스의 리버럴 아츠와 문사철이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꼭 문학을 읽고, 철학을 탐구하고, 역사를 꿰뚫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수학으로도, 생물학으로도 그같은 접근법은 터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목적지인, 대담한 질문을 정확하게 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p>
<p>두 번째 이유는 더 근본적이다.</p>
<p>잡스의 인문학이 우리 인문학을 살리지 못할 까닭은 많은 경우 현재 인문학의 위기의 본질적 원인은 대학이 상업화되어서도, 신입생들이 다른 단과대학에 비해서 인문대학을 외면해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잡스라는 최고의 모객꾼이 있어야 인문학이 흥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 변해야 인문학이 살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리버럴 아츠라 부를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있다.</p>
<p>인문학이 현재의 신세가 된 까닭 중 하나는 인문학이 그 동안 수 없는 사회 변화에도 지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만 봐도 30년 전, 아니 10년 전 강의안과 교수법이 오늘날과 비교해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 학생들은 그러한 강의들을 통해서 자기 주변의 변화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얼마나 넓게, 그리고 얼마나 대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p>
<p>물론 경영이나 공학과는 달리 최신의 사례나 이론, 기술이 인문학에서 그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최신 장비나 교수 기법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도 변해야 될 것은 있다. 그것은 비록 텍스트인 고전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한 질문은 계속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고전을 지금 왜 여기에서 읽어야 하냐는 질문의 배경이 되는 문제 의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현실과 그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 무심해서는 나오기가 어렵다.</p>
<p>예를 들어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 컴퓨팅, 소셜 네트워크라는 최근 ICT 생태계의 3대 트렌드를 인문사회적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해석하는 강의가 우리 대학에서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 혹은 좀 더 사회적 측면에서 지식의 공유가 시대적 흐름인 시대에 인문학은 이같은 흐름을 주도하는 데 얼마나 앞장서고 있는가? 상업화되어 가는 디지털 환경에 맞서 우리 대학들은 공공 지식을 확대하는 공익적 목적에 대해서 얼마나 기여하고 있으며, 그 일을 위해 인문학은 어떠한 사명과 역할을 말하고 있는가?</p>
<p>역설적이다.</p>
<p>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보면 잡스의 인문학은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잡스의 인문학은 우리의 인문학이 오히려 놓치고 있던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문학의 가장 큰 역할과 소명이다. 인문학이 할 일은 그들이 질문하지 않을 질문에 대해서, 그들의 상식으로는 존재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이다. 그 것은 각종 다른 학문들이 전통적으로 인문학이 했던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 가운데 인문학이 져야 할 책임이다. 우리의 인문학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향해 질문을 하고 있는가.</p>
<p>따라서 한국의 인문학이 살아나려면, 이 죽은 인문학의 사회가 부활하려면, 우리에게도 스티브 잡스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은 모객꾼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극장이 아니다. 상영 시간을 채우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객에게 감동과 전율을 줄 수 있는 콘텐츠다. 그리고 시대를 통찰하고 인도할 수 있는 질문이다.</p>
<p>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이 만든 것이다. 그 위기를 해결할 열쇠도 인문학 안에 있다. 이제 디지털 시대가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인문학이 답하라.</p>
<p style="text-align: center"><a rel="attachment wp-att-52077" href="http://www.bloter.net/archives/51984/612px-steve_jobs_headshot_2010-crop"><img class="size-full wp-image-52077  aligncenter" title="612px-Steve_Jobs_Headshot_2010-CROP"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3/612px-Steve_Jobs_Headshot_2010-CROP.jpg" alt="" width="500" height="490" /></a></p>
<p style="text-align: center">(사진 : <a href="http://en.wikipedia.org/wiki/Steve_Jobs" target="_blank">위키피디아</a>. CC <a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deed.en" target="_blank">BY-SA</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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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의 디지털 네이티브는 꿈꾸고 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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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7 Feb 2011 02:22:42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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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디지털 네이티브]]></category>
		<category><![CDATA[수하스 고피나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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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2011년 1월 27일 뉴욕타임즈는 &#8216;일본 청년들 세대의 벽에 막히다&#8217;(In Japan, Young Face Generational Roadloacks)라는 기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일본의 이야기를 전했다. 소니, 도요타, 혼다는 오늘날의 구글, 애플과 마찬가지로 창업자들이 20대에 시작한 기업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기업들은 침묵하고 있다. 소니, 도요타, 혼다를 이어갈 다음 세대의 일본 기업은 어디에 있는가?
기사는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원인으로 &#8216;세대의 벽&#8217;을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2011년 1월 27일 뉴욕타임즈는 &#8216;일본 청년들 세대의 벽에 막히다&#8217;(In Japan, Young Face Generational Roadloacks)라는 기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일본의 이야기를 전했다. 소니, 도요타, 혼다는 오늘날의 구글, 애플과 마찬가지로 창업자들이 20대에 시작한 기업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기업들은 침묵하고 있다. 소니, 도요타, 혼다를 이어갈 다음 세대의 일본 기업은 어디에 있는가?</p>
<p>기사는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원인으로 &#8216;세대의 벽&#8217;을 꼽았다. 일본 사회는 점점 더 고령화되고, 고령화된 인구는 점점 더 보수화하고 있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젊은 인구가 사회의 의사 결정층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다. 좋은 예가 케니치 호리에의 사례다. 30대 초반인 그는 바이오연료 시스템을 만드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주변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비슷한 또래의 많은 일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다 못한 그는 2년 전에 대만으로 옮겼다. 중국어를 배워서 그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p>
<p>그러나 켄이치가 중국으로 옮겨간 것도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중국 역시 세대간의 벽이 높아지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8216;한 자녀 출산&#8217; 운동 때문에 역사상 최대의 노령 인구 비율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남아선호사상에 의해 과다 생산된 남성들은 짝을 찾지못해 불가피한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보여 상황은 더 위태롭다. 인구 대국이 고령 대국으로 달려가고 있다.</p>
<p>MIT 슬론경영대학원의 황야성 교수는 그의 저서 &lt;중국 특색의 자본주의&gt;에서 &#8216;정부 주도의 중국 경제는 중국판 다국적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8217;고 지적했다. 정부가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기업보다는 정부와 이해 관계가 맞물리는 기업의 발전을 선호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본의 흐름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1979년부터 1989년까지는 창업과 그 기업의 고용, 발전이 경제 성장을 견인한 반면 1989년이후 부터는 정부의 공공 투자와 정부의 후원을 받는 과점 내지 독점 기업들이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다. 인구의 고령화와 함께 이 왜곡된 시장 질서는 중국 경제의 그늘을 더 짙게 만든다.</p>
<p>고령화 문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도 세대간 갈등과 그로 인해 사회 발전이 저해되는 양상은 이미 뚜렷하다. 삼성, 현대, LG 같은 대기업은 더 이상 새로 나올수 없는 분위기다. NHN, 엔씨소프트 등 포털과 게임 업체를 제외하고는 대기업의 반열에 들만한 새로운 기업을 전혀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현상은 일본, 중국,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미국과 같이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통해서 젊은 인구를 수혈할 수 있는 나라를 제외하고는(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왔고, 인텔을 이끌었던 앤디 그로브는 헝가리계,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은 러시아계다.) 많은 선진국, 개발도상국들이 비슷한 문제에 당면해 있다.</p>
<p>인구가 오히려 자산인 나라들은, 폭발하는 젊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빈곤 등 과제들을 안고 있지만 이 나라들은 희망을 안고 있다. 살코위츠는 1977년에서 1997년까지 21년간 출생한 젊은 세대를 &#8216;디지털 밀레니엄 세대 플러스 넷 세대&#8217;라고 정의했는데, 약 8천110만 명의 이 세대 상당수가 바로 이 지역 &#8216;영월드&#8217;에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p>
<p>나아가,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p>
<p>첫째, 제3세계에 정보통신 인프라가 확대되고 있다. 세계 최빈 지역 중 하나인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에서 2000년 인터넷 이용률은 인구 100명당 0.5명이었다. 7년이 지난 2007년, 그 비율은 인구 100명당 4명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물론, 전체적인 비율을 놓고 보면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는 현저히 낮다. 그리고 여전히 터무니없이 높은 인터넷 사용료 등 가격 장벽도 높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최근 SAT-3 광케이블이 도입됐다. 2009년에는 10만 피트 상공에 열기구 풍선을 띄워 이에 기반한 준궤도 무선네트워크를 서아프리카 지역에 공급하는 서비스가 상품화했다. 희망은 있고, 상황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p>
<p>둘째, 정보통신 인프라가 그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준다.</p>
<p>인도 방갈로르의 수하스 고피나스가 좋은 예다. 그는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문제아였고, 부모의 골치 덩어리였다. 공부보다는 인터넷 카페에서 인터넷만 했다. 부모의 꾸지람에 그는 이렇게 반박하곤 했다. 언젠가는 자신이 빌 게이츠처럼 될 것이라고 말이다.</p>
<p>사실, 당시 14세였던 수하스는 이미 글로벌 비즈니스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가 인터넷 카페에서 인터넷을 하는 것은 채팅이나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회사들의 웹 사이트 구축을 돕는 &#8216;알바&#8217;를 하고 있었다. 수하스의 재능은 그가 집처럼 살았던 인터넷 카페 주인이 알아봤다. 그는 수하스에게 프리랜서 개발자의 길을 권했다. 수하스는 초기 시행착오 끝에 중소기업 상대로 그의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글로벌스(Glovals)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의 회사를 전세계 12개 나라에 120여 명의 직원을 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그는 2008년에 &#8216;2008년을 빛낸 젊은 기업가&#8217;로 선정이 되어 그해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했다.</p>
<p>그리고 지금 &#8216;영월드&#8217;에는 수많은 수하스가 있다. 가나의 더소프트트라이브(theSOFTtribe), 아르헨티나의 글로반트(Globant), 인도의 인포시스(Infosys) 같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중견기업들이 그 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많은 기업들이 싹을 트고 있다. 그곳에는 아주 넉넉한 생태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고한 경영학자 C. K. 프라할라드가 그의 역저 &lt;저소득층에 투자하라&gt;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의 숫자가 너무도 방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 그들의 구매력이 모이면 그것이 아무리 작을 지라도 40억이다. 그 임팩트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p>
<p>동시에 이번 아랍 혁명을 통해서 이들 &#8216;영월드&#8217;의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그들의 기업가 정신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식 역시 남다름을 보여준다. 중동의 구글 임원인 웨일 고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집트 사회의 변화를 위해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해 초기 시위를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결국, 그는 이집트 정부에 의해 일정 기간 구금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미국인 아내를 맞아 다국적 기업의 임원으로 살고 있는, 그가 스스로 자처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에서 이들에게 돈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진정 세상을 바꾸고 싶어한다.</p>
<p>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가? 우리의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앞길은 어떠한가?</p>
<p>그것을 생각해보려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왜 저개발국에서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기업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왜, 그들이 사회 변화의 주동 세력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왜 저개발국의 성장하는 정보통신 인프라가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p>
<p>그 답은 &#8216;네이티브&#8217;에 있다. &#8216;존재하는 것은 검색된다&#8217;는 것을 믿는 것과, &#8216;검색되는 것은 존재한다&#8217;는 것을 믿는 차이다. 자라면서 컴퓨터를 접하고, 말하면서 인터넷을 배운 그들에게는 코드를 통해 전에 열리지 않던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은 꿈이 아니다. 영국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의 한 구절이 이들을 잘 설명해준다. 그들에게는 &#8216;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이 꿈이 아니다.&#8217;</p>
<p>이같은 디지털 네이티브는 과거 정부 주도로 훌륭한 인터넷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글로벌 기업의 ‘기업가’이고 사회적 변화의 ‘혁명가’인가? 아니면 게임 ‘중독자’이고 불법 ‘복제자’인가. 정체성의 차이는 커 보이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그 만큼 가까운 것도 없다.</p>
<p>하버드 대학 로스쿨의 존 폴프리와 우루스 가서는 그들이 공저한 &lt;그들이 위험하다&gt;에서 이 디지털 네이티브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혁신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법과 질서에 구속이 되지 않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냅스터의 숀패닝에서부터 페이스북의 마크 쥬커버그까지를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p>
<p>냅스터는 불법 복제로 세상의 논란이 되기 전에 쥬커버그와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웹 사이트였다. 단지, 그의 문제는 기존 산업의 기득권인 저작권의 영역에서 신화의 첫 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페이스북도 개인정보 침해라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존 산업과 이해 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숫자는 많지만, 이해 관계의 응집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훨씬 떨어지는 이용자간의 관계에서의 문제다. 불법복제와 소셜 미디어간의 벽은 도망자와 황제의 벽만큼이나 높아 보이지만, 이처럼 실상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p>
<p>다시 말하면, 우리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기업가 혹은 게임 중독자, 혁명가 혹은 불법 복제자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우리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기존 산업의 이해 관계와 어른들의 입시에 따른 염려를 제외하고 그들을 본다면, 그들에게는 얼마만한 잠재력이 있는 것일까. 2009년에 &#8216;서울버스&#8217;로 대박을 터뜨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유수완은 단지 그 혼자만의 사례일까, 아니면 그 세대의 잠재력을 드러낸 것 걸까? 유수완을 싹이라 보고 그 싹이 더 크게 자랄 힘이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p>
<p>결론은 생태계다. 우리에게 디지털 네이티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어딘가에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마크 쥬커버그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씨앗과 싹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인터넷 시장에서 끊임없이 승자가 바뀌는 것도 그 시장이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후가 구글로, 구글이 페이스북으로, 페이스북이 내일의 누군가로 바뀔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똑같은 조건 &#8216;개방적이고, 분산적이며, 중립적인&#8217; 인터넷이라는 기본적인 유통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환경이 주어져 있는가? 우리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삶의 조건이 &#8216;개방적이고, 분산적이고, 중립적인가.&#8217;</p>
<p>단적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그들의 양면 중에, 그들의 두 잠재적 가능성 중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더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그 관심과 기대에 부응해 성장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무엇보다, 앞으로 우리가 그들의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에 기대를 걸어야 할지 생각해보자.</p>
<p>우리는 늘 아이들을 걱정하지만, 사실 우리 어른들이 관습과 제도에 적응하면서 잃어가고 있는 창의성의 주인공들이 바로 아이들이다. 유치원에서는 아무도 창의적인 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때로는 그 창의성 때문에 질서를 잃어버리곤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간섭해야 할 때는 그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때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핵심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선순위는 그들의 창의성을 지키고, 키워주고, 그들의 꿈을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 데 있지, 그들이 질서를 위한 부품이 되게해서는 안된다.</p>
<p>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누구와 가까운가? 일본의 케니치 호리에와 인도의 수하스 고피나스 중에서. 일본과 인도는 GDP 및 각종 지표가 엄청 차이나지만, 실질적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기대의 차이가 그들의 삶의 결과를 다르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국가의 미래마저 다르게 만들고 있다.</p>
<p>이젠 우리가 그 희망을 가질 차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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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디지털 시대, 창조는 누구의 권리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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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4 Feb 2011 02:44:20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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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지난 2월22일, 서울역 인근 저작권교육원에서 개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저작권 정책 분야 대국민 현장 업무 보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에 참석하는 정책 고객은 나를 포함해 모두 22명이었다. 대부분 정책 고객의 소속이 이런저런 산업 협회의 장이었다. 나는 고려대학교 학부 재학생이다. 나 같은 학생이 뭔가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분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내가 활동해온 부분은 있다. 그 동안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난 2월22일, 서울역 인근 저작권교육원에서 개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저작권 정책 분야 대국민 현장 업무 보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에 참석하는 정책 고객은 나를 포함해 모두 22명이었다. 대부분 정책 고객의 소속이 이런저런 산업 협회의 장이었다. 나는 고려대학교 학부 재학생이다. 나 같은 학생이 뭔가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분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싶었다.</p>
<p>물론 내가 활동해온 부분은 있다. 그 동안 점점 더 디지털화되어 가는 사회에 이용자가 가지고 있는 권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해왔다. 외부 필진으로 블로터닷넷에 100편 넘는 글을 썼다. 소셜웹의 시대적 변화를 이윤 뿐 아니라 개인의 권리, 사회적 발전의 측면에서 분석했다. 지난해 4월에는 &#8216;소셜 웹이다&#8217;라는 책을 써서 종이책으로 출간했고, 7월에 전자책으로 웹에서 무료 배포했다. 인터넷에 공공지식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2007년과 2008년에는 MIT 오픈코스웨어(공개강의운동)의 국내 정착을 위해 뛰었다. 2009년 말에서 2010년 상반기에는 세계화와 빈곤문제에 관련된 NGO에서 일하면서 네티즌의 온라인 협업으로 공공지식을 확대하는 일을 했다. 사람들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지식의 공유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흐름에 참여하고자 했다.</p>
<p>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믿고 행동해온 이 모든 것들이 그 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많은 중요한 분들에게 어떻게 인식될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이 중심으로 보는 이윤과 내가 핵심으로 보는 가치는 다른 기준이기 때문이다.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이 달랐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p>
<p>내 차례가 오기까지는 1시간이 거의 소비됐다. 안산 경일고 조경희 교사, 디지털 자유 문화의 표준을 마련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의 정진섭 대표, 오픈액세스에 관여하고 있는 최희윤 KISTI 정보유통본부장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저작권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본인이 속한 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관련 저작권을 보호해달라는 논지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관련된 법규, 정책, 기술의 강화였다. 귀 담아 들을 부분도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도중 우리의 다음 세대, 우리의 미래,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부분은 마음이 걸렸다.</p>
<p>그곳에 앉아 계신 어른들이 보기에 우리 아이들의 문제는 그들이 저작권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있어도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저작권을 잘 모르기 때문에, 창작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 등을 한다는 얘기였다. 심지어는 양심을 문제삼을 만큼 그들이 잔인하고 무도하게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이 저작권 침해를 안 하게 막는 방법은, 그래서 그들의 양심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이들이 저작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면 반드시 잡고, 잡으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잡히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의식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략 이러한 이야기였다.</p>
<p>그 자리에 앉아 계신 어른들이 보기에 학생인, 그래서 좀 더 큰 아이일 뿐인 나 역시 그 우리 아이들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에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p>
<p>가장 큰 반론은 감히 그 자리에서는 입밖에 내지 못했다. 그것은 왜 우리 아이들이 갑자기 저작권을 위반하냐는 부분이었다. 정책 자료에도 분명히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서 저작권 위반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 중에 일반 이용자들이 많다고 했다. 그 일반 이용자 중에는 우리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아이들이 갑자기 양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p>
<p>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제는 아이들의 양심이 아니다. 갑자기 아이들의 양심이 나빠진 것이 아니다. 급격히 바뀐 것은 &#8216;기술&#8217;이다. 기술의 속도가 법과 제도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빨리 발전하고 있는 탓이다. 법과 제도는 그 때 그 곳에 앉아 계신 많은 분들보다 더 많은 분들, 더 높으신 분들의 이해관계와 걸려 있다. 그래서 잘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기술은 상상력과 이윤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상상력을 통해 더 빨리 움직이고, 이윤을 통해 더 빨리 움직여야만 하는 강력한 동기가 있다. 그 둘의 차이가 이러한 사태를 일으켰다.</p>
<p>아이들은 단지 그 사태의 한복판에 서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죄가 있다면 그들이 창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그 디지털 기술을 쓰지 않았다. 법전에, 교과서에 쓰인 대로가 아니라 그들이 이해하는대로, 원하는대로, 서로에게 더 많은 가치를 줄 수 있는대로 썼다.</p>
<p>사실 그것이 디지털이 진화해온 방식이었다. 1969년에 탄생한 인터넷의 꿈은 분산형 네트워크였다. 그것은 인터넷의 간대간 연결의 원칙(end-to-end principle)이라는 네트워크 디자인에 잘 드러난다. 그 디자인은 혁신은 중앙이 아니라 끝에 있다는 원칙이었다. 네트워크를 진화시키는 힘을 네트워크의 단말기, 개인용 컴퓨터(PC)에 준다는 기준이었다. 이 개인용 컴퓨터는 일반적 목적을 가진 기계(general purpose machine)였다. 개인용 컴퓨터는 계산기의 연장이 아니었다. 계산기는 계산기로서 기능할 뿐이지만, 컴퓨터는 그 어떤 것으로든 기능할 수 있다. 그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창의성이다. 기계가 인간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터넷이었다.</p>
<p>인터넷이 변화이고 혁명인 까닭은 그것이 오늘날처럼 널리 쓰여서도, 야후부터 구글,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탄생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새로 쓴 사건이어서 위대하다. 인간의 창의성이 기계를 움직이고, 그것이 네트워크를 통해 전지구로 확산된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것이 디지털이고, 소셜웹이다.</p>
<p>그리고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죄였다.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아날로그의 법과 질서가 아직 그 만큼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p>
<p>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곳에 앉아 계신 회장님들, 대표님들에 비해 업계 경험도 일천하고 지식도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기존 산업과 디지털 이용자간 상생의 길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용자를 배제하고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p>
<p>열쇠는 업계도, 정부도 아니고 이용자들이 쥐고 있다. 이용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저작권 타협안이란 결국은 쥐와 고양이의 게임을 지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법은 추적하지만 이용자는 도망간다. 그 결과는 더 많은 범죄자, 더 높은 행정 비용, 더 비싼 보안기술 뿐이다.</p>
<p>해결책은 이용자에게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키워주는 저작권 교육은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됐다. 그들에게 먼저 권리자로서의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핵심이고 선행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자신의 권리 의식을 바탕으로 타인의 권리 의식을 존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자기 권리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남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는가. 선거도 할 수 없고 복지 혜택도 주지 않으면서 세금은 더 많이 내라고 한다면 어느 국민이 좋아하겠는가. 그것이 저작권이 현재 우리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일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꿀 때가 됐다. 아이들의 권리를 우선시한 저작권 교육이, 홍보가 필요하다. 창작자의 권리는 이제 시민의 권리다.</p>
<p>사실 이와 같은 불법 다운로드 문제를 제외하면 우리 아이들이 재산권 문제로 시빗거리가 될 일이 거의 없다. 아이들은 땅도, 집도, 혹은 어떤 버젓한 소유물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저작권에서는 문제가 되는 까닭은 정치, 경제와 문화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화 영역에서 그들은 강력한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화를 소비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이 공유하고, 나아가 창조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법과 제도와 충돌하는 것이다.</p>
<p>그것은 달리 보면 시대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다. 저작권 권리자가 각 콘텐츠 제공 산업의 회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된 현실을 뜻한다. 따라서 이제 그 현실에 맞게 저작권에 대한 인식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 저작권에 상표권, 특허권 등을 포함시킨 소위 지적 재산권은 달리 표현하면, 문화에 대한 권리다. 문화에 대한 소유권을 말한다. 우리 아이들도 그 문화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권리 역시 지켜주고 키워줘야 한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가 창작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자기가 콘텐츠를 만들고, 그것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나누고, 상호 평가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야 한다.</p>
<p>더 필요한 것이 남아 있다. 아이들에게 앞으로 열린 사회를 열린 디지털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 인터넷은 아이들이 창작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 한국어 온라인 콘텐츠는 취약하다 못해 빈곤하다. 더구나 상업적 콘텐츠는 철저히 저작권으로 보호된다. 그 보호는 더 강화되어 이용자 순수생산 콘텐츠(UGC)로 재생산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좁다. 학계에서 논문을 인용하는 것처럼, 대중문화의 콘텐츠는 아이들이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창의성을 발휘하기에 좋은 콘텐츠다. 그러나 팬픽션이든, 상업 동영상에 자막을 달든, 그와 유사한 행위가 허가되지 않은 원저작물에 대한 2차 저작물 제작 행위로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다. 대부분의 공공 정보는 아직도 밀실에 잠들어 있다. 대학, 정부기관 등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정보가 있는 곳들은 많다. 그러나 지식의 공유가 아직 그들의 사회적 책임이 아닌 이상 그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않고 있다.</p>
<p>이것이 어쩌면 보다 실질적인 저작권 교육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그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권리자로서 일깨우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디지털 기기를 구매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이 이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문화에 참여할 여지도, 창조할 부분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누구의 양심이 더 문제인가.</p>
<p>창의성이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는 인터넷이 열렸다. 그 인터넷이 인프라가 되고 있다. 비트와 원자가 하나되고, 인간과 웹이 하나되는 소셜웹 시대가 왔다. 창의성이 폭발하는 창의성의 혁명이 올 수 있다. 그 주역은 이용자가 될 것이다. 소셜미디어란 다름아닌, 이용자가 곧 미디어인 시대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 이용자의 핵심층이 곧 우리 아이들이다.</p>
<p>그러나 그 아이들이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한국에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가 태어나기 어려운 많은 이유 중 하나와 같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이 만들어가는 문화와 미래의 권리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다. 도시의 수호자이지만 범법자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크나이트다. 시대의 주역이지만, 그들은 변화를 변화라고, 창조를 창조라고 부르지 못한다.</p>
<p>이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이 디지털 시대에, 창조는 누구의 권리인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떠한 미래를 어떻게 열어줘야 하나. 그 문제의 해답은 적어도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고민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리는 이 문화는 특정 산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1/02/ice_breaking_with_digital_camera.jpg" rel="lightbox[50858]" title="ice_breaking_with_digital_camera"><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50874" title="ice_breaking_with_digital_camera"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2/ice_breaking_with_digital_camera.jpg" alt="" width="500" height="333"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a href="http://www.flickr.com/photos/mikekeran/2417451770" target="_blank">http://www.flickr.com/photos/mikekeran/2417451770</a>. CC BY.)</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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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튀니지, 그들만의 자스민은 꽃피지 않는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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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1 Feb 2011 05:52:59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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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지난 2011년 1월18일 블로거 출신 슬림 아마모우(Slim Amamou)가 튀니지 임시 정부의 청년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우리 상식으로는 법관이나 기업인 배경도 아닌, 블로거라는 경력으로 장관이 된다는 것이 이해 밖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23년 동안 부패하고 무능한 벤 알리 정부의 철권 통치를 받아온 튀니지인들에게는 납득할 만한 근거다. 그 정부 하에서 지배 엘리트들이 사회 변화에 대해 침묵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난 2011년 1월18일 블로거 출신 슬림 아마모우(Slim Amamou)가 튀니지 임시 정부의 청년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우리 상식으로는 법관이나 기업인 배경도 아닌, 블로거라는 경력으로 장관이 된다는 것이 이해 밖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23년 동안 부패하고 무능한 벤 알리 정부의 철권 통치를 받아온 튀니지인들에게는 납득할 만한 근거다. 그 정부 하에서 지배 엘리트들이 사회 변화에 대해 침묵해 온 사이, 인권과 자유를 말해온 주요한 인물들 중 하나가 아마모우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사이버 공간을 통해 반정부 활동을 벌여온 디지털 활동가(digital activist)다.</p>
<p>사실 이 디지털 활동가들은 반정부 활동을 위해 사이버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도구적 측면 이외에 사상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통념을 넘어선 디지털 세계 시민주의다. 2011년 2월11일 온라인상의 글과 시민 미디어를 번역하여 리포팅하는 국제 온라인 네트워크인 글로벌 보이스(Global Voices)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에서 소개한 블로거 장관 슬림 아마모우는 이 새로운 시민혁명의 새로운 측면을 이렇게 압축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시민혁명이 연속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실 그 뿌리가 같은 하나의 ‘혁명’이라고. 아랍 전역에 인터넷을 통해 뭉친 디지털 활동가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의 시민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돕고 있는 것이라고.</p>
<p>주장의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슬림모우에 따르면, 튀니지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인들이 튀니지 정부의 서버에 분산 서비스 공격(DDoS)를 가했고, 튀니지 혁명의 발원지인 시디바우지드를 위해 시위를 했으며, 튀니지인들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기술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집트에 시위가 가열됐을 때, 튀니지인들이 같은 일을 이집트인을 위해 했다. 그 같은 온·오프라인을 통합하는 시민 저항 활동의 공유는 아랍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 따라서 슬림모우와 같은 범아랍권 시민 혁명의 내부 인물들이 보기에 지금의 현상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랍의 디지털 활동가들은 이전의 여느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조직과 체계를 잘 준비해 놓고 있었고 경제 불안에 따른 정권에 대한 불만의 극대화라는 타이밍을 노려 거사를 치른 것이다.</p>
<p>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 네트워크라는 도구를 독재 정권 전복의 기회로 적절히 활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슬림 아마모우와 같은 아랍 전역, 더 넓게는 전세계적인 반정부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진화시키는 데 노력해 온 배후 인물들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근본적으로 이번 아랍의 시민혁명은 소셜 네트워크 혁명이 아니다. 이것은 디지털 세계 시민주의의 시민의 인권과 자유를 탄압하는 독재에 대한 승리다.</p>
<p>그러나 변화의 이름으로 그 변화의 약속을 가리우는 모든 합리적인 의심을 떨치기는 어렵다. 역사를 돌이켜 보자. 아랍을 비롯한 제3세계에 독재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제3세계에 탈식민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해방 전후의 대한민국을 떠올려 보자.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뒤 우리는 세계 역사상 7번째로 큰 전쟁인 한국전쟁을 치렀고, 남과 북은 분단이 되었다. 그것은 더 큰 그림에서 보면, 그 후 40년 가까이 지속된 동서 냉전된 미국과 소련간 동서 냉전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아랍권 시민 혁명이 주는 변화의 약속, ‘아랍의 민주화’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p>
<p>역설적이게도, 아랍 민주화의 가장 큰 장애물이 ‘디지털’이다.</p>
<p>먼저 디지털 인프라가 문제다. UN 산하 국제 전기 통신의 사용과 개선에 관련된 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2010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세계 인터넷 이용률은 30.1%인데, 이 중 선진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71.6%인 반면 개발도상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1.1%에 불과하다. 즉 제3세계의 10명 중 2명만 인터넷이 접근이 가능하다. 튀니지 신임 장관 슬림 아마모우도 이같은 디지털 인프라의 취약성에 대해서 공감했다. 위의 인터뷰에서 그는 튀니지, 이집트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 아랍 전역으로 확대되는 데 가장 큰 장애물 중에 하나로 취약한 인터넷 인프라를 꼽았다.</p>
<p>두 번째는, 인터넷 접근이 가능하다고 할 지라도 그 인터넷이 우리가 쓰고 있는 것처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터넷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의 인터넷은 정부가 철저히 통제하고 검열하는 인터넷이다. 단적인 예로, 그나마 아랍권에서 개방적이라고 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1997년 12월15일 왕령 135호에 따라 그들 왕국의 통신 산업을 자유화했다. 그러나 그 자유화란 사우디텔레콤이란 정부 통제 기업에 의한 명목상의 자유화였다. 이 회사는 전화, 모바일, 인터넷전화(VoIP), 인터넷 사업 전반을 관리한다. 이 사우디 텔레콤은 2005년 4월 미국에 위치한 IP 플랫폼 제공자인 나루스와 협약을 맺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디지털 콘텐츠가 교류하는 관문인 게이트웨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p>
<p>세 번째는 이 인터넷 검열을 뛰어넘을 수 있는 토르(Tor), 프리넷과 같은 검열 우회 기술의 한계다. 먼저는 하버드대 버크만 센터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전세계 시민 운동가들 중에서 약 2%만이 검열을 우회하는 데 필수적인 프록시 서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 좋은 기술이 있더라도 그 기술이 충분히 대중화가 되어야 한다. 다음은 재정의 문제다. 토르, 프리넷 등이 정부의 검열을 우회하는 데 성과를 보인다고 할 지라도, 제3세계 전체의 트래픽을 소화할 수 있을 만한 인터넷 서비스를 만든다는 것은 전후무후한 인터넷 서비스 업체(ISP)를 수익성도 없이 공익성만 가지고 창설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뜻이다. 미국도, UN도 그 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명분과 공감, 무엇보다 의지와 실천을 이끌어내기는 어렵다.</p>
<p>위 나루스 사례에서 보듯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가 시민 혁명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한편에서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고급 기술 등이 스마트 필더 등의 독재 정부에 의한 언론 통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같은 발원지를 가진 기술이 이윤의 합리화 하에 독재 정부와 시민들에게 모두 공급되고 있고, 재정상에서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유리한 고지에 위치한 만큼, 디지털 혁명을 통한 아랍권, 나아가 제3세계의 시민 혁명을 꿈꾸는 것은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대답은 못 된다.</p>
<p>따라서 위의 논리에서 본다면 이번 튀니지, 이집트의 시민 혁명은 디지털 기술 덕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부족한 디지털 기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화를 위해 힘써 왔던 사람들의 존재 덕분이다. 그들이 디지털 기술 이전에 디지털 세계 시민주의로 무장하여 국경을 초월해 네트워크를 결성해 왔고, 덕분에 부족한 그들의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p>
<p>이은 논리에서 본다면 아직 시민혁명을 절차적, 실질적인 민주화로 이행해야 할 과제를 남긴 튀니지와 이집트를 위해서 그리고 아랍 전역의 디지털 활동가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도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그들에게 더해주는 것이다.</p>
<p>예를 들어 아랍권에서 트위터, 페이스북 등이 그들의 사회적 변화를 위해 열렬히 사용됐다는 이야기는 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신 등을 통해서 들리는 제조된 ‘뉴스’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듣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 직접적인 목소리를 국내의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지 못하고 있다.</p>
<p>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나누기를 원한다면 여기에 방법이 있다. 위에서 소개한 글로벌 보이스 온라인과 같은 대안 언론 플랫폼의 활성화에 동참하는 것이다.</p>
<p>CNN의 북경, 도쿄 지부장을 보낸 적이 있는 언론인 레베카 맥키논과 IT 기술자이며 아프리카 지역 전문가인 에단 쥬커만이 2005년 하버드대 버크만 센터에서 만난 인연으로 이끌어낸 이 블로그 서비스는, 전세계 시민들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네티즌의 온라인 협업을 통해서 한 지역 시민의 콘텐츠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공유된다.</p>
<p>튀니지 혁명을 그들의 국화를 따서 &#8216;자스민 혁명&#8217;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자스민은 아직 필 계절이 아니다. 그리고 튀니지의 봉기는 아직 민주화 이행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아랍 지역, 나아가 제3세계는 디지털 통제에 맞서 디지털 세계 시민주의로 무장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의 꿈이 현실이 되는 데,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 그리고 내가 도울 수 있다. 인도 독립의 영웅 마하트라 간디가 이야기한 것처럼 &#8220;당신이 원하는 변화 그 자체가 되라.&#8221;</p>
<p>튀니지에 자스민은 아직 피지 않았다. 그 꽃이 피기 위해서는 그들만이 아닌, 우리가 필요하다.</p>
<p style="text-align: center"><a rel="attachment wp-att-50450" href="http://www.bloter.net/archives/50424/arabicfreeslim"><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50450" title="ArabicFreeSlim"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2/ArabicFreeSlim.jpg" alt="" width="500" height="500"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위키피디아 &#8216;<a href="http://en.wikipedia.org/wiki/Slim_Amamou" target="_blank">Slim Amamou</a>&#8216;. CC BY.)</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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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집트 혁명과 20세기 기술이 던지는 교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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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Feb 2011 04:01:40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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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아랍에 시민 운동의 꽃이 피고 있다. 시작은 튀니지다. 지난해 12월17일, 튀니지 남부 시디 보즈디에서 한 청년이 자신을 불태우는 길을 택했을 때, 정부의 책임에 대한 목소리는 높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튀니지 국민의 움직임은 이 지역 벤 알리의 23년 철권 통치를 끝냈다.
곧 불길은 다른 곳으로 번졌다. 이미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그리고 부패한 정부로 시달림을 받고 있던 이집트 국민들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아랍에 시민 운동의 꽃이 피고 있다. 시작은 튀니지다. 지난해 12월17일, 튀니지 남부 시디 보즈디에서 한 청년이 자신을 불태우는 길을 택했을 때, 정부의 책임에 대한 목소리는 높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튀니지 국민의 움직임은 이 지역 벤 알리의 23년 철권 통치를 끝냈다.</p>
<p>곧 불길은 다른 곳으로 번졌다. 이미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그리고 부패한 정부로 시달림을 받고 있던 이집트 국민들의 불만의 둑이 터졌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은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민들로 가득찼다. 그 덕분에 호스니 무라바크의 30년 독재의 막이 내렸다. 이집트는 유럽이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미국이 선택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중재자다. 서방 국가의 이집트 정치 안정에 대한 강력한 필요와 그를 통해 가능할 수 있었던 무라바크의 통치도 시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과정에 인터넷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위키리크스는 정부가 통제한 언론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정부의 부패상에 대해 시민들이 알게 해주었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그들이 단시간 내에 수많은 사람들을 일정한 장소에 집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p>
<p>하버드대에서 경제사학을 가르치는 니알 퍼거슨 교수는 영국 제국사에 대한 그의 저서 ‘제국’에서 대영제국이 건립되는 데는 300년이 걸렸지만 그것이 붕괴되는 데는 30년이면 충분했다고 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것은 20세 초반에 있었던 아일랜드의 독립과 그 뒤를 이은 인도의 독립이었다. 이로써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역사도 끝이 나게 됐다. 이처럼 한 국가가 먼저 모범을 보여주면, 다른 국가는 그 전철을 따라 새로운 사회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민들이 보여준 것은 그들만의 교훈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움직임은 아랍 전역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미 튀니지, 이집트 주변의 예멘과 이란에서 가시적인 대규모 시위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p>
<p>그러나 우리가 지난 세기의 교훈으로 이번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기에는 얼핏 한계가 있어 보인다. 위키리크스, 트위터, 페이스북이라는 21세기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잠들어 있던 것 같은 이 아랍 땅을 뒤흔든 것을 이 새로운 기술의 변화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이 ‘트위터 혁명’, ‘페이스북 혁명’ 등을 통해 각종 소셜 네트워크의 이름들이 지난 세기 민주화 혁명의 맥락 속에서 해석되고 강조되는 까닭이다.</p>
<p>이 흐름 속에서 볼 때, 지난 대영제국이 붕괴되는 과정에서의 영웅이 아일랜드의 숀 팬과 인도의 마하트라 간디라면, 이번 아랍 시민운동의 주요한 인물 중 한 명은 구글의 웨일 고님일 것이다. 구글의 지역 임원인 그는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주도했다는 이유로 지난 1월27일 실종됐다가 정부에 의해 구금, 취조 후 풀려났다. 그는 서방 여론과 지역 사회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정당과 시민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사회 변동의 주역으로 꼽힐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큰 변화일 것이다.</p>
<p>그러나 소셜 미디어의 사용이 확대되면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하는 시민 운동도 확산되며 점진적으로 민주화도 증대될 수 있다는 낭만적인 장미빛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과연 20세기의 교훈이 21세기의 기술에 대하여 그 실효성을 잃었는지 생각해보자.</p>
<p>사실, 우리가 지난 역사 속에서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기술은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제하고도 우리는 비행기, 잠수함, 라디오, TV, 영화가 지상에서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 믿었다. 기술사학자인 데이비드 나이는 그 목록에 열풍선, 독가스, 지뢰, 미사일, 레이저 건 등을 포함시킨다. 그 믿음의 근거가 해당 기술이 우리의 상호 의존성을 증대시키었기 때문이든 아니면 그 사용의 결과가 단순히 끔찍해서였든, 다음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그 동안 어떤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오래 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높은 기대를 반복해왔다.</p>
<p>돌이켜 보면 우리의 그 높은 기대에 대해 기술이 우리를 배반해왔던 것은 사실 우리의 믿음이 너무나 막연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기술이 인간의 본성 혹은 사회의 속성을 단기간에 바꿀 수 있는 것이라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술의 도구로서의 성격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목적과 동기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같은 원자력이 의학으로 사용되어 수많은 인명을 구하기도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 무기로 활용되어 우리의 상상을 넘는 수준의 대량 살상을 이끌기도 하는 것처럼.</p>
<p>이렇게 본다면, 기술의 긍정적 활용을 위해 인간의 의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20세기의 교훈은 21세기의 개막에도 그 설득력이 사라지지 않았다.</p>
<p>이집트의 소셜 네트워크 사용에 열광한 나머지 우리가 그 중대성을 쉽게 간과하기 쉬운 2011년 1월28일을 기억해 보자. 시민 운동에 대한 정부의 반격으로, 그 후 5일 동안 이집트 전역의 인터넷 사용이 중단됐다. 인터넷 검열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실행력을 갖추고 있는 중국에서도 시도한 바 없는 대담한 결정이었다. 서방 여론의 압력과 오프라인 시위의 지속에 견디지 못해 잠금 장치가 풀리기는 했지만, 소셜 네트워크가 기반을 둔 인터넷을 단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킬 스위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은 전화 등의 통신망과 달리 분산형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이같은 공격에 안전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더 크다.</p>
<p>이 5일의 공포가 일어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인터넷의 분산형 네트워크라는 기술적 특성이 왜곡될 수 있는 실제적인 사회 구조 때문이다. 특히 이집트처럼 정부 허가에 의해 인터넷 사업이 이루어지는 환경에서는 정부 입맛에 맞는 독점 기업이 인터넷을 관리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그들 사업자를 강압하는 방식으로 정부가 인터넷을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p>
<p>그러므로 이번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은 것은 전세계의 압제 속에 시달리는 시민들만이 아니다. 정권의 유지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력은 권위주의 정부와 독재가들도 하고 있다. 그들도 이번 사건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인터넷의 적극적인 사용에 맞서서, 그들 역시 좀 더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대한 통제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p>
<p>사실 하버드대 버크만센터의 에단 쥬커만을 비롯한 많은 제3세계의 인터넷 검열과 통제에 대한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같은 검열을 회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위키리크스 사례를 통해 널리 알려진 토르(Tor)를 비롯해서 많은 검열 회피 기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버드대 버크만센터가 행한 자체 조사에 의하면, 온라인상의 10억 인구 중에 약 2% 정도만이 프록시 혹은 그같은 검열 회피 기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검열 회피 기술의 발전과 검열 기술의 발전은 맞물리고 있으며, 제3세계의 상당한 인구가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한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카페 내에 경찰을 두고 감시를 행하는 것만으로도 기술적 정교함 없이 충분히 간접적으로 인터넷 검열을 행할 수 있다.</p>
<p>문제는 재정이다. 회피 기술을 통해 인터넷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가상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ISP)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일 공유 기술(P2P)과 같은 방식으로 전세계 인터넷 이용자들이 그 책임과 비용을 나누어 가진다고 할 지라도, 앞으로 폭증할 전세계 수십억 인구를 위한 그같은 인터넷 서비스의 시행은 미국 국방부의 예산으로도 넉넉하지 못하다. 즉 이번에 구글과 트위터가 합작해 이집트 시민들을 도운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제3세계 인터넷 이용자들이 검열 장벽을 넘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은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총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검열 회피 기술은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열린 인터넷과 열린 사회를 위한 궁극적인 답이 되지는 못한다.</p>
<p>마지막으로, 이 21세기 기술이 20세기의 교훈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는 점을 두고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중국이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차이나 와이드 웹(China Wide Web)으로 탈바꾼 인터넷 검열 선진국 중국에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혁명을 예측할 수 있을까? 광대한 인터넷 사용과 폭증하는 소셜 네트워크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서비스만 가지고는 그같은 전망을 예측하기 어렵다. 아랍을 뒤흔든 것은 기술이기 이전에 빵이었다. 높은 실업률, 인플레이션 그리고 부패한 정부가 그들에게 실망이고 분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미국 대통령도 부러워할 만한 지지율을 받고 있다. 1979년 개혁개방 이래 가파르게 성장하며 세계 패권 국가로 도전하고 있는 그들 국가, 그들 정부에 대한 자부심은 처안문 사태도, SARS 창궐도, 티벳 시위 탄압도 막지 못했다. 적어도 경제 발전과 그에 연관된 민족주의적 자부심이 유지되는 한,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가 대륙을 흔들 일은 적어 보인다.</p>
<p>소셜 미디어 구루인 뉴욕대 클레이 셔키 교수는 ‘소셜 미디어의 정치적 힘’이라는 최근 포린폴러시 기고문에서 2001년 1월1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부터 2011년 2월 이집트 카이로까지 모바일, 소셜미디어 등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사회 변동의 핵이 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기술 결정론에 의한 사회 변동을 설명하고 싶다면, 중국처럼 시장 경제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권위주의 국가들이 그들의 정치적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그와 다른 구루들의 침묵은 20세기 교훈이 21세기 기술사에서도 유효함을 보여준다.</p>
<p>인터넷, 소셜미디어의 도래로 시대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아직 그 시대를 맞이한 사회와 인간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이 변하는 것에는 기술의 도입을 넘어선 우리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1/02/egypt_unrest.jpg" rel="lightbox[49892]" title="EGYPT-POLITICS-UNREST"><img class="size-full wp-image-49910  aligncenter" title="EGYPT-POLITICS-UNREST"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2/egypt_unrest.jpg" alt="" width="500" height="363" /></a></p>
<p style="text-align: center">(사진 : <a href="http://www.flickr.com/photos/generationbass/5436445319" target="_blank">http://www.flickr.com/photos/generationbass/5436445319</a>. CC B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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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판 웹2.0 성공 스토리, ‘비키’에서 배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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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7 Feb 2011 04:10:58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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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972년생, 아직 마흔을 넘기지 않은 나이에 블로거닷컴과 트위터로 두 번 세상을 바꾼 에반 윌리엄스는 미국 중부의 네브라스카 출신이다. 네브라스카는 윌라 캐더의 &#8216;마이 안토니아&#8217;와 같은 미국 개척사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할 만큼 오지고 외진 땅이다. 그것은 역설적인 이야기다. 전세계에 디지털 소통의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 나고 자란 땅이 정보통신 혁명을 주도하는 미국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 중 하나라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1972년생, 아직 마흔을 넘기지 않은 나이에 블로거닷컴과 트위터로 두 번 세상을 바꾼 에반 윌리엄스는 미국 중부의 네브라스카 출신이다. 네브라스카는 윌라 캐더의 &#8216;마이 안토니아&#8217;와 같은 미국 개척사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할 만큼 오지고 외진 땅이다. 그것은 역설적인 이야기다. 전세계에 디지털 소통의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 나고 자란 땅이 정보통신 혁명을 주도하는 미국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은.</p>
<p>그러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가 블로거닷컴과 트위터 같은 서비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반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물이 넘쳐나는 곳에서는 물의 필요성을 모른다. 수분에 대한 갈증으로 허덕여본 사람만이 물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우물을 팔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에반의 성공은 예고돼 있었다. 그에게 소통은 물과 같은 것이었고, 온라인 표현은 바로 그가 찾던 우물이었기 때문이다.</p>
<p>그 원리는 2010년 미국의 대표적 IT 전문지 테크크런치가 수행하는 &#8216;크런치 어워드&#8217;에서 구글, 페이스북과 함께 경쟁에 참가해 &#8216;베스트 인터내셔널&#8217; 부문에서 1위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 <a href="http://www.viki.com/" target="_blank">비키</a>(Viki)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비키는 전세계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등의 영상 콘텐츠, 뉴스를 이용자들의 온라인 협업을 통해서 번역하고 자막을 붙여 전세계와 공유하는, 월 평균 방문자수 400만명이 넘는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이다. 그러나 이 플랫폼을 시작한 사람은 정작 토종 한국인으로, 언어의 장벽에 곤란을 겪던 한 한국인 유학생이었다.</p>
<p>비키의 아이디어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교육공학 석사 프로그램을 밟고 있던 문지원씨로부터 시작됐다. 평소 활달한 성격은 사라지고, 부족한 영어로 인해 외국인 친구들에게 수줍은 동양인 친구로 뜻하지 않던 오해를 받던 그녀는 외국어 학습을 위해서는 언어뿐 아니라 그 뿌리이자 배경이 되는 문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해 드라마나 영화를 자막과 함께 감상하고, 또 그 실제 자막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참여를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의 필요성에 눈을 뜬다. 그러나 그 같은 학습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줄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기로 결심을 한다. 그녀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온라인상에서 이용자 협업을 통하여 자막을 제작하는 서비스의 프로토타입을 실제로 만든다. 그 이후는 곧 역사의 시작이었다.</p>
<p>문지원씨는 졸업 직후 비키의 아이디어를 들고 실리콘밸리로 이주해온다. 한 살 연상의 남편이자 현재 비키의 공동 대표인 호창성씨는 그 아이디어를 스탠포드 MBA 기업가 강의에서 발표한다. 그 자리에 동문 멘토로 참석했던 실리콘밸리의 벤처 투자자가 이 아이디어의 사회적 가치에 주목했다. 전세계에 문화를 통한 외국어 학습에 목마른 사람은 문지원씨 한 사람만이 아니며, 디지털 환경을 통해서 실제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그 학습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혁신적인 발상이었기 때문이다.</p>
<p>그 인연은 실제 투자로 이어졌다. 2008년초 시드 펀딩을 받은 비키는, 2008년 말에 웹사이트를 런칭한다. 2009년에는 드라마, 영화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세계 콘텐츠 라이선싱 비즈니스를 이끌 수 있는 CEO를 영입한다. NBC 유니버설의 수석 부사장을 맡은 바 있었던 래즈믹이다. 성공적인 스타트업으로서 길을 가기 위한 기본적인 팀 구성이 완료된 것이다.</p>
<p>결국은 투자가 아닌 이윤이 장기적인 비즈니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비키는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도 정립해 놓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광고 단가가 낮아 비디오 광고 시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 유럽 같은 경우는 훌루닷컴(Hulu.com) 같은 경우 비디오 광고만으로 연매출 5천억을 남길 수 있을 만큼 비디오 광고 시작이 정착된 상황이다. 이에 따라 비키의 기본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이 비디오 광고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프리미엄 옵션 제공을 통한 무료, 유료 서비스를 통해 수익 채널을 다각화하는 것이 골자다.</p>
<p>동시에 비키는 이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콘텐츠 제공자와 공유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다. 애초에 이 서비스가 교육 목적으로 공익적 성격을 가지고 시작한 만큼, 무료로 영상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옵션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경제적 장벽이 온라인 학습이라는 기회를 또 하나의 걸림돌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좀 더 가시적인 성공의 단계로 이르기까지는 시간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팀 구성과 비즈니스 모델 구축상에서는 테크크런치가 인정한 대로 고무적인 기업이다.</p>
<p>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비키의 가장 큰 자산은 이들 창업자, 투자자, 협력사들이 아니라 이용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인기 한국 드라마인 경우 한국에서 방영 직후 1시간만에 영어로, 이틀 안에 40개 이상의 언어로 자막이 달린다. 이 온라인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 이용자들의 콘텐츠는 비키 시스템이 보유하고 있는 문장만도 1억개에 달한다. 이메일 인터뷰에서 비키의 제품 기획 총괄을 담당하는 문지원 대표는 이 같은 이용자들의 콘텐츠가 기계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는 좋은 밑천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대답했다. MS의 운영체제에 대항하는 리눅스, 브리태니커와 경쟁하는 위키피디아와 다를 바 없다. 전통적인 제조업 방식으로 불가능한 서비스를, 한국판 웹2.0의 가능성을 글로벌 한류의 맥락에서 보여준 것이다.</p>
<p>이렇게 비키가 이용자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데에는 경영진들의 이용자 협업 생산에 대한 이해와 지지의 힘이 컸다. 그들이 번역자들이 자기 콘텐츠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호하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비키는 온라인상에서의 콘텐츠 공유, 확산이 법적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활용한다. 이용자의 콘텐츠가 무단으로 도용돼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참사와 비극을 막기 위해서다. 또한 비키의 자막은 위키피디아와 마찬가지로 언제 누가 입력한 것인지 기록이 남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저작권 분쟁이 있을 경우에도 참조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국내 미국 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이 2차 저작물의 불법 생산이라는 명목으로 내 콘텐츠를 내 콘텐츠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인 것을 생각할 때, 이같은 이용자 혁신에 대한 지지 정책의 방향성은 더욱 차별적이다. 그리고 이 차별성이 곧 비키의 이용자 혁신을 이끄는 리더십이 됐다. 그리고 그 리더십이 그들의 플랫폼이 온라인 공간을 떠도는 수많은 글로벌 한류 팬들이 머물 수 있는 둥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p>
<p>따라서 비키는 경영진과 이용자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경영진은 자신과 같은 문화를 통해서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단순하고도 분명한 방법을 쉽고 빠른 채널을 통해서 전세계인들과 공유한 것이다. 그 공유의 결과가 만약 이 회사가 직원을 고용해서 콘텐츠를 생산했거나, 혹은 생산한 콘텐츠의 양과 질에 따라 경제적 보상을 주는 시스템으로 진행했더라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수준의 방대한 콘텐츠를 단기간에 만들어 냈다.</p>
<p>이것은 구글, 아마존 등의 다른 웹2.0 기업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보면 마법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마법의 진상은 깨닫고 보면 명료하다.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이유는 그것을 자신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가치를 얻기 위해 돈을 쓰고 있다. 비키, 혹은 이와 유사한 소위 오픈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서비스들이 하는 일은 이 돈을 매개로 하지 않고도 그같은 가치를 얻을 수 있도록 이용자들을 돕는 것이다. 그 결과가 돈으로 정의되지 않는 수많은 동기를 가진 사람들을 자극하고 그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p>
<p>사이버 공간에는 수많은 글로벌 한류 팬들이 존재한다. 이 글로벌 한류 팬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실무적인 필요상에서 한국어 혹은 다른 언어를 좀 더 문화 중심적인 방법으로 배우고자 하는 수요도 존재한다. 아니면, 그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키가 이들을 만든 것이 아니다. 비키는 그들이 찾던 것을, 그들이 필요로 하던 것을 제공해준 것이다. 창업자 문지원씨는 처음부터 비키의 플랫폼 제공자일 뿐 아니라 콘텐츠 생산자요, 이용자였다. 그 시작의 차이, 혹은 관점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들었다. 팔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서 만든 서비스는 소비자의 관점에서는 모을 수 없는 수많은 이용자들을 모을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서비스를 성장 시킬 수 있었다. 비키는 그같은 ‘이용자 혁신’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p>
<p>실제로, 이메일 인터뷰에서 문지원씨는 정보산업 자체가 진보와 혁신을 기반으로 하며, 바른 방향이 아닐 경우에는 머잖아 바른 방향을 가진 후발 주자에 의해 점령당하는 특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그것이 이 시장의 경쟁 구도의 ‘멋진 승부’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러면서 비키의 경영진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을 그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전세계에서 글로벌 한류 팬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웹사이트이지만 마케팅 비용은 써본 적이 없는 비키는 그 같은 경영진들의 시각이 만들어낸 것이었다.</p>
<p>이 한국판 웹2.0 성공 스토리, ‘비키’에게서 우리가, 특별히 주춤하고 있는 국내 대형 포털을 비롯한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들이 배워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p>
<p>첫 번째는 여타의 인터뷰에서 호창성 대표가 강조했던 것처럼, 세계 무대를 노려야 한다는 것이다. 1995년 MIT 미디어랩의 설립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그의 예언서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을 발표했을 때, 그는 디지털 혁명을 이끄는 힘으로 탈중심화, 세계화, 조화력, 분권화를 강조했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것이 ‘세계화’이다. 국내 시장을 정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오픈과 소셜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면, 그 서비스들의 무대는 세계이며, 이용자들이 전세계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점에서 볼 때, 세계 무대를 노려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곳에 더 큰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 이 서비스를 함께 성장시킬 수 있는 더 많은 이용자들, 참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 서비스의 가치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p>
<p>두 번째는, 세계 무대에 도전하기 위한 시각의 전환이다. 공급자 중심의 관점으로는 이용자 참여로 서비스의 틀을 만들어 가는 오픈과 소셜의 전세계 IT 트렌드를 앞서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따라잡기도 어렵다. 동시에 이 같은 트렌드는 기술적인 관점에서보다 ‘팬 문화’, ‘참여 문화’와 같은 문화적인 트렌드에서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이럴 마케팅’ 같은 웹2.0의 기술적 특성에 초점을 맞춘 마케팅 관점들의 한계는 그 안에서도 이용자는 여전히 특정 콘텐츠를 자기 복제하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용자들은 그 콘텐츠를 가지고 비키의 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막 제작 등의 각종 이용자 2차 창작물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글로벌 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같은 큰 문화적인 트렌드를 어떻게 적극적으로 찾아낼 수 있을지, 수용할 수 있을지를 고심해야 한다. 디지털 전략가 마이크 아우레즈가 말한 것처럼 “내가 내 페이스북 친구에게 어떤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 브랜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 친구를 좋아해서”이다. 공급자를 넘어서 그 대상, 소비자가 아닌 이용자, 이용자가 아닌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볼 수 있어야 기존 시장에 파괴적 혁신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혹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p>
<p>결론적으로, 비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이다. 남에게 팔기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자신이 쓰기 위한 서비스를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나누라. 이제 전세계가 우리의 시장이 아니라, 전세계가 우리의 협력자다. 이제는 그들과 함께 만드는 더 큰 미래를 꿈꿀 때다.</p>
<p><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1/02/viki.jpg" rel="lightbox[48641]" title="viki"><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48666" title="viki"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2/viki.jpg" alt="" width="500" height="303"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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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 빈곤의 시대, 누가 마크 주커버그를 만드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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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1 Feb 2011 01:56:05 +0000</pubDate>
		<dc:creator>비전 디자이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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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2010년 1월20일 대통령의 첫 라디오, 인터넷 연설의 주제는 &#8216;G20 세대&#8217;였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실력을 쌓은 젊은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는 요지였다. 연설 내용 가운데 G20 세대 중에서 페이스북 설립자인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20대 글로벌 기업 창업자들이 나올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8216;정부 지원 벤처 융성론&#8217;의 논리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인 마크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2010년 1월20일 대통령의 첫 라디오, 인터넷 연설의 주제는 &#8216;G20 세대&#8217;였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실력을 쌓은 젊은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는 요지였다. 연설 내용 가운데 G20 세대 중에서 페이스북 설립자인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20대 글로벌 기업 창업자들이 나올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8216;정부 지원 벤처 융성론&#8217;의 논리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인 마크 주커버그가 과연 미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성공한 인물인가가 의문시되었기 때문이다. 마크 주커버그가 정부로부터 사무 공간을 임대받고, 경영 컨설팅을 무료로 제공받는 벤처 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1인 기업가인가?</p>
<p>이 답을 구하기 위해 이 새로운 부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문제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구글의 검색엔진과 페이스북의 소셜 네트워크와 같이 시장을 뒤흔드는 서비스를 만드는 핵심을 생각해 보자. 과연 누가 마크 주커버그를 만드나?</p>
<p>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도 마크 주커버그가 있었다는 것이다. 1999년 9월 이동형 대표는 형용준, 정태석씨 등 6인과 싸이월드를 창업한다. 싸이월드는 2004년 2월 런칭한 마크 주커버그의 페이스북보다 약 4년은 더 시대를 앞선 서비스였다. 당시 급증한 국내 인터넷 이용자들은, 과거 산업화 시대에 도시로 몰려든 인구가 아파트 주민으로 수용됐듯이, 자연스럽게 싸이월드 고객이 됐다. 인터넷화는 곧 싸이월드화였고, 싸이월드는 대한민국의 &#8216;국민 인터넷 서비스&#8217;였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p>
<p>그러나 그 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이들 창업자들의 빈한한 초창기와 주커버그의 탄탄한 성공 가도와의 큰 차이다. 작년 개봉한 영화 ‘소셜 네트워크’가 극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실리콘밸리의 주목을 받은 주커버그는 초기에 충분한 벤처 자금을 받아 기록적인 속도로 성장한 기업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싸이월드가 혁신적 서비스를 창조한 결과는 그 인기와 맞물려 증가한 빚더미다. 여타의 신사업들이 그렇듯이, 비즈니스 모델이 명확히 세워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용자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관리, 유지, 보수하는 비용 자체가 곧 적자였다. 결국 싸이월드는 17억원이나 되는 빚에 시달리다가 서비스를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국내 대기업인 SK커뮤니케이션즈에 서비스를 매각한다. 기술과 서비스의 차이를 넘은 투자의 차이가 싸이월드와 페이스북의 서로 다른 운명을 만들었다.</p>
<p>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이들 투자를 만드는 배경의 어떤 차이가 싸이월드와 페이스북 간의 운명을 가른 것인가. 그리고 정부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이 투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에 정부의 정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일까.</p>
<p>이에 관련된 문제의 뿌리를 생각하기 위해 잠시 시계를 돌려보자. 인터넷이 사이버 대항해 시대를 열기 전에 있었던 기술 혁신에 의한 모험과 정복의 본류, 유럽 근대의 대항해 시대로 돌아가보자.</p>
<p>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있었던 유럽의 대항해 시대, 그들의 부의 근본이 된 항해, 식민지 개척의 시작은 포르투갈의 해상왕자 앙리케부터다. 그는 미개척지인 보자도르곳에 포르투갈 선원들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선박 개조, 지도 제작 등 각종 항해에 관련된 실질적 과학 기술을 발전시킨다. 그 결과 그의 꿈은 그 이후 세대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 크로스토퍼 콜럼버스,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등과 같은 인물들은 유럽의 지도를 바꿨고, 그들의 발견은 유럽의 근대사를 인류의 미래로 확장시켰다.</p>
<p>동시에 이 위대한 대항해의 후원자와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은 16, 17세기 유럽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 중 한 명인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신적 권위, 인간적 권위를 넘어서 무엇보다도 실험과 관찰을 동반한 이성을 강조한 베이컨의 영향은 지도 밖의 암흑 세계를 공포의 대상에서 적극적 탐험의 대상으로 바꿨다. 콜럼버스의 도전이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기술적 기반을 앙리케 왕자가 제공해 주었다면, 그를 위한 정신적, 사상적 기반은 베이컨 등을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인들이 제공했다. 그들은 전문가들의 지식을 답습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철학관을 전복하고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는, 혁신과 창조의 가치를 격상시켰다.</p>
<p>이 대항해 시대와 극적으로 상반되는 예가 14~15세기 중국 명나라에 있다. 영락제의 명령을 받아 남해에 일곱 차례 원정을 떠났던 환관이자 장군인 정화는 그의 함대를 동남아,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보낸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업적은 명나라의 조공 무역 네트워크를 확장하는데 그쳤다. 이후 유교 관료들의 반발로 더 이상 원정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당대의 명나라는 선박 제조술, 항해법 등 기술적 기반에서 유럽에 비해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을 활용하는 철학의 부재가 결국 대항해를 개막하는 영광을 유럽에게 양보하게 했다.</p>
<p>이 수백년 전의 대항해 시대가 오늘날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주는 시사점은 간결하다. 해당 기술에 투자하는 정책적 철학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비록 우리가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그 결실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p>
<p>다시 초기 싸이월드와 페이스북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자. 그 공통점은 비즈니스 모델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싸이월드는 그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결국은 대기업에 매각이 되었지만, 페이스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투자를 받을 수 있었고, 현재 가치 59조에 머잖아 더 큰 기업 가치를 가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p>
<p>그렇다면 왜 우리는 싸이월드가, 크게는, 소셜 네트워크의 가치를 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 좀 더 크게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시대에 던지는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 평가의 기준은 당장의 투자 이익 회수인가 아니면 잠재적인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인가?</p>
<p>과거 전신, 전화, 라디오, TV, 영화, 케이블, 인터넷 그 어느 미디어 중에서 초기 비즈니스 모델이 애매하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마르코니는 전신을 선박들이 안개 속에서 통신을 하기 위해서 개발했다. 안토니오 모치는 상호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 명령을 염두에 두고 전화를 만들었다.(<em>편집자 주 : 그레험 벨이 전화를 발명했다는 기존 사실은 지난 2002년 미 의회에서 안토니오 모치로 바로 잡혔다.</em>) 안토니오 모치는 모바일에서 문자 기능이 모바일 문화의 핵심적 문화를 차지할 줄은 초기 GSM 기술 표준이 제정될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다. 실제로 나중에 사용된 비즈니스 모델은 개발자들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이용자가 창조한 것이었다. 그처럼 이용자들에 의해서 해당 기술이 관심과 흥미를 받게 된 후에도, 라디오와 TV의 경우는 RCA의 사코프, 영화의 경우는 파라마운트의 아돌프 주커, 케이블의 경우는 CNN의 테드 터너, 인터넷의 경우는 넷스케이프의 마크 앤드리슨 같은 인물이 등장해 해당 기술의 상용화를 본격화하기 전까지 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p>
<p>이상의 예들이 들려주는 것은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실질적으로 상용화되고, 대중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까지에는 관련된 사람들의 많은 인내와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신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첨단 미디어 혁명들은 당장 그 것이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서 매장시켜 버렸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생텍쥐베리가 말한 것처럼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을 불러모아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누어 주는 대신,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야” 한다.</p>
<p>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과연 무엇이 마크 주커버그를 만드는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생각해볼 때, 초기 벤처기업 생태계에서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들고 나온 벤처기업은 비즈니스 모델이 애매할 수 밖에 없고, 그 기술과 서비스의 참신성을 사회의 대중적 가치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누군가가 지원해 나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역할의 필요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미국엔 그것이 실리콘밸리의 벤처 투자 문화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정부가 근대화 이후 해왔던 전통적 후원자 역할에 근거해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지난 1월20일에 발표된 대통령 성명, 그들의 마크 주커버그 육성론의 정체인 것이다.</p>
<p>그러나 그같은 역할에 대한 주장이 그 역할을 뒷받침하는 원칙과 기준이 무엇이냐는 논의를 잠들게 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그들의 마크 주커버그 육성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할 만한 원칙과 기준은 무엇인가? 정부가 견인하는 벤처산업을 상상할 경우, 정부가 말하는 벤처기업, 소위 1인 창조 기업의 가치가 우리가 말하는 구글, 페이스북 등의 파괴적 기술을 이끄는 시장 선도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같은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혁신’과 ‘창조’는 그 풍성한 논란을 떠나서, 실질적으로 대접을 높이 받을 수 있도록 어떠한 노력을 기울인 것인가?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그리고 그 근거는 앙리케 왕자의 신념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상, 그리고 영락제의 야심과 정화의 한계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그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 벤처의 미래가 싸이월드의 과거와 페이스북의 과거 중에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는가?</p>
<p>이상의 의문이 그 성명 발표가 세간에 화제를, 그리고 논란을 불러 일으킨 이유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의문을 불식시킬 만큼, 설득력 있는 답변을, 그리고 실질적인 정책을 듣지 못했다.</p>
<p><a href="http://www.bloter.net/files/2011/02/zuckerberg.jpg" rel="lightbox[48239]" title="zuckerberg"><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48306" title="zuckerberg" src="http://www.bloter.net/files/2011/02/zuckerberg.jpg" alt="" width="500" height="333" /></a></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8000">(사진 : http://www.flickr.com/photos/andrewfeinberg/2325430224. CC BY.)</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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