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블로거] 원칙으로 치장한 패션계 거장의 삶

  이여영 2009. 12. 15 (4) 삶/여가/책 |

패션잡지 기자들은 정말 그렇게 화려하게 살까? 화제를 뿌리며 종영한 드라마 <스타일>을 보며 많은 여대생들의 꿈이 패션지 기자로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협찬으로 얻어 쓰고, 수억원이 넘는 자동차를 선물로 받는 드라마 속 주인공. 유명 연예인들과 청담동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날마다 각종 행사에서 샴페인은 마시는 잡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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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비 윈투어』_제리 오펜하이머 지음

일단 국내에서만큼은 사실이 아니다. 이 드라마를 보며 많은 현직 잡지 기자들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쥐꼬리 만 한 초봉으로 시작하는 잡지 기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일할 때와 일상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오는 괴리감이 얼마나 큰 지 설명하느라 그들은 쉴 틈이 없었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스타일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식의 문구를 달고 자기계발서도 몇 권 나왔다. 현직 잡지 기자나 잡지사 편집장이 직접 쓴 책이었다.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여자로 성공해라, 라는 식의 흔해빠진 여성 가지계발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그런 종류의 책이 잘 팔리기는 했다. 『워너비 윈투어』도 그런 책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스타일>의 원조격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존모델,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성공 방정식을 소개한 책쯤이려니, 했다.

“안나 윈투어는 프리마돈나의 품위를 지나고 죽여주는 구두를 신으며, 철의 여인처럼 엄격한 애티튜드까지 겸비하고 있다”는 뉴욕타임즈의 평가와 “유행은 윈투어의 충고 하나로 탄생되기도 하고 무력해지기도 한다”는 타임지의 평가도 한몫했다. 성공한 여자에 대한 그저 그런 평가서쯤이라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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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펼쳐들고 1시간쯤, 무섭게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나온 삶이 진짜였다니, 하는 호기심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 세계 패션계의 바이블로 통하는 미국 <보그> 편집장. 야심차고 열정적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예측불허의 완벽주의자. 그러나 뱅 헤어에 선글라스, 마놀로블라닉 하이힐에 샤넬 수트와 모피를 즐겨입는 그의 화려한 삶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책 전체를 통틀어 5%도 안 되는 부분이었다. 멋진 여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래야만 한다, 는 식의 조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패션에 열광하던 런던의 10대 소녀가 자신의 꿈에 대한 강한 의지로 뉴욕 패션계에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진솔하고 숨가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이 책의 350여 페이지를 관통하는 가장 큰 매력은 화려한 잡지 편집장의 라이프스타일도, 그의 치열한 성공담도 아니었다. 미니스커트를 좋아하던 10대 시절부터 최고의 잡지 편집장이 되어 세계 패션계를 움직이는 오늘까지 단 한순간도 자신의 취향과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낯간지럽게 본인의 입으로 원칙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동창생, 친구, 친척, 동료, 부하직원, 전 애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온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윈투어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테니스를 치고 7시에 회사로 출근을 한다. 매일 아침 메이크업과 헤어 담당을 통해 완벽한 스타일을 완성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기사를 쓰지 않기 위해 파티나 행사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12시를 넘기지 않는다. 윈투어의 어시스턴트는 이 책의 저자인 제리 오펜하이머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안나의 체계성과 냉혹할 정도의 단호함에 깜짝 놀랐다. 안나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면 통화 내용을 종이에 적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항을, 모든 대화 내용을, 심지어 종이쪽지 한 장이라도 파일로 보관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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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움과 깐깐함, 우아한 취향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그의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하 직원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부터 부리는 태도까지 어느 하나 유별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은 이제 전세계인이 다 아는 사실이 됐다. <보그>에 면접을 보러온 지원자에게 안나 윈투어가 물었다. “음악 관련 기사를 맡는다면 어떤 식으로 하겠어요?” 아주 수준 높은 내용을 담겠다는 답이 돌아오자 윈투어는 “ <보그>는 대중적인 잡지예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다른 분야의 기사를 맡으면 어떤 식으로 할 거냐는 다음 질문을 받았을 때 지원자가 자기 나름대로 대중성을 고려해 답했더니 윈투어는 “<보그>는 수준 높은 잡지예요”라고 얘기했다. 윈투어와 일하려면 한 겨울에도 맨발에 발가락이 드러나는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 화장을 엷게 하는 것은 물론 정장에 어울리는 외투를 입어야 한다. 약속에는 단 1초도 늦어서는 안 되고 일한 지 6개월 이내에는 반드시 스타일이 변해야 한다. 윈투어 식으로.

책의 원래 제목은 ‘Front Row’(맨 앞 줄)다. 언제나 패션쇼장 가장 맨 앞줄에서 쇼를 평가하는 패션계의 대통령을 의미한다. 안나 윈투어의 뚜렷한 취향이 반영된 삶의 방정식을 엿볼 수 있다. 꼼꼼한 취재를 통한 지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평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11월호 보그 코리아가 서면으로 물었더니 윈투어가 답했다. “당신이 보그의 편집장이라면, 그런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라고. 이와 같은 윈투어식의 재치 넘치는 발언에 대한 기록이 적었다는 점이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번 손에 잡으면 그 자리에서 끝을 낼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다. 독자를 사지로 몰아붙이는 추리소설이 그렇고 내가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이의 박진감 넘치는 자서전을 볼 때가 그렇다. 수많은 콤플렉스와 한계를 극복하고 패션업계의 정상에 오른 안나 윈투어를 취재한『워너비 윈투어』는 그 어떤 추리소설보다 박진감이 넘쳤고 그 어떤 자서전보다 진솔했다.

어쩐 일인지 책을 읽는 내내 미친 듯이 일이 하고 싶어졌다. 패션은 단순한 옷입기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그의 확고한 신념과 유명 언론인이었던 아버지의 인맥까지 활용해 차례차례 미국 <보그>에 진입해갔던 그의 생생한 성공담을 읽어나가면서, 책 속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현장으로 뛰어나가고 싶어졌다. 윈투어처럼 열정적으로 일하고, 윈투어처럼 치열하게 내 취향과 원칙을 지켜내고 싶어졌다. 읽는 이에게 무언가 삶에 대한 동기 부여를 해야 한다는 자기계발서의 효과는 충분히 볼 수 있었던 책이었던 것 같다.

“안나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 행동했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결심으로 앞으로만 나아갔다.”(167p)


이여영

헤럴드미디어와 중앙일보를 거쳐 프리랜서 기자로 일한다. 시대상과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라이프스타일 분석이 주 관심사다. KBS 인터넷 '이여영의 아지트'를 진행하고 KBS 1TV '책 읽는 밤'의 고정 패널,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아침, 김창완입니다'의 '이기자의 마이 스타일'코너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여성을 위한 사회생활 지침서 '규칙도 두려움도 없이'가 있다. yiyoy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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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to “[책 읽는 블로거] 원칙으로 치장한 패션계 거장의 삶”

  1. 0987

    이 책 읽어보고싶네요 윈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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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패셔니아

    세계 패션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 인물에 신경을 쓰는지 도통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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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sejun's me2DAY

    팅이의 느낌…

    이 기사 [원칙으로 치장한 패션계 거장의 삶] 을 보고, 읽고 싶어진 책. 이번에 사놀까? 그러면 내년에는 읽을 꺼잖아….

  4. 서점가서 봤는데

    너무 소설처럼 써놨더군요…책은 역시 직접 봐야 한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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