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터포럼] 기억을 소급해 지우려는 욕망, 잊혀질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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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인 소년이 마법사의 세계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해리포터’ 시리즈. 이 책과 동명의 영화를 보면 기가 막힌 마법이 하나 나온다. 지팡이를 들고 ‘오블리비아테’라는 주문을 외우면 상대방의 기억을 지우거나 수정할 수 있다.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은 잊혀질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안을 2013년 2월 국회에 제출했다. 잊혀질 권리는 인터넷에 퍼진 나에 대한 정보를 삭제하는 권리다. 여기에서 삭제 요청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 그리고 삭제할 의무가 있는 서비스나 공간에 대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그보다 먼저 잊혀질 권리가 필요한 이유부터 따져볼 일이다.

이노근 의원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나 밝혀지기를 꺼려하는 개인의 정보까지 제한없이 전파되도록 하여 불안감을 조성”하는 상황을 잊혀질 권리가 필요한 배경으로 밝혔다. 클릭 한 번으로 복사하고 붙여넣고 공유하기 쉬운 웹의 특징이 때로는 피해를 준다는 뜻이리라.

과연 잊혀질 권리가 인터넷 이용자에게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잊혀질 수 있는 정보나 게시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실제로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면 모두 지워질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됐는지 등을 알아보고자 블로터 포럼을 진행했다.

잊혀질권리 포럼 한종호 이사 권헌영 교수 전응휘 이사장

  • 일시: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 장소: 블로터아카데미
  • 참석자: 권헌영 광운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전응휘 오픈넷 이사, 한종호 NHN 정책담당 이사, 정보라 블로터닷넷 기자

법으로 보장해야 하는 권리인가

정보라 블로터닷넷 기자 잊혀질 권리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잊혀질 권리에 관한 인식도 퍼지지 않았는데 법제화를 서두르는 것 아닌가.

⑦ 이용자가 자신의 저작물로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한 정보에 대하여 해당 정보를 취급하는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삭제를 요청하는 경우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지체 없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확인 절차를 거쳐 해당 정보를 삭제하고 즉시 신청인에게 알려야 한다.

제103조의4(저작물의 삭제요청) ① 온라인서비스제공자의 서비스를 이용하여 정보통신망에 자신의 저작물을 게시한 자는 언제든지 해당 온라인서비스제공자에게 게시된 저작물의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
② 온라인서비스제공자는 제1항에 따른 해당 저작물의 삭제를 요청 받으면 지체 없이 해당 저작물을 삭제하고 즉시 신청인에게 알려야 한다.

  • 제안이유 및 주요내용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른 정보의 보존과 보급의 용이성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개선해주는 반면, 정확하지 않은 정보나 밝혀지기를 꺼려하는 개인의 사상 등에 관한 정보까지 제한 없이 전파되도록 하여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음.

한편, 현행법에서는 온라인서비스제공자의 서비스를 이용한 저작물의 복제·전송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침해될 경우 이에 대한 중단의 요구권한을 명시하고 있는 반면, 권리침해 여부와 관계없이 온라인상에 게시한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자유로운 삭제권한에 대한 언급이 없는 상황임. 이에 온라인서비스제공자의 서비스를 이용하여 정보통신망에 게시한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삭제권한을 명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정보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려는 것임(안 저작권법 제103조의4 신설).

현행법에 따르면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전파되는 정보의 삭제요청은 해당 정보가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특정인의 권리를 침해한 경우에 한하여 인정함에 따라 개인이 자신과 관련된 내용 또는 과거 자신이 작성한 글 등에 대해서는 삭제요구가 어려울 수 있음. (안 정통망법 제44조의2제7항 신설)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의 잊혀질 권리 법제화하는 법안에서 발췌)

권헌영 광운대학교 교수 블로터포럼 잊혀질권리권헌영 광운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잊혀질 권리를 어떻게 법제화하는 게 좋은가, 그리고 잊혀질 권리를 권리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공론이 있는 상태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법대 교수를 모아 2012년 포럼 성격의 간담회를 했다. 그 간담회에서 잊혀질 권리 법제화와 권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만장일치로 ‘잊혀질 권리는 권리 속성상 개념으로 부적합하다’, ‘이미 한국법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형태, 유럽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강력한 규제 형태로 들어왔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잊혀질 권리는 미국과 유럽이 글로벌 인터넷기업 역외 서비스에 대한 통제 권한을 두고 논리적으로 싸움하는 원인일 것이다.

잊혀질 권리를 법적 권리로 확정하려면 요건, 대상, 실현방법, 권리와 연결되는 의무 당사자가 있어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권리, 저작권이나 인격권을 잊혀질 권리란 형태의 내용으로 범주화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게 나올 것인가. 지금까지 논의로는 ‘권리화하지 어렵지 않을까’이다. 이에 대해선 학문적 논의가 더 진행돼야 한다.

정보라 학문적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법제화가 급하게 추진되는 것 같다. 처음 잊혀질 권리를 접했을 때는 ‘당연히 필요하지’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은 검색 가능하고 빠르게 퍼진다는 속성 때문에 피해를 입는 상황이 발생하니 잊혀질 권리에 대한 고민은 물론, 보장해야 한다고 여겼다. 헌데 오프라인 세상에서도 ‘나를 잊어줘’라고 하지 않을 뿐더러, 기억을 지우는 게 불가능하다.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에만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

권헌영 잊혀질 권리라는 말을 쓰는데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를 얘기하지 않는다. 선정적인 케이스를 들어서 말할 뿐이다.

수업 시간에 내가 하는 얘기는 이렇다. 3살 아이가 발가벗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엄마가 옷을 입히고, 아이에게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고 나가는 거라고 교육을 한다. 사회성을 길러주는 거다. 집에 와서는 바깥에 있을 때와 달리,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가르칠 게다. 공간 적응 능력을 키워주는 거다. 잊혀질 권리는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내가 발가벗은 모습 본 사람은 다 지워’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업로드를 안 하면 아무 행동을 한 게 아니다. 그런데 글을 쓴다든가 하는 활동을 하고 나서 기록으로 남은 걸 보니 불리하다 싶어 싹 없애고 싶은 게 잊혀질 권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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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갖자는 유럽위원회 홍보 동영상

일기장을 예로 들겠다. 아이가 오늘 엄마나 선생님에게 혼난 일을 일기장에 썼다. 그런데 다음날 일기장을 펴고선 선생님이 색연필로 토를 단 걸 발견했다. 아이는 자기만 보는 일기장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 일기장을 선생님은 물론 부모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아이는 누구나 보는 걸 염두에 두고 일기를 쓰게 된다. 남도 보는 일기장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에 글을 쓰거나 행동하는 게 완전히 자기만의 것인지, 사회 공간에 나오는 것인지에 관한 훈련을 먼저 해야 한다.

블로그나 게시판에 글을 쓰는 건 남의 공책에 내 일기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 블로그를 쓰는 사람은 사업자의 공간에 자기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업자는 정당한 약관을 따라 분석활용한다. 그런 것마저 다 무시된 상태로, 바깥에 발가벗고 나왔는데 못 본 것으로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다 실현해 주겠는가. 지금 우리는 이러한 논의 없이 중간 단계를 뛰어 넘어 바로 권리 문제와 제도로 가니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시작한 ‘잊혀질 권리’, 지금은 범위 축소

전응휘 오픈넷 이사장 블로터포럼 잊혀질권리전응휘 오픈넷 이사장 개인정보 삭제 청구권. 잊혀질 권리는 바로 이거다. 내가 수집을 동의한 개인정보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권한이다. 지금 잊혀질 권리를 얘기하는 건, EC의 정보보호법이 1995년 만들어져 인터넷 관련한 사항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나온 거다. 유럽에서는 1995년 만든 EC 정보보호법을 판올림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그 와중인 2012년 유럽 일반정보보호규정(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GDPR)에서 처음으로 잊혀질 권리란 개념이 나왔다. 사실 이 개념은 언론 때문에 왜곡됐다. 언론은 잊혀질 권리라는 말을 두고 제 나름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잊혀질 권리는 굉장히 거칠었다. 그래서 미국쪽에서 반발이 거셌다. 미국의 거대 정보통신기업이 유럽시장을 석권하고 있고, 유럽에서 영향을 받으니 당연하다. 미국은 GDPR가 말한 잊혀질 권리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걸 요구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 강력한 비판 때문이라도 유럽 안에서 이견이 많았다. 최근 버전은 초안과 비교해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한종호 NHN 정책담당 이사 EU가 2012년 1월 잊혀질 권리라는 걸 처음으로 내놓아,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참고: EU, 초강력 ‘데이터보호법’ 만들었다) 2013년 5월 EU는 수정된 내용을 발표했는데 1년 전과 비교하면 쪼그라들었다. 한국에서 말하는 잊혀질 권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작년 EU가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잊혀질 권리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다. 당시 언론에 설명할 때 4단계를 말했다. ①개인정보 ②자기가 쓴 글 ③자기가 쓴 게 다른 곳으로 복사된 것 ④자기에 대해 쓴 것이다.

1년이 지나며 잊혀질 권리는 ①번 수준으로 좁혀졌다. 이노근 의원이 내놓은 건 새로운 버전이다. 유럽식으로 보면 ② 버전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잊혀질 권리를 ①로 축소하면 개인정보보호법이 있으니 새 법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②를 보면 저작권법에 따를 수 있는데 서비스에서 탈퇴하면 대부분 자동으로 삭제된다. ③과 ④를 포함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발의안 대로 잊혀질 권리 보장하면 사업자에 부담

전응휘 일단 인터넷에 공개하는 걸 동의했으면 복사가 되고 링크가 걸린다. 그리고 계속 복제가 돼 돌아다닌다. GDPR는 사업자가 공개를 목적으로 한 정보에 대해서도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관련한 링크와 복제된 내용에도 삭제 청구권을 강화한 것이다. 배포된 경로를 따라가 사업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다.

정보라 그게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웹은 기본적으로 복제되기 쉬운 구조인데 사업자가 자기도 모르게 복사돼 퍼진 걸 다 삭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갖긴 어려운 것 같다.

전응휘 기술적인 문제 이전에 이러한 권리를 함축하는 것이다. 함부로 공개를 목적으로 한 정보를 공개할 때는 사업자가 이러한 걸 고려해 책임질 수 있는 범위까지 배포하고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공개하라고 강조하는 거다. 이 권리를 보장한다면 처음부터 공개를 목적으로 한 정보에는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는 게 포인트라고 본다.

한종호 예전엔 화장실에 낙서를 해도 몇 사람만 보고 끝이었지만, 지금은 개인에 대한 정보가 빠른 속도로 퍼지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긴다. 온라인에서 자기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자기가 생산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정보, 나에 대해서 남이 쓴 정보 등 어떤 것이든 자기에게 불편하고 불쾌한 정보를 지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 욕구가 있는 한 잊혀질 권리에 대한 요구는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잊혀질 권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를 법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지, 이게 법으로 처리할 문제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잊혀질 권리는 법으로 만들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우리 법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게시물에 대해서 게시물의 주체가 자기 권리를 구제할 법적인 장치가 강하다. 잊혀질 권리는 유럽에서 나왔지만, 한국에서 더 강하게 보호한다. 예를 들어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기업에는 임시조치, 자기 정보 삭제 요청하는 절차 등이 있다.

이것저것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도 돌직구로 법부터 만들자고 한다. 이렇게 되면 법에 대한 찬반논리가 일어날 뿐이다. 법은 최소한으로 도입해야 한다. 사적자치의 원리도 있다. 새로운 인터넷 환경에서 정보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를 충분히 한 뒤 법 도입을 얘기하면 좋겠다.

잊혀질 권리가 가장 필요한 건 일반인보다 정치인

권헌영 잊혀질 권리를 개인정보보호법, 저작권법, 명예훼손 등 기존의 법리와 제도로 다층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잊혀질 권리를 반대할 때 가장 문제점은 없던 일이 사실처럼 알려졌을 때다. 내가 공직자인데 어느날 투서가 날아와 5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서 구속됐다. 신문에 대서특필됐는데 나중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무죄 확정된 게 먼저 나오겠는가.

그렇지만 있던 것을 없게 하는 게 과연 타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사익을 보장하기 위해 그 정도는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이는 언론표현의 자유와 직접 문제가 된다. 이 얘기는 인터넷 서비스는 본질적으로 언론인가에 관한 얘기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점을 하나하나 살핀 다음에 입법 조처해도 될 것이다.

전응휘 잊혀질 권리에 대한 통속적 버전에 관한 논의가 과장을 한다. 사실은 잊혀질 권리 최근 버전에서 예외를 인정하며, 남용될 위험은 없어졌다. 유럽 GDPR의 잊혀질 권리는 언론에 보도된 것 삭제, 표현의 자유 침해는 예외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행사를 위해선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역사・연구・통계과학에서도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리고 공중 보건을 이유로, 또는 회원국 법률이 개인정보의 보존이나 유지 의무를 법령으로 하게 했으면 삭제 요청하지 못한다.

한종호 중요도에서 최우선 순위는 아니겠지만, 잊혀질 권리를 법제화할 경우 사업자는 악용 가능성을 걱정한다. 법 도입 취지는 일반 선량한 국민이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데 과거 오점을 삭제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인정론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걸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정치인이다. 과거 자기가 성추행을 했다거나, 병역을 회피했다거나, 어디 구속된 적이 있다든지 하는 얘기를 다 삭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잊혀질 권리가 처음 제기됐을 때의 넓은 범위로 적용하면 공동체에서 반드시 알아야할 정보를 삭제하는 용도로 악용될 수 있다. 인터넷에 축적된 정보는 공동의 저작물이자 데이터베이스인데, 구멍이 날 것이다.

아까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를 물었는데, 자기가 이용하는 서비스 안에 있는 게시물이라면 삭제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다른 곳으로 복사돼 퍼지거나 다른 저작물과 합쳐져 새로운 저작물로 만들어져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찾는다고 해도 요청자의 것만 빼내 삭제해야 하는가. 무조건 ‘나에 관한 모든 것 다 지워’라고 하고 사업자는 즉시 삭제하고, 삭제하지 못하면 처벌까지 한다면 황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법으로 정하긴 쉽지만, 실제로 실행하긴 어려운 일이다.

오프라인 삶에서 요구하지 않는 권리, 왜 인터넷에서만

정보라 마치 마법을 부리기를 바라는 것 같다. 해리포터에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주문이 있다. 그 주문은 나란 사람을 본 것조차 잊게 한다. 그게 마법이라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 아닐까 싶다.

권헌영 세상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거를 돌아보곤 ‘그때 행동은 내 의사가 아니니 고쳐야겠어’라고 소급적 제도를 운영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 인터넷이나 사회생활은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가 단절되지 않는다. 그래서 캠페인과 인식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개인정보보호법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다. (법으로 보장하다보니) 이용자는 자기 정보를 보호하는 데에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경품을 얻으려고 개인정보를 준다.

전응휘 잊혀질 권리 논의는 나와 사업자 관계에서 내가 공개를 동의한 부분에 대해서 사업자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공개를 동의하지 않은 정보까지 잊혀질 권리를 적용하는 건 적절한 예가 아니다. 이를테면 취재에 응해 언론 보도가 된 것이 있다. 사업자과 계약 관계에서 수집 목적이 달성됐거나 개인정보 보호 기간이 지나면 폐기하는 게 법령화돼 있다.

정보라 하지만 잊혀질 권리 관련한 보도에서는 기사마저 다 지워야 하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기사가 인터넷에서 공유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도 지적한다.

전응휘 그것은 통속적인 논의다. 우리나라 개인정보보호법이 엄격하다는 건 맞기도 하면서 틀리다. 한편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이유로 가장 개인정보 침해적인 상황을 만드는 걸 허용하는 법률적 체계가 있다. 대표적으로 주민번호 수집이 상당한 정도까지 허용되고 있다. 이동통신사업자가 휴대폰 인증을 위해 주민번호를 수집한다.

다른 편에서는 주민번호가 글로벌 퍼블릭 도메인(공공재)이 돼 버렸다. 주민번호는 그 자체로 식별성이 없는데도 이를 근거로 모든 것을 연관해 데이터를 활용하는 환경이 마련됐다.

시장에 맡겨야 vs 법·제도 개정 필요

한종호 잊혀질 권리라는 게 유럽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에 뿌리를 뒀는데 우리 헌법재판소가 개인정보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고 이를 개인정보보호법에 반영한다. 하지만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이라는 헌법적인 가치가 잊혀질 권리라는 새로운 법 조항으로 가야 하는 것인지는 고민해야 한다. 이용자의 선택에 맡길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우리 회사에서는 e메일을 발송할 때 한 달 안에 삭제할지 여부와 같이 기간을 정할 수 있다. 잊혀질 권리를 잘 반영하는 서비스를 쓸 것인지를 선택하면 된다. 사람이 가고 서비스가 가면, 법을 만들지 않아도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이용자가 자기 정보의 주체가 되는 도구를 만들어주면, 잊혀질 권리가 개념은 유럽에서 나왔지만 우리가 더 좋은 결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전응휘 그 말에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소비자 선택이라고 하는 논리는 자유경쟁 시장을 전제로 한다. 내가 주민번호를 제공하지 않고 이동통신 서비스를 쓰려고 하면, 받아주는 이동통신사는 한 곳도 없다. 그들은 과징금을 받으면 그뿐, 주민번호 없이 가입을 받지 않는다. 시장 실패 상황에서는 소비자 선택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율 시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론은 미국적 풍토에서 나왔다. 유럽은 국가와 사회가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국은 철저하게 자유계약주의로 개인정보를 물건 취급한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정보 보호보다 활용을 강조하는 쪽은 미국적 전통을 강조하는데, 우리 법은 유럽 체계를 더 많이 베꼈다.

권헌영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동의에 기반한다는 걸 봐야 한다. 국가가 개인정보를 보호한다고 강력하게 규제해도 동의를 넘어선 것은 보호하지 않는다. 법은 나 몰래 내 것을 가져가 내 뜻과 어긋나게 쓴 걸 보호한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국가가 필요 이상으로 보호하는 건 없다. 동의할지는 개인적인 문제다.

우리나라는 행정권이 계약 전후좌후로 굉장히 많이 개입한다. ‘동의를 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동의한 결과는 어떻게 보존’하는 식으로 과잉 규제하는데 이건 시장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많이 나는 건 쓸데없이 정보를 많이 받고 있어서다.

전응휘 지금까지 개인정보는 이용자 동의를 받아 수집했다. 동의를 안 해도 서비스를 제공해주는가? 그렇지 않다. 이동통신사업자는 그동안 주민번호를 왜 수집했나. 후불요금제를 운영하며 채권추심 수단으로 쓰려고, 소비자에게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는 협박카드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2012년 정통망법 23조의2을 만들어 이동통신회사가 주민번호를 반드시 수집하도록 휴대폰 인증을 의무화했다. 같은 시기에 청소년보호법은 성인인증을 휴대폰인증으로 하게했고, 금융쪽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PC 인증에 공인인증, 휴대폰인증까지 한다.